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 : 시우(始偶) (4)
***
나는 도로를 따라 하염없이 걷고 있다.
레스토랑에서 나온 지 얼마나 되었을까?
30분? 한 시간?
모르겠다. 그저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태워다 주시겠다는 제안을 거절한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시던 서현 씨 어머님의 눈빛과 몇 개일지 모를 버스 정류장을 스쳐 지나왔다는 사실 뿐.
얼마나 걸었는지, 여기가 어딘지,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발길이 향하는 방향으로 하염없이 걸어가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아무 생각도 없이, 좀비처럼 그냥 걷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머릿속에서는 생각들로 가득 들어차 있다.
처음으로 가업을 이으라는 말을 하던 할아버지의 표정, 강 회장님의 인사, 서현 씨와의 첫 만남, 축제, 진철이 형과 가족들의 행복해하는 표정, 기훈이 할머니의 눈물, 승환이와 뚝방을 걸으며 나누었던 대화, 창회 어머님과의 만남, 괌에서의 추억들.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추억들,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소중한 기억들이 머릿속 안에서 끊임없이 뒤섞이고 있다.
가업을 이으라고 말하는 할아버지의 옆에 지연이가 앉아 있고, 처음 인사드리는 강 회장님의 뒤에 창회가 서 있다, 같은 집에서 지내게 될 거라고 말하는 서현 씨는 슬픈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아니라고, 저것은 잘못된 기억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의심이 피어오른다.
진짜일까? 행복하고 즐거웠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이 진짜 나의 기억일까? 왜곡된 기억은 아니었을까? 누군가가 나에게 주입한 망상이 아니었을까?
확신이 들지 않는다. 진짜 내 기억이라고, 내 경험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왜 확신하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본다.
그제야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저 사람들 각자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저들이 저들의 의지로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집으로, 학원으로, 일터로, 가족에게로, 친구에게로, 연인에게로 걸어가고 있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다.
일말의 주저함도 느껴지지 않는 발걸음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기가 어디인지, 어디로 가는지, 하물며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도 모른 채로, 그냥 걷는 행동만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한발을 뻗고, 무게 중심을 옮겨 앞으로 나아가고, 넘어지기 전에 다음 발을 뻗는 ‘동작’만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계속 그렇게 살아온 것이 아니었을까? 내 의지로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정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던 것이 아닐까?
여기가 어디인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누군가가 정해 놓은 길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간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서 점점 그 크기를 더해 가고 있다. 생각들, 기억들, 추억들을 잡아먹으며 커다란 괴물로 몸집을 불리고 있다.
그렇게 성장한 괴물은 독을 뿜어낸다.
의심이라는 이름의 독.
진짜일까? 바쁜 걸음으로 걷고 있는 저 사람은 진짜일까? 실재하는 것일까? 저 사람 또한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저 건물도, 저 버스도, 저 하늘도, 모두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마치 나처럼.
누군가 말해 줬으면 좋겠다. 확신을 줬으면 좋겠다. 아니라고,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고, 저 사람도, 건물도, 버스도, 하늘도, 그리고 나도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저 사람도, 건물도, 버스도, 하늘도, 그리고 당신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의지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입니다. 그 누구도 당신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고, 당신의 의지를 꺾을 수 없을 겁니다.
그런 말을 듣게 된다고 해서 믿을 수 있을까? 안심할 수 있을까?
의심이라는 독이 신경계를 타고 내 온몸을 흐르고 있다.
멈추고 싶다. 이 상황을 멈추고 싶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이 고통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그렇게 물어본다.
그리고 답을 하나 찾아낸다.
나는 전화기를 꺼낸다.
물어보자.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나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
노인은 자신에 앞에 앉아 있는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젊고 아름다웠다. 마치, 3월 봄기운을 가득 담아 개화한 목련처럼, 순백의 청초한 아름다움을 마음껏 드러내고 있었다.
당연했다. 여자는 일생에서 가장 아름다울 나이를 지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노인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피고 지었던가.
“오랜만이구나. 별일 없었느냐.”
두 사람이 마주하고 처음으로 노인이 입을 열었다.
“어르신 덕분에 무탈히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여자의 입이 열리고, 얼굴만큼 아름다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어르신이라고 불린 노인은 대답 대신 여자를 바라본다.
노인의 시선은 그녀의 외면을 뚫고, 내면에 감춰져 있는 영혼을 직시한다.
표면이 매끈한, 마치,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 표면이 다 마모되어 버린 반들반들한 조각돌 같은 영혼을 바라본다.
“…이야기는 들었느냐.”
노인은 여자의 영혼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한다.
“전해 들었습니다.”
여자가 말한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감정도 실려 있지 않다.
떨림, 기쁨, 무서움, 두려움, 주저함처럼, 감정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무언가는 하나도 담겨 있지 않다.
그저 파동, 공기를 매질로 전달되는 순수한 파동만이 전달될 뿐이다.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순수한 파동이다.
“괜찮겠느냐.”
어르신이라 불린 노인이 말한다.
처음으로 여자가 고개를 들어 올린다. 여자의 시선이 노인을 향한다.
그 시선에 처음으로 감정이 담긴다. 의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감정.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하지만 이내 그 감정은 사라진다.
“괜찮습니다.”
감정이 사라지고 여자의 대답이 뒤따른다.
조금 전처럼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은 파동의 전달이다.
노인은 다시 조약돌을 떠올린다.
표면이 반질반질한 조약돌처럼, 여자의 말에도, 눈빛에도, 영혼에도 어떠한 굴곡이 느껴지지 않는다.
“…원망스럽지 않느냐?”
노인이 묻는다.
여자의 눈동자에 다시 감정이 떠오른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감정, 혹여나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했는지를 되묻는 눈빛.
하지만 이 감정 또한 오래가지 않는다.
실온에서 바로 승화되어 버리는 드라이아이스처럼 그녀의 감정도 자취를 감춰 버린다.
“…그저 뜻을 따를 뿐입니다.”
이내 감정 없는 눈으로 그렇게 말한다.
어르신이라고 불린 노인은 말없이 여자를 바라본다.
더 이상 그녀의 눈동자에서도, 조약돌 같은 영혼에서도 어떠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어찌 몰랐던가.
노인은 마음속에서 그런 문장이 떠오른다.
몰랐던 것이 아니지. 무시하고 있었을 뿐.
뒤이어 그런 문장도 떠오른다.
하지만 문장은 감정으로 표출되지 않는다. 여자는 노인의 마음을 읽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먼저 시선을 움직인 것은 노인이었다. 시선을 피한 것은 아니었다.
노인의 시선은 문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들어오게.”
마치 누군가 노크할 것을 알기라도 했다는 듯, 노인은 그렇게 말한다.
문이 열리고, 한 장년 남자가 모습을 보인다.
어르신을 보필하는 네 개의 기둥 중 궤주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는 중앙 그룹 총수 강민철이 마주 보고 앉아 있는 두 사람을 향해 깊게 고개를 숙인다.
“말씀 나누시는 중에 죄송합니다.”
노인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장년 남자를 향해 손을 뻗는다.
장년 남자는 노인에게 핸드폰을 건네준다.
“작은 어르신이십니다.”
강민철이 말한다.
노인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노인에게는 말해 줄 필요가 없었다.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전화가 올 것이라는 것도, 누구에게 온 것인지도.
강민철의 말은 노인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자를 향해 있었다.
그의 손녀딸과 비슷한 나이의 젊은 여자에게 강민철은 예를 표했다.
예를 표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전화기를 받아 든 노인은 통화 버튼을 누르고 얼굴로 가져간다.
하지만 말을 하지는 않는다.
말이 들려오지 않는 것은 전화기 너머에서도 마찬가지다.
전화가 연결되었지만, 침묵만이 오가고 있다.
그렇게 비정상적인 대치가 얼마나 이어졌을까.
-전화 올 거라고 알고 계셨습니까?
전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강민철은 그 목소리가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낯설게 느껴졌다.
“그렇다.”
노인이 대답한다.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알고 계시고요.
“알고 있다.”
노인이 대답한 ‘알고 있다’는 네 음절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전화를 건 상대방이 누구인지. 어디인지, 무엇을 했는지, 왜 전화를 했는지 전부 다 알고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다시 전화기 너머에서 침묵이 흐른다.
노인은 그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묻고 싶은 질문이 많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답을 듣고 싶다면 이리 오너라.”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옆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강민철에게 전화기를 넘긴다.
강민철은 두 손으로 공손히 전화기를 받아 들고 얼굴로 가져간다.
보이지 않는 전화기 너머 상대방에게 자신이 노복(老僕)임을 밝히고, 상대방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노인의 시선은 다시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여자를 향한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음에도, 여자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같은 시선으로, 감정 없는 눈동자로 노인을 바라보고 있다.
“다시 한번 물어보자꾸나.”
노인이 말한다.
“괜찮겠느냐?”
그렇게, 조금 전에 했던 질문과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괜찮습니다.”
이제는 찰나의 감정도 떠오르지 않는 눈동자로, 눈앞에 있는 노인을, 아직까지는 어르신이지만, 조만간 시조부님이 될 노인을 바라보며 여자가 말한다.
***
답을 듣고 싶다면 찾아오라는 할아버지의 말에, 성북동을 떠올렸었다. 하지만 강 회장님께서 알려 주신 주소는 서초동의 한 주상 복합 건물이었다.
왜 서초동일까? 그런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일단 그 부분은 넘어가기로 마음을 먹고 바로 택시를 잡아탔다.
알게 되겠지. 가 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실 성북동이든, 서초동이든 장소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지금 중요한 것은 거기에 내가 들어야 할 답이 있다는 사실 뿐.
한강을 건너 회장님이 알려 준 주소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 날 맞이한 사람은 회장님이 아니었다.
박기준 변호사, 할아버지를 모시는 네 개의 기둥 중 문주(聞柱)를 맡고 있는 승환이 아버님. 그가 날 맞이해 주었다.
승환이 아버님을 보면서, 나는 이곳에서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할아버지를 보필하는 네 개의 기둥 중 둘이나 와 있을 이유가 없을 테니까.
그리고 내 예상대로 회장님과 승환이 아버지, 두 사람만도 아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처음 보는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 거실에 두 사람이 더 있었다.
인주(印柱)를 담당한다던 이현웅, 그리고 서주(書柱)를 담당하신다던 유 선생님이 나에게 허리 굽혀 인사하고 있었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나도 인사를 드렸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에게는 은사님 되시는 유 선생님과는 짧게라도 안부 인사를 나누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그저 고개 숙여 인사드리고 바로 할아버지를 찾았다.
강 회장님은 복도 깊숙한 곳에 위치한 방문으로 나를 안내했고, 그곳에 할아버지가 계신다고 말씀해 주셨다.
노크를 하고 싶은 기분도, 허락을 받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던 나는 그대로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방 안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찻잔을 손에 들고 있는 할아버지와. 그리고 그런 할아버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영화배우 고마음.
그 두 사람을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