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 : 성불사(成佛寺) (1)
승환이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나는 가방을 싸고 있었다.
사실 가방이라고 거창하게 이야기할 정도는 아니었다. 속옷 몇 벌과 가볍게 입을 티셔츠 몇 개, 그리고 노트북과 태블릿, 충전기를 챙기는 정도였다.
그리고 많은 짐을 쌀 필요도 없었다. 다음 주에 개강이니까, 늦어도 일요일에는 다시 올라와야 했다.
뭐, 앞으로도 이 집에서 계속 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현실적으로 당분간은 이 집에서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집에서 나가자. 그렇게 마음을 먹었지만, 아무런 대책 없이 가출하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고향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잠은 자야 했으니까.
그리고 잠자는 것도 그렇지만, 할아버지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물어볼 말이, 해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아무튼, 그런 생각으로 대충대충 가방을 싸고 있는데, 승환이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다.
‘어. 왜?’
-그사이에 무슨 일 있었냐?
‘없었는데.’
-근데 왜 전화를 그따구로 받아?
‘뭐가?’
-빚 독촉하는 사채업자….
‘지금 개드립 받아 줄 기분이 아니다. 왜?’
-아니. 그냥. 뭐 그 사이에 무슨 일 있었나 싶어서.
있었지. 당분간 본가에 가있겠다는 서현 씨의 말이 있었고, 그리고 집에 오니 여기서는 못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고, 당분간 고향 집에 내려가 있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근데 그걸 또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서현 씨는? 집에 계시디?
‘아니. 출근했더라.’
-오늘 돌아오신대?
승환이는 마치 알고 있기라도 하다는 듯 그렇게 물어본다.
‘…아니. 본가에 며칠 가 있겠다고 하더라.’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뭐 쓸데없이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흐음. 그렇군. 그래서 너는 지금 짐 싸고 있냐?
저 자식 내가 자는 동안 내 몸에 도청기라도 몰래 심어 놓은 건가?
‘…….’
-맞네.
‘뭐가?’
-짐 싸고 있는 거.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나라면 그랬을 테니까.
‘…….’
-공간 자체가 심리적으로 불편해진 상황에서, 서현 씨마저 안 돌아온다 했으면, 아싸. 신난다. 이제 눈치 보지 말고 편하게 있어야지!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을 거 아냐. 그렇잖아?
‘뭐….’
-그래서 어디로? 우리 집?
‘거길 내가 왜 가냐?’
-뭐 못 올 이유도 없지. 아무튼, 그러면 고향이겠네.
‘…이건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무슨 이득이 있다고 너한테 도청기를 달아 놨겠냐? 다 논리적 추론에서 나오는 거다. 논리적 추론.
‘…에휴.’
나도 모르게 그렇게 한숨이 나온다.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이 녀석이랑 이야기하다 보면 기가 빨리는 느낌이 난다.
-태워다 줄까?
승환이가 그렇게 물어본다.
‘뭐?’
-아니. 고향 집 갈 거면, 내가 태워다 줄까 하고. 괜히 버스에서 갑자기 질질 짜고 그러면 다른 승객들에게 민폐니까.
‘야이. 미친놈아. 누가 질질 짠다고 그러는 거냐. 그리고 너 오늘 심심하냐? 할 거 없어? 할 거 없으면 중훈이랑 같이 도서관 가서 공부라도 하든가.’
-그 자식 도서관 안 갈걸? 데이트 할걸? 그리고 너 내가 언제 공부하는 거 봤냐? 나 도서관 가서 공부 안 해.
‘…….’
-태워다 줄게. 간만에 신선한 바람도 쐬고, 가는 길에 휴게소 들러서 소떡소떡도 사 먹고. 어때? 괜찮지? 내가 알감자도 사줄게.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결국 피식하고 웃어 버렸다.
승환이가 왜 저러는지도 알 것 같았고, 실제로도 승환이와의 짧은 대화에서 조금 마음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됐다. 쉬어라.’
-에이. 그러지 말고. 진짜 오늘 형님이 대출혈 서비스 해 주는 거야. 이런 기회 또 있을 것 같아? 바로 집에 가서 할아버지에게 바득바득 대들지 말고, 여기저기 유람도 다니면서, 마음도 진정시키고, 생각도 정리하고, 그렇게 천천히 내려가자고.
‘유람 같은 소리 하고있….’
나는 그렇게 말하려다 잠시 멈추었다.
잠깐만. 승환이하고 단둘?
그러면 저번에 생각했던 그걸 오늘 해 버릴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었다. 남겨 놓은 숙제 같은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오늘이 그 숙제를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에이. 또 그런다. 진짜 형이 마지막으로 물어….
‘너 오늘 진짜 일정 없는 거지?’
-어? 어. 없다니까.
‘그래. 그러면 차 가지고 와라. 좀 태워 줘라.’
-진짜?
‘그래. 부탁 좀 하자. 나 잠깐 들를 데가 생각났어.’
전화기 너머에서는 답이 없다.
거부하던 내가 갑자기 이렇게 승낙을 해 버리니 당황했나 보다.
‘왜? 가자니까 귀찮아졌어?’
-에이. 아니지. 이 형님의 하해와 같은 마음씨를 뭘로 보고. 그럼 언제 갈까?
‘바로 와라.’
-오케이. 주소 보내라.
그렇게 통화가 끝이 났다.
나는 연결이 끊긴 전화기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래.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
승환이가 도착한 시간은 전화가 끊기고 30분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바로 차 타고 가기는 좀 그런 것 같아서, 차나 한잔 마시고 가라고 녀석에게 올라오라고 했다.
“어이가 없네….”
우리 집,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강 회장님이 마련해 주신 거처에 처음 와 보는 박승환이 진짜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렇게 말한다.
“뭐가?”
“여기서 살고 있었던 거야?”
“어.”
“그때부터?”
“그때?”
“니네 하숙집에 사채업자 들이닥친 그때.”
“사채업자 아니라고. 이 자식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때부터?”
“뭐. 그렇지.”
승환이 녀석은 무슨 사기꾼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왜 그딴 눈으로 보는데?”
“역지사지.”
박승환이 그렇게 말한다.
“…그게 무슨 말이야?”
“만약 반대로 니가 내 입장이었다면, 내가 이렇게 좋은 집에서 미소녀, 아니, 미인과 단둘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몇 달 만에 알게 되었다면? 너는 어떻게 반응할 건데? 그냥, 아. 좋은 집이네. 이러고 끝?”
“…시끄럽다. 얼른 차나 마시고 가자.”
“난 커피 말고 생과일주스로. 과일 많이 넣어서. 시럽은 빼고. 저기가 니 방이냐?”
박승환은 그렇게 말하고 허락도 없이 내 방 문을 열어 본다.
나는 그런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 쉬고는 주방으로 몸을 돌렸다.
얼른 맥이고 나가야지.
***
“…진짜 생과일이 있네?”
박승환이 앞에 놓인 주스 잔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한다.
“생과일주스라며? 시럽 이빠이 넣어서.”
내가 말했다.
“그냥 한 말이지. 집에 생과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나는 말없이 주스 잔을 녀석 앞으로 조금 더 밀어 주었다.
서현 씨는 항상 냉장고에 신선한 생과일을 준비해 놓는다는 설명을 주절주절 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으니까.
박승환은 시럽이 가득 들어간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는 얼굴을 찡그린다. 당분 과다로 설사나 좌악좌악 해라. 이 자식아.
“짐은?”
박승환이 물어본다.
“침대 위에 가방 못 봤냐?”
“그게 끝?”
“끝.”
“가출 맞아?”
“어차피 다음 주 개강이라 올라와야 하는데, 포장 이사라도 불러야 했던 거냐?”
“학교 가려고?”
“그럼, 안 가냐?”
“…유 선생님 수업 신청 했냐?”
“넌 안 했냐?”
“안 했는데?”
“그거 전필이라, 안 들으면 졸업 못 한다.”
“뭐 졸업 전까지만 들으면 되겠지.”
박승환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홀짝인다.
“남기지 말고 다 먹어. 비싼 과일 엄청 들어갔으니까.”
내가 승환이에게 말한다.
“시럽을 얼마나 때려 넣은 거야.”
박승환은 그렇게 투덜거리며 다시 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그건 그렇고, 어디 갈 건데?”
“고향 간다고. 할아버지 만나러 간다고.”
“아니, 거기 말고, 들를 데 있다며?”
“아….”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말을 주저했다.
어떻게 말하는 게 좋을까? 어떻게 이야기해야 이 자식이 오해하지 않고 받아들일까?
일단은 그냥 행동하고 생각하자.
“니 차. 보험 어떻게 되어 있냐?”
내가 승환이에게 물었다.
“보험? 일단 누구나로 되어 있기는 한데….”
승환이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렇게 말한다.
“그럼 나도 운전 가능한 거네?”
“…그렇긴 한데.”
승환이 눈동자의 의심이 더욱 짙어진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거냐? 그렇게 묻고 있다.
“운전 내가 해도 되지?”
“아니.”
승환이가 즉답한다.
“왜?”
“목숨은 소중하니까.”
“사고 날 일은 없다.”
“그걸 어떻게 믿어? 어떻게 그렇게 장담하는데?”
“그 망할 놈의 작은 어르신 아니냐? 내가 너하고 동반 자살을 하고 싶었으면 더 쉽고 빠른 방법이 있는데, 번거롭게 자동차 사고로 위장했겠냐?”
“…쉽고 빠른 방법?”
“그냥 좀 운전하고 싶어서 그래. 기분도 꿀꿀하고. 사고 안나. 나도 문제 안 생겨. 불안하면 당일 보험 들든가.”
“아니. 뭐 사고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고….”
박승환은 그렇게 말하고는 날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다가.
“뭐. 상관없겠지. 맘대로 해라.”
승환이가 그렇게 말한다.
일단 판은 만들어졌네.
***
내가 승환이에게 물어봤었다. 승환이 차 삼각별이냐고.
승환이는 아니라고 했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삼각별에 집착한다고 뭐라 했었지.
그랬는데, 이건 뭐냐?
왜 지하 주차장에 흰색과 파란색 프로펠러 엠블럼이 붙어 있는 대형 SUV가 서 있는거냐?
“…삼각별은 아니지.”
지도 민망한지, 박승환이 그렇게 먼저 말한다.
“이거 모델명이 뭔데?”
“X7…이었던가?”
이었던가는 뭐야?
나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승환이 녀석을 바라보았다.
이 자식, 뭐 스물한 살이 차 끌고 다니면 재수 없다느니, 자고로 첫 차는 최저 임금 미만의 알바비를 모아 중고차 딜러의 현란한 말솜씨에 홀랑 넘어가 구입한 침수 차가 제격이라고 그딴 소리를 해 놓고, 독일산 대형 SUV를 몰고 다닌다고?
“일종의 복수랄까?”
박승환이 그렇게 말한다.
“그게 무슨 헛소린데?”
“아니. 그냥. 작년에 그 사람이 성인 되었으니까 차 뽑아 준다고 해서, 그래서 기왕이면 크고 비싼 거를 고른 거지.”
“…그런 의도였으면 차라리 페라리를 뽑아 달라고 하지 그랬냐?”
“그 생각도 안 해 본 건 아닌데, 뭐, 그 사람 돈을 낭비하겠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가장 적합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실용성이 너무 떨어지니까.”
“실용성?”
“그거 타고 밖에 나갈 수나 있겠냐?”
“….”
“소리는 더럽게 시끄럽지, 사람들은 다 쳐다보지. 그냥 쳐다보기만 하나? 저 차는 길에 오백 원짜리를 뿌리고 다니는 거다. 그딴 소리나 들을 텐데.”
“…그건 그렇지. 그런데 어차피 안 탈 거면 상관없는 거 아냐? 복수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안 타겠다는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사람 일은 모르잖아. 그리고 페라리 뽑아 달라고 하면 진짜 뽑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고.”
“뽑아 주면 뭐가 문젠데?”
“꼴이 우습잖아. 말도 안 되는 투정 부렸는데, 그 정도는 우습게 들어줘 버리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합리적으로 이 녀석을 고르셨다?”
“…합리적까지는 아니고. 아무튼. 이거나 받아.”
승환이는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자동차 키를 건네준다.
“근데 얼마냐? 이거.”
“모르겠는데. 한 1억 5천 하지 않을까?”
박승환이 그렇게 말한다.
“적당하네.”
내가 말했다.
“적당해? 뭐가 적당한데.”
나는 운전석으로 걸어가면서.
“껴묻거리.”
그렇게 말했다.
내 말을 들은 박승환은 보기 드물게 당황한 얼굴로.
“껴묻거리? 부장품? 야. 잠깐만.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순장? 지금 차랑 나랑 같이 순장하겠다는 이야기냐?”
그렇게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