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255화 (255/271)

255 : 초대받지 못한 손님 (2)

***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그가 한 말이 문제가 아니었다.

어째서 그가,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인지부터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이해하고 못하고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그는 할아버지를 향해 몸을 돌린다.

그리고는.

“문안 인사 올리겠습니다.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할아버님.”

그렇게 말한다.

나는 순간적으로 내 귀를 의심했다.

할아버님? 지금 그가 우리 할아버지에게 할아버님이라고 했다고? 어르신이 아니라?

“그래. 오랜만이구나.”

할아버지의 대답이 들려온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할아버지를 바라본다.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놀라움이나 당황스러움 같은 감정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 아니, 할아버지 자신이 이 상황을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평소의, 아니, 꿈속에서 보았던 그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다.

또 다른 의문이 떠오르려는 내 머릿속으로 다시 정지수의 목소리가 파고든다.

“오랜만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정지수의 시선 끝에는 고마음이 있었다.

인사를 받은 고마음은 조금 전 나에게 했던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정지수를 향해 허리 숙여 인사한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도 놀라움이나 당황스러움 같은 감정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무감정한 얼굴, 내가 처음 이곳에 들이닥쳤을 때에도, 나에게 인사를 건넬 때에도, 내가 할아버지에게 강하게 따지고 들 때에도 보여 주던, 무감정한 얼굴로 그렇게 허리 숙여 인사를 건넨다.

나는 그런 세 사람의 모습을 통해서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나만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나는 모르지만 세 사람은 알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아니,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지금 모습을 드러낸 저 남자가 여태 내가 알고 있던 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도.

사람 좋은 미소로 언제 밥 한번 같이 먹자고 이야기하던, 자신의 단골 식당이라는 분식집에서 사장님과 정다운 대화를 나누던, 길 가다가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하고,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가벼운 잡담이나 나누는 사이가 되자고 말하던, 자신을 형이라고 불러 달라던 그 정지수가 아니었다.

같은 얼굴이었고 같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는 사람들이 알고 있던 한국대 프린스도, 내가 알고 있는 학교 선배 정지수도 아니었다.

“허락해 주신다면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문 앞에 서 있던 정지수가 할아버지에게 말한다.

“들어오너라.”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한다.

허락을 받은 그가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온다.

그가 들어서고 나서야, 그의 뒤에 서 있던 사람의 모습이 들어온다.

인주라고 했던가? 할아버지를 모시는 네 개의 기둥 중 나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유일한 사람, 이현웅이 정지수 뒤에 서 있었다.

나를 안내했던 강 회장님과 달리, 인주는 문을 닫고 나가지 않는다.

방 안으로 한 걸음 걸어 들어와 두 손을 앞으로 공손히 모으고 서 있다. 마치, 정지수를 보호하는 호위 무사처럼, 그렇게 뒤를 지킨다.

“할아버님께서는 이미 아시고 계시겠지만, 인주께 도움을 좀 받았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그에게 말할 기회를 허락해 주시길 간청드립니다.”

정지수가 말한다.

그에게 받은 도움, 그가 줄 도움, 그 어느 하나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다.

그렇다고 분노하거나 노여워하거나 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여전히 같은 표정으로 정지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할아버지의 침묵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다들 들라 하게.”

계속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할아버지가 이윽고 그렇게 말했다.

***

큰 방이었다. 우리가 있는 이 방은 일반적인 관점에서의 거주 공간으로서는 절대 작다고 말하기 힘든 크기였다.

그렇지만 여덟 명, 처음부터 이 방에 있던 할아버지와 고마음, 나와 정지수, 그리고 사주가 들어서자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아직 공간의 여유는 있었다.

하지만 여덟 명이 내뿜는 호흡이 방 안을 가득 채운 침묵과 더해지면서 방 안의 공기를 더욱 무겁고 눅진하게 만든다는 느낌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가장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정지수였다.

“허락해 주신다면 다른 분들에게도 설명을 드릴까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정지수의 시선은 강민철 회장을 향해 있었다.

강민철 회장은 곤란하다는 얼굴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러한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정지수가 설명을 시작했다.

사주는 그들이 말하는 ‘성혼(聖婚)’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지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인주에게 대면식이 열리는 날, 즉 내가 고마음과 할아버지가 정해 놓은 정혼자와 처음으로 만나는 달, 내가 그녀와 혼약을 맺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그 순간에 자신이 움직일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했고, 인주는 그 요청에 따랐다고 했다.

“실례되는 행동이었다는 점은 저도 인정합니다만, 저에게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인주께서도 그 사실을 인정해 주셨고. 저에게는 다른 선택이 없었음을 다른 기둥께서는 이해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지수는 그렇게 말하며 다른 세 명의 기둥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정중하고 기품 있는 말과 동작이었지만, 그 안에는 선전 포고와 같은 날카로운 기운이 담겨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찌하여.”

정지수의 이야기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사람은 강 회장님이셨다.

“궤주님께서는 제가 못 올 곳에 온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듯합니다.”

정지수가 말한다.

“아니, 그런 말씀이 아니라….”

거기까지 말한 강 회장님은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핀다.

자신이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다.

그저 조금 전 모두 들어오라는 마지막 말을 끝으로 여전히 침묵을 고수하고 있다.

잠시 할아버지를 살펴보던 강 회장님의 시선이 다시 정지수에게로 향한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둘째 도련님의 행차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둘째 도련님? 나는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궤주님은 참으로 고루하시군요.”

정지수의 답변이었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아직도 적서(嫡庶)의 차등을 두시려 하시는지…. 회사를 경영하시는 입장에서 그리 올바른 생각은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 인주 님. 안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작은 어르신.”

정지수 뒤에 서 있는 이현웅 씨가 그렇게 대답한다.

둘째 도련님, 적자와 서자를 의미하는 적서(嫡庶), 그리고 작은 어르신.

이 세 단어가 내 머릿속에서 하나의 가설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설마….

그때 내 귀에 들려오는 익숙지 않은 목소리.

“계승권을 주장하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승환이 아버님이 말씀하신다.

“제가 가진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정지수의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

“…어떠한 근거로 그런 불경한 말씀을 하시는 건지 여쭈어봅니다.”

그렇게 말을 꺼낸 사람은 유 선생님이셨다.

나를 향하던 정지수의 시선이 유 선생님에게로 향한다.

만들어내고“선생님께서는 이해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만…. 조금 실망스러운 마음이 드는군요. 선생님께서도 혹시 제가 서손(庶孫:아들의 서자)이기에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어찌 불경하다는 말씀을 하신 건가요?”

“어르신의 의지에 반하는….”

“모르고 계셨을까요?”

정지수의 말이 파도처럼 방 안을 쓸어 간다.

“오늘 제가 이곳을 찾아온다는 사실을, 인주께 도움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아니, 제가 어떠한 생각으로 계승권을 요구하는지, 과연 할아버님께서 모르고 계셨을까요?”

그의 목소리는 한국대 프린스라는 별명처럼 차분하고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이 할아버지에게로 모인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다.

나를 포함해 다들 그 침묵에 긍정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정지수의 말이 다시 이어진다.

“이해합니다. 선생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인지. 다 저희 할아버지에 대한 충정의 마음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정지수는 그렇게 말하며 유 선생님에게 고개를 숙인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정지수에게로 모인다.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제 마음을 왜곡되지 않게 사주님들께 말씀드릴 수 있을지….”

“제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정지수가 그렇게 말을 시작하려는 찰나, 정지수 뒤에 서 있던 이현웅이 처음으로 앞으로 나섰다.

그의 시선은 할아버지를 향해 있었다.

할아버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다.

그 끄덕임을 확인한 이현웅은 작게 고개 숙여 예를 표한 다음 사람들을 둘러보고 말한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적지적작(適地適作). 알맞은 땅에 알맞은 작물을 심어야 한다고.”

“제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박기준 변호사님, 승환이 아버님이 할아버지에게 여쭤보신다.

“저도 아직은 둘째 도련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겠습니다.”

승환이 아버님이 정지수를 보며 말한다.

“문주님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정지수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로 그렇게 대답한다.

“둘째 도련님이 어르신이라는 땅에 적합한 작물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해 주시겠습니까?”

승환이 아버님이 이현웅 씨에게 묻는다.

이현웅 씨는 그런 질문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바로 대답을 시작한다.

“저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첫째 작은 어르신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장자(長子)이시니까요. 제가 알기로는 첫째 작은 어르신이 계시다는 것을 서주님은 오늘까지 모르고 계셨습니다. 맞습니까?”

이현웅 씨가 유 선생님에게 묻는다.

“…그렇습니다.”

유 선생님이 대답한다.

“저 또한 첫째 작은 어르신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본인께서 직접 말씀해 주시기 전 까지는.”

“그게 언제입니까?”

강 회장님이 물어보신다.

“10년 전, 제가 아직 공직에 몸담고 있을 때, 첫째 작은어르신께서 학부생의 신분으로 계실 때입니다.”

“…10년 전.”

강 회장님이 나직하게 말한다.

“첫째 작은 어르신께서 처음부터 자신의 존재를 밝히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연한 만남이 있었고, 그저 전도유망한 젊은 청년으로 생각했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눠 보니 나이에 걸맞지 않게 깊은 학식을 보유하고 있고, 학식보다 더욱 깊은 철학과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 동안 만남을 유지하고, 지켜보면서, 저는 이 전도유망한 청년을 저의 후계자, 주재목(柱材木)으로 삼아야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현웅 씨가 그렇게 말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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