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 : 모든 것의 시작 (1)
***
나는 존재한다.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 정신?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인식할 수 있는, 하지만 육신이라는 껍데기는 없는 그런 상태로 눈앞에 펼쳐진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하천을 끼고 형성된 마을, 아니, 마을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어설프다.
방어를 위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여기저기 세워 놓은 나무 벽, 목책을 보고 있자니, 역사 시간에 배웠던 읍락(邑落)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언제일까?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아주 먼 옛날이라는 사실. 국가(國家)라는 단어조차 만들어지지 않았을 아주 먼 옛날.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생각이 그런 내 생각을 뒷받침한다.
모두가 일하지 않으면 입에 풀칠할 수 없다는 걱정, 언제 쳐들어올지 모를 외적에 대한 공포, 동시에 옆 마을을 정복해 일꾼을 늘리고 싶다는 욕망.
사람들의 그런 생각들이 나에게로 흘러들어 온다.
그리고 그렇게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한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아마도 서너 살? 이제 막 뜀박질을 시작했을 나이의 아이는 또래의 아이들에게 두들겨 맞고 있다.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일방적인 구타를 당하고 있다.
나는 저 아이에 대해 알고 있다. 저주받은 아이. 사람들이 아이를 그렇게 부른다는 사실을.
이유는 단순하다. 아이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어미의 목숨과 맞바꿔 생명을 얻은 아이는, 그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받아 낸 산파와 이제는 더 이상 아이에게 젖을 물릴 수 없는 어미를 바라볼 뿐, 세상에 태어났음을 알리는 첫울음을 울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아이를 불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울음은 아기에게 있어서 유일한 의사소통 수단이었다. 배가 고플 때, 변을 보았을 때도, 불쾌감을 느꼈을 때, 아기는 울음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하지만 아이는 울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를 원하고 있다는 눈빛으로 바라만 볼 뿐, 단 한 번도 울음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지 않았다.
남들과는 다르다는 차별성은 사람들에게 두 가지 반응을 이끌어 낸다.
숭배, 아니면 배척.
불행하게도 아이에게 정해진 운명은 후자였다.
아이는 버림받았고, 그 누구에게도 돌봄을 받지 못했다.
그렇게 아이는 밤이슬을 이불 삼아 잠을 자야 했고, 누군가 떨어트린 이삭을 주워 주린 배를 채워야 했다.
다른 아이였다면 이미 죽고도 남았을 운명, 하지만 아이는 살아남았고, 그렇게 살아남은 아이에 대한 배척은 더욱 강해졌다.
저주받은 아이, 재수 없는 놈, 이 마을에 흉사를 불러올 놈.
아직 머리도 채 영글지 않은 아이에게는 그런 이름이 만들어졌고, 무자비한 폭력이 뒤따랐다.
지금도 아이는 그저 눈에 띄었다는 하찮은 이유로 일방적인 구타를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를 감싼 두 팔 사이에서 절대로 꺾이지 않겠다는 안광을 빛내면서.
***
시간이 흐른다.
마치, 빠른 배속으로 재생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다.
그렇게 얼마나 흘러갔을까?
다시 인식되는 마을의 모습은 조금 전 보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조금 더 커졌고, 그만큼 인구도 더 증가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마을 여기저기에 불이 붙어 있다.
조금 더 촘촘하게 새워진 목책은 중간중간에 쓰러져 있었고, 그렇게 쓰러진 목책을 넘어 무기를 든 남자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렇게 마을로 들어선 침입자들은 거침없이 손에 든 칼을 휘두른다.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젊은 남성들에게 침입자들은 주저 없이 칼을 휘두른다. 그리고 그렇게 칼이 한 번 휘둘려질 때마다 목숨 하나가 거두어진다.
전쟁, 숭고한 이념도, 정치적 결단도 없는, 그저 내 재산을 늘리기 위해, 다른 이의 것을 취하기 위해 벌어지는 흔한 전쟁이다.
아니, 전쟁은 끝났다. 지금은 약탈의 시간이다.
승리한 측에서는 모든 것을 취한다. 패배한 측에서는 모든 것을 잃는다. 혼신의 힘을 다해 일군 전답도, 다음을 위해 비축해 둔 식량도, 열심히 키워 둔 가축도, 그리고 사람까지도.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사람이 죽어 가면서, 겁탈당하면서 터져 나오는 비명이 마을을 불태우는 화염을 타고 하늘로 퍼져 나가고 있다.
그렇게 살인과 약탈이 이어지는 와중에, 한 남자가 목책을 넘어온다.
그가 입고 있는, 남들과는 달리 조금 더 화려한 장식이 붙어 있는 갑옷이 그가 이 약탈군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목책을 넘어 마을로 들어선 그는 무감정한 얼굴로 마을을 둘러본다.
마을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도 어떠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열 번의 여름과 열 번의 겨울, 추방당하고, 10년 만에 처음으로 마을로 돌아온 남자의 눈에는 어떠한 회한도 담겨 있지 않다.
포로들, 아니, 이제는 노예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들이 남자의 앞에 차곡차곡 정렬한다.
남자는 포로들을 바라본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떨고 있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한다.
반가운 얼굴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저주받은 아이라고 돌을 던지던 옛 친구, 재수 없다고 발로 걷어차던 옛 이웃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
그 얼굴을 확인한 남자는 칼을 꺼낸다. 그리고 오랜 시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원한을 씻어 낸다.
그의 칼이 휘둘러질 때마다, 부하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우리의 지도자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무력과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차가운 마음을 가진,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신장(神將)이다. 그를 따른다면 절대 패배할 일이 없다!
그렇게 크게 소리친다.
***
다시 시간이 흐른다.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도 인구는 꾸준히 증가한다. 전투가 벌어지고, 사람들이 죽어 나가면 죽어 나갈수록, 마을은 커진다.
아니, 이제는 마을이라기보다는 국읍(國邑)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만한 규모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곳 가장 높은 곳에 그가 앉아 있었다.
수십 년간 이어진 정복 전쟁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불패의 신장(神將)은 이제 왕이 되어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전장에 나서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가 키워낸 군대는 이제 어느 나라와 싸워도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 불패의 군대가 되었고, 주변의 읍락들은 먼저 그에게 다가와 굴종을 맹세했다.
그는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었다. 대신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했다.
작은 마을을 다스리는 것은 간단했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들만 처리하면 되었으니까.
하지만 규모가 커지자, 그렇게 단순한 지시와 명령만으로는 사람들을 지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형벌과 공포는 언제나 효과적인 수단이었고, 그 수단을 이용하면 백성들은 그가 원하는 것을 가져왔고, 원하는 대로 움직였으니까.
하지만 효율적이지 않았다. 지배자의 자리에 오른 그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자는 여러 방법을 시도했다. 반복되는 시도와 실패 속에서 남자는 어떻게 해야 백성들을 효율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지를 하나씩 배워 갔다.
그리고 자신을 향하던 두려움 가득했던 시선들이, 조금씩 존경과 경애의 시선으로 바뀌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소문이 만들어진 것도 그즈음이었다.
-천제(天帝)께서 세상을 평안키 위해 태자(太子)를 보내셨도다. 다섯 마리의 용과 100명의 천군(天軍)이 함께 하시니, 세상은 평안해졌다.
***
저주받은 아이에서 천제의 아들이 된 그에 대한 믿음은 날이 갈수록 두터워지고 확고해졌다.
이유는 하나였다. 그는 죽지 않았으니까.
세상 만물 모두가 죽음을 맞이했다.
그와 함께 전장을 누볐던 장수들도, 그가 취했던 여인들도, 그의 애마도 모두 다 세월의 흐름을 따라 이승과 저승의 경계 너머로 흘러가 버렸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곁을 떠나갔지만, 그는 남아 있었다.
단지 살아남아 있는 것뿐만도 아니었다.
처음 칼을 잡았을 때처럼, 처음 말등에 올라탔을 때처럼, 남자는 언제나처럼 강인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어찌하여 늙지 않는지, 어찌하여 죽지 않는지, 그로서는 알 방도가 없었다.
이유를 몰랐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는 힘이 있었고, 권력이 있었으며, 사람들은 그를 숭배했다.
이루고자 하면 이룰 수 있었고, 얻고자 하면 얻을 수 있었다. 그가 원하는 모든 바가 이루어졌다.
만족스러운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삶을 즐기기에 100년이라는 시간은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100년이라는 시간은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몇 세대가 태어나고 죽어서도 닿을 수 없는 긴 시간이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부터 그들을 지배하던 천자의 아들에게 바치는 사람들의 숭배는 시간이 흐를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
다시 시간이 흘렀다.
많은 것이 변했지만, 옥좌에 그가 앉아 있다는 사실과 사람들이 그를 숭배한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숭배는 이제 신앙이 되어 있었다.
신이다. 그는 신이다. 신의 말씀에는 틀림이 없다. 그의 의지에는 그르침이 없다.
사람들은 그렇게 그를 찬양하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고, 그를 의심하는 자들에게 자신들이 앞서서 벌을 내렸다.
그렇게 그에 대한 신앙이 커져 갈수록, 남자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나는 무거운 표정으로 옥좌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고 있다.
알고 있다. 그가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를.
외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누군가가 옆에 없기에 외로워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힘이 있었고, 그가 취하고자 한다면 얻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조차도.
그럼에도 그는 외로워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이해할 수 없는 외로움이었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삶이라는 과정을 거쳐 온 그만이 느낄 수 있는 외로움이었다.
부족함이 없는 삶이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처음으로 마음 한구석에서 그런 의심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의심이 공허함이라는 형태로 마음 한구석에서 점점 더 크기를 키워 가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무리 귀한 재물을 얻어도,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을 취해도,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그의 마음속에서 점점 커져 가는 공허함을 채울 수가 없었다. 외로움을 달랠 수가 없었다.
그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져 갔고, 어두워지는 표정만큼 말수도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변해 가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그에 대한 믿음은 더욱 공고해졌다.
그리고 유난히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던 어느 가을날.
그는 자신이 삼라만상과 천지 만물의 조화를 의지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