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 : 의지와 선택
나는 고마음을 바라본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고마음에게로 향해 있다.
그렇게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음에도 그녀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언제나처럼 무감정한 표정을, 감정 없는 시선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저는 희생이라 생각지 않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한다.
그런 고마음의 대답에 정지수가 작게 미소 짓는다.
“이제는 희생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된 것 아닌가요?”
정지수의 말에 고마음이 정지수를 바라본다.
그 시선에 처음으로 감정이 떠오른다.
의문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그런 감정이.
“몇 번째인지 기억나십니까?”
정지수가 다시 그녀에게 묻는다.
고마음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여전히 의문이 담긴 시선으로 정지수를 바라만 보고 있다.
“이번 삶이 몇 번째 삶인지 기억하고 계십니까?”
정지수가 그렇게 다시 물어본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고마음이 그렇게 대답한다.
정지수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로 향한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물어본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못 한 채, 그저 정지수를 바라만 보고 있다.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대답에서, 정지수의 이야기에서 떠올린 가설이 너무나 끔찍했기에, 차마 입에 올릴 수 없었던 것이었다.
“짐작은 하는 것 같구나. 이제 좀 이해할 수 있겠지. 아까 그녀가 했던 말.”
-기억해 주신다면 저는 괜찮습니다. 지금 당장 저를 받아주시지 못하신다 하여도, 기억해 주신다면, 제가 작은 어르신의 반려임을 기억해 주신다면. 저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고마음이 했던 말.
“내가 해 준 설명도 이제는 이해할 수 있겠지.”
-또 한 번의 환생을 강요한다는 의미이지.
그가 했던 말.
“그녀는 사람이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아무리 정혼자인 작은 어르신을 반려로 모시는 운명을 타고났다고 해도, 사람의 몸으로 태어난 그녀에게는 정해진 수명이 있다는 의미이다. 그 수명이 끝나면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은, 사람의 몸으로 태어난 이상 피할 수 없는 운명.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면? 모든 것이 없던 일이 되어 버리는 것일까?”
정지수는 그렇게 말하고 고마음을 바라본다.
“아니, 그럴 수 없지, 죽음과 마찬가지로, 작은어르신의 반려가 되어야 한다는 운명도 피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환생을 하는 것이지. 전생의 모든 기억을 가진 채로, 같은 영혼으로, 새로운 육체로 다시 환생하는 것. 그것이 그녀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그녀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듣는 듯한 시선으로 정지수를 바라보고만 있다.
“자 어떨 것 같으냐? 만약 네가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면? 다음 대 어르신의 반려가 된다는 운명을 영혼에 각인한 채로 다시 태어나고, 오랜 기다림 속에서 기약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그리고 다시 죽음을 맞이하고, 또다시 태어나고를, 수백 년간, 수십 명의 기억을 가진 채로 환생을 반복한다면, 어떠하냐? 이 정도면 희생이라고 할 만하지 않겠느냐?”
전생의 기억을 가진 채로 태어난다. 그리고 언제가 될지 모를 운명의 날을 기다리며 수십 년의 삶을 살아가고, 그리고 또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은 안식이 아니다. 또 다른 환생을 위한 과정일 뿐이다.
꿈속의 소녀는, 아니, 내 기억 속에 봉인되어 있던 600년 전 그날의 소녀는, 그렇게 환생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이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바라보게 된다.
다른 사람이다. 하지만 같은 영혼이다.
그녀를 보았을 때 받았던 느낌.
그 느낌이 진실이었다고 정지수가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말이 사실입니까?”
그렇게 말하는 내 시선은 할아버지를 향해 있다.
마치 자신은 상관없다는 듯, 오늘 이곳에서 나온 이야기와 전혀 관련이 없다는 듯 침묵만을 고수하는 할아버지에게 소리친다.
“대답해 보세요! 진짜입니까? 지금 이 말이 사실입니까?”
분노가 휘몰아친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거대한 분노가 내 몸 신경계를 타고 커다란 탁류처럼 휘몰아친다.
터질 것 같다. 신경계를 타고 거칠게 휘몰아치는 분노가, 둑을 무너트리고 범람하는 강물처럼, 내 몸을 뚫고 터져 나올 것만 같다.
“내가 말했지. 너는 감당할 수 없다고.”
대답이 들려온 쪽은 정지수였다.
“그녀는 그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그저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 온 너로서는 알 수 없겠지. 이 가문을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뒤따랐는지,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어야 하는지를 말이지.”
“…….”
무어라 말하고 싶다. 이 분노를 쏟아 내고 싶다. 그러고 싶은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시 물어보자.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 있겠느냐? 궤주님의 손녀, 서주님의 딸, 문주님의 아들, 그리고 너의 친구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자리에 올라설 수 있겠느냐?”
그가 묻는다.
나는 그런 정지수를 무시한 채로 할아버지를 향해 소리친다.
“대답해 보세요! 이 자의 말이, 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가 진짜입니까? 사실입니까? 대답해 보시라고요!”
“그러하다.”
할아버지가 대답한다.
그리고 그 대답에 내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할아버지잖아요! 겸손하고 예의 바르게!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지 말라고 가르치고, 세상에 이익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롤스의 책을 읽으라고 한 당사자가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할아버지잖아요! 그렇게 가르쳐 놓고, 그렇게 키워 놓고서, 이제 와서 어르신이 되라고요? 한 사람의 인생을, 영혼을 이렇게 철저하게 유린해 놓고서, 이제 와서 정혼자이니 결혼을 하고,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그놈의 망할 어르신인지 뭔지가 되라고 지금 저에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분노를 쏟아 낸다.
“말씀해 보시라고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도대체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생각으로 이 끔찍한 상황을 야기한 것인지 말씀해 보시라고요!”
“작은 어르신.”
강 회장님이 날 부른다.
하지만 나는 그를 돌아보지 않는다. 지금 내 눈에, 내 마음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홍수가 빠져나간 뒤에 남아 있는 토사처럼, 분노가 빠져나간 내 마음속에는 역겨움이라는 잔재만이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르신, 작은 어르신, 가문을 모시는 네 개의 기둥, 가업, 희생.
그런 것들이 마구 뒤엉켜 있는 역겨움이었다.
“당신께서 원한 것이 고작 이런 거였습니까? 이런 역겨운 자리를 물려주고 싶어서, 저를 키우신 겁니까? 그런 겁니까? 대답해 보세요!”
“그래. 내가 원한 것이 그것이다.”
할아버지가 말한다.
“그 역겨운 자리를, 원래대로였다면, 너의 아비가 물려받았어야 했을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너를 키웠다.”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다.
상한 음식을 먹었을 때, 몸 밖으로 배출해 내려는 신체 활동처럼, 방금 들었던 이야기를 게워 내고 싶었다.
“싫습니다.”
내가 말한다.
“모르셨습니까?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절 지켜보시면서도 저를 모르셨습니까? 제가 아무 군말 없이 할아버지의 아니, 당신의 그 역겨운 생각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웃기지 마세요. 싫습니다. 당신이 날 이렇게 키웠고, 지금의 내가 당신이 만들어 낸 결과입니다. 권력? 금력? 삼라만상과 천지 만물의 조화를 움직이는 그 대단한 능력? 다 필요 없습니다. 개나 주라고 하세요! 손주 며느리가 될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하면서, 수십 번의 삶을 그대로 기억하게 한 채로 환생을 강요하면서, 그게 무슨 신이란 말입니까? 악마, 그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신 놀이를 하는 악마에 불과한 것 아닙니까!”
“작은 어르신! 말씀을 조심해 주십시오!”
강 회장이 나에게 말한다.
“신중하게 생각해 주십시오. 그렇게 쉽게 말씀하셔서는 안 됩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강 회장을 바라보았다.
그에게서 나이 먹은 경주마를 떠올렸다.
생식능력를 거세당한 채, 달릴 수 있을 때까지, 기수에 채찍을 맞아 가며 경주로를 달려야만 하는 경주마처럼, 생각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거세당한 채, 그저 충성만을 맹세해야 했던 불쌍한 사람.
어쩌면 그도 할아버지가 만들어 낸 또 다른 희생자가 아닐까?
시선을 움직인다.
유 선생님, 승환이 아버님, 이현웅 씨. 그리고 600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야 했던 정지수.
정지수는 옅은 미소를 띤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할아버지가 몰랐을까?
저 사람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오늘 이런 일을 계획하고 있었음을, 전지전능하다고 하는 할아버지가 과연 모르고 있었을까?
다시 시선을 돌린다.
고마음, 조금 전 보였던 의문은 그녀의 눈동자에서 더이상 찾을 수 없다.
그저 같은 표정으로, 무감정한 눈빛으로 앉아 있을 뿐이다.
불쌍한 사람.
할아버지가 만들어 낸 인형.
그녀에게 형언할 수 없는 미안함과 슬픔을 느꼈다.
나는 다시 할아버지를 바라본다.
“아까 물어보셨죠.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냐고. 거부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선택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하겠냐고도 물어보셨죠? 마찬가지로 거부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한번 더 확실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당신이 만들어 놓은 삶은 걷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
“작은 어르신!”
강 회장님이 날 부른다.
“한수 군!”
유 선생님도 날 부른다.
하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는다.
조금 전 내 온 마음을 불태웠던 분노가 빠져나가고, 역겨움이라는 잔재가 메말라 버린 후, 오히려 내 마음은 차갑게 식어 버린다.
그렇게 식어 버린 마음을 담아 할아버지를 바라본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꿈에서 보았던, 600년 전의 그 기세를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할아버지가 더 이상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문이니, 가업이니 하는 일말의 가치도 없는 것에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린 또 다른 희생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그렇게 물어본다.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할아버지가 말한다.
“모든 것?”
내가 묻는다.
“네가 가지고 있던, 네가 아끼고 사랑하던 모든 것. 너 자신까지 포함해서.”
“죽어야 합니까?”
내가 묻는다.
“작은 어르신!”
“제가 죽으면 됩니까?”
“죽음과는 다르지.”
할아버지가 말한다.
“어떻게 다릅니까?”
“무로 돌아갈 것이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한다.
“그게 싫으면, 이 껍데기를 지키고 싶으면, 할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거짓된 삶을 살면 됩니까?”
그렇게 묻고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아니. 쓸데없는 질문이었네요. 마음대로 하십시오.”
나는 그렇게 말한다.
“죽음이든, 무든, 원하시는 대로, 아니, 제가 원하는 대로 해 주세요. 할아버지의 선택이 아닌, 제 의지로, 제가 한 선택에 따라서!”
나는 그렇게 최후통첩을 했다.
방 안이 조용하다.
여덟 명의 사람이 들어차 있음에도, 그들이 작게 내쉬는 숨소리를 제외하면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그래. 네가 원한다면 그리해 주지.”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서,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