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253화 (253/271)

253 : 시우(始偶) (5)

예상치 못한 장면이었다.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여배우 고마음이 할아버지와 마주 보고 앉아 있을 것이라고 어떻게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왜냐하면 오늘 아침에 고마음을 떠올렸으니까. 아침에 꾸었던 자각몽에서 만났던 소녀, 언제까지나 기다리겠다고 말하던 소녀에게서 고마음을 떠올렸으니까.

당시에는 어째서 고마음이 떠올랐는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나이도, 외모도, 분위기도 전혀 다른 소녀에게서 어째서 고마음을 떠올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같은 영혼이다. 다른 사람이지만, 같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지만, 두 사람이 같은 영혼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놀라지 않은 것은 고마음도 마찬가지였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보고는,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로 몸을 돌린 후, 깊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동작 어디에도 놀라움이나 당혹감 같은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아는 사람에게 인사하듯 자연스러운 동작이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강 회장님은 그렇게 말하고는 문을 닫는다.

문이 닫히고, 방에 우리 세 사람만이 남는다.

문 앞에 서 있는 나, 그런 나를 바라보는 고마음, 그리고 내가 찾아왔다는 사실에 관심 없다는 듯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할아버지.

“앉거라.”

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에서야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따르지 않는다.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할아버지를 바라본다.

아니 노려본다. 말해 달라는 눈빛으로 강하게 할아버지를 쏘아본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시선은 여전히 정면 어딘가를 향해 있다. 이 공간이 아닌 어딘가를 주시한 채로, 그저 다시 찻잔을 들어 올린다.

나는 고마음을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실 수 있으실까요?”

실례되는 말이다. 초면인 사람에게, 아니, 초면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지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할아버지의 손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실례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부터 내가 할아버지와 나눌 이야기를 그녀에게 들려주는 것이 더 실례되는 행동이라고 생각됐다.

하지만 대답은 할아버지에게서 들려온다.

“앉도록 하여라.”

할아버지의 말은 고마음을 향하고 있다.

할아버지의 말에 담겨 있는 의미는 명확하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를 그녀도 들을 자격이 있다는 의미.

고마음도 그런 할아버지의 생각에 동의한다는 듯, 나에게 작게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자리에 앉는다.

좋아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나오시겠다면, 나도 더 이상 사양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할아버지에게 물어본다.

“말씀해 주세요.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내 말을 못 들었을 리 없지만, 할아버지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다.

“답을 듣고 싶으면 오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다시 말한다.

할아버지의 시선이 처음으로 나에게로 향한다.

익숙한 눈동자에서 낯선 눈빛이 느껴진다.

감정이라고는 하나도 담겨 있지 않은 이질적인 눈빛.

낯설다. 하지만 처음 보는 눈빛은 아니다. 아침에 꾸었던 꿈에서 보았던 눈빛이다.

무섭다고 생각했었다. 무서운 눈빛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눈을 돌리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여기 왔습니다. 이제 당신께서 대답하실 차례입니다. 그런 눈빛으로 마주 선다.

“무엇을 듣고 싶으냐.”

할아버지가 묻는다.

“제게 무엇을 원하시는 겁니까?”

내가 되묻는다.

“네가 아는 그대로다.”

할아버지가 말한다.

내가 아는 그대로?

“…천지 만물을 움직이는 힘과 다른 사람들은 꿈조차 꾸지 못하는 부와 현대 사회에서는 절대로 허락되어서는 안 되는 충성을 맹세하는 네 개의 기둥을 물려받고, 할아버지가 정해진 정혼자와 결혼을 한 다음, 오래된 서점에 앉아서. 마치 흑막 뒤에 몸을 감춘 악당이라도 되는 것처럼,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것. 그게 할아버지가 말한 가업, 제가 물려받아야 할 가업이라는 말씀이십니까?”

내가 그렇게 강하게 쏘아붙인다.

***

문을 닫고, 복도를 걸어 나와 거실로 들어서는 강민철 회장의 얼굴에는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른 사주의 일원들도 강민철 회장과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은 경사스러운 자리였다. 어르신을 모시는 사주가 처음으로 시우(始偶)께 인사를 드리는 자리였으니까.

여자 女 자와 낳는다는 의미의 台가 합쳐져 만들어진 始 자는 ‘비로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형성 문자였고, 偶는 말 그대로 짝을 의미하는 한자였다.

‘비로소 짝이 된다’는 의미를 가진 시우(始偶)라는 호칭은 단 한 사람에게만 허용되는 호칭이었다. 작은 어르신의 반려가 될 운명을 타고난 사람만이 가질 수 있었다.

어르신을 모시는 사주가 시우께 인사를 드린다는 것은 성혼(聖婚)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단순한 성혼도 아니었다. 수백 년 만에 이뤄지는 성스러운 혼약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선포하는 자리였다. 기쁘고 감격스러운 자리가 될 터였다.

하지만 작은 어르신의 등장은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렇게 분노한 채로 이 자리에 나타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아니, 작은 어르신의 분노를 강민철 회장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평소 작은 어르신의 성정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어르신의 생각이었다.

어르신은 알고 계셨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아니,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어르신께서는 분명히 알고 계셨을 것이다.

강민철 회장도 짐작할 수 있었는데 어르신께서 모르셨을 리가 없다. 아니, 어르신께서 모르신다는 것은 성립 불가능한 명제였다.

나무를 심던 사람들에게는 황금처럼 지켜지는 격언이 있다. ‘바둑판을 만들기 위해 벚나무를 심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처음 묘목을 심을 때부터, 이 나무를 키워 어떠한 용도로 사용할지를 염두에 둬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후대까지 길이 남을 바둑판을 만들겠다고 생각했다면 나뭇결이 곱고, 복원력이 높으며 가공이 쉬운 비자나무 묘목을 심어야 한다. 꽃이 아름답다고 하여 뒤틀림이 심한 벚나무를 심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작은 어르신도 마찬가지였다. 어르신의 뒤를 잇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교육이 필요했다.

하지만, 어르신은 작은 어르신을 그리 키우지 않으셨다.

마음껏 뛰어놀게 하셨고, 말썽을 부리면 여느 할아버지처럼 혼을 내셨고, 반성했다고 생각되면 풀 죽어 있는 손자를 안아 주셨다.

어른들에게는 예의 있게 행동하도록 가르치셨고, 또래의 아이들에게는 리더가 아닌 친구가 되도록 가르치셨다.

올바르고 건강한 마음을 가진 어린이로, 청소년으로, 청년으로 키워 내셨다.

건전한 정신을 가진 사회인을 키워 내기에는 알맞은 교육법이었는지도 모른다. 한수라는 이름을 가진 스물한 살 청년, 예의 바르고 마음이 깊으며, 나이에 맞지 않게, 주변을 살펴볼 수 있는 넓은 시야를 가진 훌륭한 청년의 모습이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으니까.

바르게 키웠고, 훌륭하게 자랐다고 할 수 있었다. 그가 작은 어르신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가 이어야 할 자리는 사람의 마음이 필요한 자리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되는 자리였다. 사람의 좁은 식견으로 감당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무엇을 안배하신 겁니까?

이리될 것을 알고 계셨으면서, 어르신은 어찌하여 그런 선택을 하신 것일까?

강민철 회장은 그런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기에, 사주 중 한 명인 이현웅이 거실 구석에서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모습을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

할아버지는 말이 없다. 그저 찻잔을 들어 차를 음미하고 있을 뿐이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나는 다시 할아버지에게 강한 어조로 쏘아붙였다.

할아버지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반 장난으로, 어리광을 부리고자 할 때, 약간의 반항기가 담긴 농담을 한 적은 있었지만, 오늘처럼 진심을 담아, 내가 느끼는 감정을 모두 담아, 정색하며 이야기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나는 할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했다. 당신의 손자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고, 당신의 가르침이 틀렸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지금 눈앞에서 찻잔을 들어 올리는 저 노인이 내 할아버지가 맞는지, 나를 가르치고, 혼내고, 안아 주던 그 할아버지가 맞는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다른 사람, 아니, 마치 다른 영혼처럼 느껴진다.

“말씀해 보세요. 저에게 원한 것이 그것입니까? 제가 할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꼭두각시처럼 정해 놓은 길을 따라가는,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라신 겁니까? 그게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가업을 잇는 것입니까?”

다시 할아버지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한다.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그래서, 너는 어찌하고 싶으냐?”

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그렇게 물어보신다.

“너에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너는 어찌하고 싶으냐?”

꿈에서 들었던 목소리로 그렇게 물어보신다.

“선택할 수 있습니까?”

내가 되묻는다.

“저에게 선택할 기회가 있습니까?”

할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렇게 되물어본다.

“어찌하고 싶으냐.”

할아버지가 다시 묻는다.

내 대답은 자명하다.

“따르지 않을 겁니다.”

내가 대답한다.

할아버지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저 감정 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다.

“없다면 어찌하겠느냐.”

할아버지가 다시 말한다.

“너에게 선택할 기회가 없다면 어찌하겠느냐? 따르겠느냐?”

“그래도 따르지 않을 겁니다.”

내가 대답한다.

“할아버지가 어떤 길을 정해 놓으셨든, 제 의지가 아니라면 저는 따르지 않을 겁니다.”

그런 내 말에 반응한 사람은 할아버지가 아니었다.

“제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처음 인사를 끝으로, 아무 말 없이 앉아만 있던 고마음이 처음으로 말을 꺼낸다.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할아버지에게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시선이, 마치 손녀라도 보는 것처럼 부드러운 눈빛이 고마음에게로 향한다.

허락의 표식이다.

허락받은 고마음은 할아버지에게 작게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한 다음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

“기억하고 계신지요.”

그렇게 물어본다.

기억하냐고? 무엇을?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서 피어올랐지만,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머릿속 생각과 달랐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기억하고 있다. 그녀가, 아니, 그녀와 같은 영혼을 가진 소녀가 해 주었던 말.

-소녀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번 생이 끝나면 그다음 생에, 그다음 생이 끝나면 또 그다음 생에. 언젠가 다시 뵈올 그때까지, 소녀는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오랜 시간, 최소 수백 년 전, 그녀가 마지막으로 해 주었던 말을 나는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잠깐만…, 수백 년 전?

꿈이었는데, 분명히 꿈에서 들었던 말이었는데, 어째서 나는 그 말을 기억으로, 꿈이 아닌 현실의 기억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수백 년 전의 기억?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대, 나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시간대의 기억을 어째서 나는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그런 의문들이 내 머릿속에서 마구 피어오르려던 순간에, 다시 그녀의 말이 들려온다.

“기억해 주신다면 저는 괜찮습니다. 지금 당장 저를 받아주시지 못하신다 하여도, 기억해 주신다면, 제가 작은 어르신의 반려임을 기억해 주신다면. 저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기다리고 있겠다.

그녀의 마지막 말이 내 의식을 강하게 파고든다.

“그게…. 무슨 말….”

나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내가 말을 이어 가려던 찰나,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내 말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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