260 : 모든 것의 시작 (3)
***
시간이 멈춘다.
할아버지가 시간을 멈춘다.
그렇게 멈춘 시간 속에서, 할아버지는 눈앞의 청년을 바라보고 있다.
청년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동자에는 감정이 아로새겨져 있다.
분노라는 이름의 감정이었다.
이 땅의 모든 것은 할아버지의 소유였다.
신격을 얻기 이전에도, 사람으로서 사람들을 다스릴 때에도, 할아버지 주변의 모든 것은 할아버지의 소유물이었다. 땅도, 재물도, 사람도, 그 목숨도, 모두 할아버지의 의지의 범위 안에 있었다.
신격을 얻고 난 이후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이 모두 할아버지의 소유였다.
땅? 재물? 사람? 그런 것들은 신격을 가진 할아버지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들이었다. 이 땅 위에, 넓은 하늘에, 끝없이 펼쳐진 바닷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할아버지의 것이었고, 할아버지의 의지를 거스를 수 없었다.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절대로 변하지 않았던 유일한 진실이었다.
그랬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청년에 의해, 필요로 만들어진 존재에 의해 처음으로 그 진실이 부정되고 있었다.
도구.
할아버지가 내세웠던 수많은 대체자처럼, 눈앞의 청년도 그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도구 중 하나였다.
도구는 이용가치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 이용가치가 있는지, 없는지의 판단은 오롯이 할아버지의 권리였다.
이용가치가 없는 도구라면 버려질 뿐이다. 그것이, 지금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고 있는 이 도구의 정해진 미래였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
정해진 미래를 안겨주는 대신, 시간을 멈추고, 버림받아야 할 자신의 피조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혈연이기에? 할아버지의 핏줄을 이은 유일한 존재이기에?
아니다. 그런 것은 할아버지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청년이 할아버지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필요에 의해 만든 이 도구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찌하여 그러는지 스스로 알지 못했다.
알지 못했다.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전지(全知)의 능력이 깃들어 있음에도, 그런데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시간을 멈추었다. 생각하기 위해서, 답을 찾기 위해서.
그렇게 멈추어버린 시간 속에서, 온 세상 만물의 시간이 멈추어버린 공간 안에서, 할아버지는 끝도 없는 질문을 반복하고 있었다.
***
여전히 시간은 멈춰있다.
아니, 모든 시간이 멈추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할아버지의 시간만이, 아니,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내 의식의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있다. 마치 끊임없이 흘러가는 대하(大河)처럼, 계속 흘러가고 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몇 시간? 며칠? 몇 달? 몇 년? 몇십 년?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오랜 시간이, 사람의 마음을 가진 존재였다면, 절대로 견딜 수 없는 억겁의 시간이 지났다는 사실 뿐.
그 오랜 시간 동안 할아버지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그렇게 수백만 번 되묻고 답을 찾는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의문 하나를 찾아냈다.
사람의 마음을 버리지 못한 것이 아닐까?
천 년 전, 능력에 걸맞은 이가 되기 위해서, 신격을 갖춘 완전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스스로 사람의 마음을 버렸는데, 아니,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버리지 못했던 것일까?
천 년이라는 시간 동안 마음 안에 가득 들어차 있던 공허(空虛)가 사람의 마음을 저버렸다는 증거라고 믿고 있었는데, 애초에 그러한 공허조차도 사람의 마음의 일부였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질문을 찾아낸 할아버지는 다시 눈앞의 청년을 바라본다.
멈추어진 시간 속에서 몸을 일으키는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청년.
사람으로 살 것이라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사랑하는 아이를 낳고, 끝이 정해진 삶을 살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던 청년, 허락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던 청년, 태어난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고, 모든 것이 의지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고 오만이라고 말하던 청년.
사람의 마음을 버리라고 가르쳤는데도 사람의 마음을 저버리지 못했다.
저버리기는커녕, 오히려 누구보다 강인한, 천지 만물에 대한 소유도, 전지전능의 능력도, 영생(永生)의 삶도 넘어설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군.
할아버지가 말한다.
나는 할아버지가 말한 그 세 음절 안에 담겨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청년이 가진 사람의 마음은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아니, 지금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마음, 바로 그것이다.
절대로 버릴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었다.
그랬군.
다시 반복되는 할아버지의 말을 끝으로 시간이 흐른다.
다시 시간이 흐른다. 멈춰있던 세상 만물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시간이 멈추었다는 사실을, 멈춘 시간 속에서 또 다른 시간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청년은 완전히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이내 깊게 허리 숙여 읍(揖)한다.
자신을 만들어준 존재에게 표하는 마지막 감사이다. 그 감사의 인사를 끝으로 그는 몸을 돌린다.
자신의 선택에 한 점의 의심도 없다는 듯,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뒤돌아 걸어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할아버지는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다.
***
인간의 시간으로 3년 남짓, 열두 번의 계절이 채 바뀌기도 전에, 청년은 다시 할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살려주십시오.
그가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청년을, 할아버지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네가 말하지 않았더냐? 사람으로 살 것이라고, 끝이 정해진 삶을 살겠노라고. 나의 허락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고. 스스로 말하지 않았더냐.
할아버지가 말한다.
바라보는 시선만큼 감정 없는 목소리였지만, 그 말을 듣는 청년의 얼굴에 고통이 떠오른다.
얼굴에 떠오르려던 고통을 안으로 갈무리한 청년이 다시 말한다.
살려주십시오.
정해진 끝이다. 네가 이야기했던.
할아버지가 말한다.
늦춰 주십시오.
청년이 말한다.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것을 자신도 알고 있다.
사람으로 살기 위해, 스스로의 의지로 거부한 신력의 행사를 이제 와서 원하는 것은 억지이다. 아니, 자기부정이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말했던 정해진 끝, 그 끝이 청년 자신의 목숨이었다면,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가는 것이었다면,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그 길을 따랐으리라.
입 밖으로 당당하게 꺼냈던 말을 스스로가 부정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처자식의 목숨이었다. 사랑하는 아내의, 사랑하는 아이의 목숨이었다.
사산(死産).
태중의 아이는 살아서 빛을 보지 못했다. 단순히 그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열 달간 품어준 어미의 목숨도 함께 가져갔다.
자기부정이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원한 삶, 사람으로서의 삶을 위해서, 그는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로 돌이킬 수 없게 된 두 목숨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이곳에 찾아온 것이다. 자신이 했던 말을 스스로 부정하기 위해서.
대신 제 목숨을 가져가십시오.
청년이 말한다.
나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말한다.
청년의 시선이 말한다. 믿지 못한다고, 믿지 않는다고.
하지만 할아버지는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정해진 끝이었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다.
대가를 드리겠습니다.
청년이 말한다.
후계를 낳아드리겠습니다. 새로운 아이, 저를 대신해 당신의 뜻에 따라 당신의 유지를 이어갈 아이를, 당신이 선택한 여인과 낳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돌려주십시오. 그저 지아비를, 아비를 잘못 만난 불쌍한 두 생명을 다시 되돌려주십시오.
당당한 시선으로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것이 네가 말한 사람의 삶이더냐.
할아버지가 말한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사랑하지 않는 아이를 낳겠다는 것이 네가 말한 사람의 마음이더냐.
할아버지의 말이 창칼이 되어 청년의 가슴에 꽂힌다.
하지만 청년은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할 수만 있다면, 사랑해 마지않는 두 사람을 살릴 수만 있다면, 어떠한 비난을 받는다 하여도, 어떠한 대가를 치른다 하여도, 주저함 없이 그리하겠다고 다시 다짐한다.
***
나는 여자의 품에 안겨 젖을 빠는 아기를, 두 개의 목숨을 되살리는 조건으로 태어난 또 하나의 생명을, 600년 전의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나에게 젖을 물린 여자를 바라보고 있다.
할아버지를 모시는 네 개의 기둥 중 궤주의 여식(女息), 새 생명을 담을 그릇으로 선택된 여인, 단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이름, 나의 어머니.
품 안에 안긴 아기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열 달간 품고 있었던 생명에 대한 애정이 묻어있다.
사랑스러운 눈으로 아기를 바라본다. 살겠다고, 젖가슴을 힘차게 빠는 아이를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는 할아버지는 생각한다.
가문의 명에 의해 사랑하지 않는 남자의 품에 안겨, 씨앗을 받아 평생토록 사랑받지 못할 아이를 잉태한다. 단순한 생식행위, 그 과정 어디에도 사람의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럴진대, 어찌하여 저토록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의 마음을 전부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어찌하여 알지 못하는 것들이 자꾸 생기는 것일까?
두 사람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배부르게 먹었는지, 아기는 젖가슴을 입에 문 채로 그대로 잠이 들어버린다.
잠든 것을 확인한 여자는 조심스럽게 아기를 떼어낸다. 가슴을 여미고, 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아기의 목을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 아이의 엉덩이를 받쳐 들어올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등을 토닥인다.
손길을 느낀 아기는 잠시 어설픈 저항을 해보지만, 이내 포기하고는 손길에 몸을 맡긴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아기는 모유와 함께 뱃속에 들어간 공기를 뱉어낸다. 그리고는 이내 잠에 빠져든다.
아기는 그렇게 잠이 들었지만, 여자의 손길은 멈추지 않는다. 더 좋은 꿈을 꾸라는 듯, 부드러운 손길로 아기를 토닥인다.
그런 두 사람에게 할아버지가 다가간다.
앉아 있거라.
자신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키려는 여자에게 할아버지가 말한다.
여자는 작게 고개를 숙이고 예를 표한다. 그러는 와중에도 가볍게 등을 토닥이는 손은 멈추지 않는다.
잠이 드셨습니다.
혹여라도 잠을 깨울까, 여자가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다.
할아버지는 아무런 대답 없이 여자를, 자신의 배로 낳은 아기에게 높임체를 사용해야만 하는 어미를 바라본다.
그녀가 높임체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했다. 여자의 품에 안긴 아기는 어르신의 핏줄이었고, 그런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는 할아버지가 선택한 도구 중 하나였으니까.
아니, 예전의 할아버지였다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당연했다고.
하지만 지금 여자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시선에는 연민이 깃들어 있었다.
자신이 낳았음에도, 젖어미의 위치에 있어야 하고, 젖어미의 역할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이 낳은 아이를 영원히 보지 못하는 운명을 강요받은 여인에 대한 연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