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 : 따까리 (2)
솔직히, 진지한 표정의 승환이 얼굴을 보면서 반쯤은 경계를 하고 있었다. 이 녀석은 언제 어떤 참신한 개드립을 칠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이 기우라는 듯, 승환이는 계속 말을 이어 간다.
“너는 ‘고작 이런 일’이라고 말했지만…. 뭐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싶지만, 내가 아는 너라면 단순히 사귀느냐, 안 사귀느냐, 누구랑 사귈 것인지를 고민할 녀석은 아니지.”
“그 작은 어르신이라는 것과 상관없이 서현 씨를 만나고 알게 되었다면, 그랬다면 이렇게 문제가 지저분해지지는 않았겠지. 지연이도 마찬가지인 거 아냐.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지연이가 더 걱정되기는 한데…. 그렇다고 니가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이야기했는지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고. 뭐, 아무튼 상황이 좀 쉣스럽기는 하다.”
“…….”
“내가 당사자는 아니지만…. 좀 억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
“…뭐가?”
“너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 선택한 게 없는데, 니 의지와 상관없이 일이 이렇게 흘러가 버리니까.”
나는 아무 말 못 하고 그저 승환이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진짜 내 마음에 들어왔다 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정확히 내 마음을 읽어 낼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
“뭐, 일단 그랬구나. 그래서 오늘 분위기가 그랬구만.”
승환이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몸을 돌려 다시 천천히 걸어간다.
나는 뭐라 말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따라가지도 못한 채, 그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다.
몇 발자국 걸어가던 박승환이 몸을 돌린다.
그리고는.
“담배나 피자.”
그렇게 말해 준다.
***
양재천 변 산책로에서 빠져나온 우리는 가까운 편의점으로 가서 담배 한 갑과 라이터 하나, 그리고 음료수 두 개를 사 들고 나왔다.
“여기만 오면 담배를 피우게 되네.”
으슥한 도로가에 쭈그려 앉은 박승환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인다.
담배 안 피우는 녀석치고는 꽤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때가 마지막이야?”
내가 물었다.
“그때?”
“우리 저번에 여기서 담배 피웠을 때.”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난번과 똑같은 코스였다.
양재천 뚝방길, 같은 편의점, 같은 도로가. 그리고 담배.
“그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은데?”
“받냐? 몸에서?”
“아니.”
“근데 왜?”
“몸에서는 안 받는데, 마음에서 땡기네?”
박승환은 그렇게 말하고 씨익 웃는다.
나는 그런 녀석의 얼굴을 보면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배를 피우고 싶었던 게 아니다. 같이 담배를 피워 주고 싶었던 거다.
그런 내 생각을 증명하듯, 두서너 모금 빨고는, 얼굴을 찌푸리고 담배를 끄고, 꽁초를 주머니에 넣는다.
“그때가 언제지? 우리가 성북동에서 만났을 때가?”
승환이가 물어본다.
“기훈이 이사 끝나고 얼마 안 지나서.”
“창회 생일 전이지?”
“그렇지.”
“맞네. 내가 너의 정체에 대해서 알고 나서 창회 생일을 했으니까.”
승환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시선으로 정면을 바라보다가.
“그래서 어쩔 건데?”
그렇게 물어본다.
“…뭘?”
“우선 연애?”
“…….”
“뭐 연애 문제라고 해야 하나? 뭐 아무튼 내가 이래라저래라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어영부영 끝내는 건 좀 그렇지 않냐?”
“…….”
“니가 어련히 잘 알아서 하겠지만, 그래도…. 뭐랄까? 서현 씨나 지연이, 아니 뭐 나는 서현 씨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고…, 지연이는 솔직히 좀 그렇지 않나 싶어서.”
“…뭐가 그런데?”
“아깝잖아. 지연이 같은 사람 또 만나기 쉽지 않을걸?”
“…….”
“그 녀석 진짜 괜찮은 것 같아. 예뻐서 그렇다는 게 아니고. 아 물론 생긴 것도 예쁘지. 근데 너는 그런 거에 가중치를 많이 두는 녀석은 아니니까. 아닌가? 뭐 아무튼, 그냥 이렇게 놓치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나 싶어서. 뭐 꼭 결혼하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리고 서현 씨는 내가 잘 모르지만, 그래도 중앙 그룹 손녀 이런 걸 떠나서 그 사람도 괜찮은 사람 같던데.”
“…….”
“그냥 뭐 작은 어르신이고 나발이고, 그런 거 상관없이 그냥 되는 대로 밀어붙여 버리는 시나리오도 생각해 두면 어떤가 싶어서. 생각은 한번 해 봐. 내가 남 이야기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건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승환이라면 그렇게 남 이야기라고 생각할 녀석은 아니었으니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거네. 그놈의 작은 어르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의 굴레라 이건데…. 이런 방법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어떤 방법?”
“안 해 버리는 거지.”
“안… 해 버린다고…?”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그거잖아. 니네 집안의 그 가업이라는 걸 이어받게 되면 이런 문제, 너의 의지나 선택과는 상관없이 계속 그 가문의 굴레에 끌려갈 수밖에 없다는 거. 뭐, 물론 장점도 있겠지. 먹고 살 걱정은 안 해도 될 테고, 아니, 먹고 사는 걱정 수준이 아니지. 중앙그룹이 곳간인데, 그리고 돈이 문젠가? 막 시간도 멈추고, 여탕도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여탕에 들어간 적은 없다고.”
“과거에 그만 집착하고, 미래에는 모든 가능성은 열어 두자고. 아무튼, 가업을 잇는 상황에서의 메리트를 생각한다면 디메리트는…. 너무 약한데? 그냥 가업 이어받아라. 할아버지 말 잘 듣고. 정략결혼도 하고. 나중에 계승 의식 전부 끝나면 그때 막살면 되잖아. 여탕은 못 참지.”
승환이의 그 말에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 녀석을 바라보았다. 화가 나지는 않았다. 농담, 아니, 개드립이라는 걸 나도 알고 있었으니까.
“알았다. 알았어. 그런 눈으로 좀 보지 마. 이 정도 농담은 할 수 있잖아.”
박승환은 씩 웃고는 말을 계속한다.
“근데 만약 니가 그 가업이라는 걸 거부한다면,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냐?”
“…몰라. 안 물어봤어.”
“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거든. 처음 들었을 때는 너무 놀라서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지도 않았고, 좀 적응하고 나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거지. 그냥 당시의 상황에 취해서, 계속 일이 잘 풀리니까 그 상황에 안주하고 있어서….”
그렇게 말해 놓고 나니, 내 자신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었다. 그냥 그 생활에, 서현 씨, 친구들과 같이 보내는 하루하루가 즐거워, 생각도, 고민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어.”
박승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중얼거린다.
“서현 씨나 지연이가 어디 도망가는 거 아니니까, 그 문제는 조금 미뤄 두고, 일단 팩트 체크부터 해 봐야겠네.”
“팩트 체크?”
“그 가업이라는 걸 거부할 수는 있는 건지, 거부하면 어떤 페널티가 있는지, 돈이나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 이외에 추가적인 디버프가 걸리는지부터 확인해 봐야 하지 않을까? 어린애도 아니고, ‘싫어! 내 마음대로 살 거야!’ 그렇게 무지성으로 움직이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불확실하잖아.”
“…….”
“그리고 너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만약 니가 선택할 수 있다면 그 가업을 이을 건지, 그 어르신인지 뭔지를 잘해 낼 자신이 있는지. 아니, 그 전에 이거 하나만 물어보자. 너 저번에 여기에서 했던 말 기억하냐?”
“…어떤 말?”
“생각하는 대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거라고 했던 말.”
승환이가 그렇게 말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네가 아는 그 한수야. 너도 내가 아는 그 박승환이고. 어른들이 무슨 말을 하든, 어떤 결정을 내리든 나는 전혀 상관 안 해. 안 하려고. 그냥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내가 살아왔던 대로 그렇게 살려고. 나는 정말로 그럴 생각이야.
저번에 그런 말을 했었다. 나는 승환이가 알고 있는 나고, 승환이도 내가 알고 있는 승환이라고.
“가장 중요한 건 너의 생각이야. 너의 말대로 생각하는 대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겠다고 생각했다면, 그랬다면, 너의 마음부터 확실히 파악해. 앞으로 어떻게 살 건지, 가업을 잇고, 안 잇고는 니가 살아가는 도중에 해야 하는 하나의 선택일 뿐일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너 스스로에게 확실히 물어봐. 어떻게 하고 싶은지. 확실히 물어보고, 너의 마음이 어떤지 확실히 알게 되면, 그때부터 알아보자고. 가업을 이었을 때, 너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만약 거부한다면 어떠한 페널티를 안게 되는지.”
나는 말없이 승환이를 바라보았다.
“순서가 그게 맞는 것 같아. 먼저 너의 마음부터 확실히 하고, 그다음에 메리트와 디메리트를 파악하는 거지. 그게 뽀대도 나고.”
“…뽀대?”
“가업을 이었을 때, 거부했을 때의 장단점부터 먼저 알면 나중에 마음 정할 때 영향을 받지 않겠냐? 그러면 뽀대가 안 나잖아.”
승환이 녀석은 그렇게 말한다.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게 뽀대 찾을 문제인가 싶었다.
동시에, 또 마음에 드는 말이라서, 그래서 웃음이 나온다.
“그렇네. 뽀대 안 나네.”
“뽀대 안 나지. 남자는 뽀대와 간지가 생명인데.”
“그게 생명이지.”
나는 그렇게 말하고 승환이에게 웃어 주었다.
항상 생각하고 있었지만, 박승환 이 녀석은 본질을 파악하고 정곡을 찌르는 데 거침이 없다. 평소에 개드립을 하도 많이 쳐서 그렇지, 똑똑한 걸로 치면 이 녀석을 따를 사람이 없을 거다.
“에휴. 괜히 대들었다가 할아버지에 쫒겨나면 답 없는데….”
나는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그렇게 푸념을 한다.
“먹고사는 건 걱정 안 해도 된다.”
승환이가 그렇게 근거 없는 말을 한다.
“왜 걱정 안 해도 되는데? 니가 나 먹여 살려 주기라도 할 거냐?”
내가 박승환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한다.
“저번에 내 이야기 기억 안 나냐?”
“무슨 이야기?”
“부사관.”
중학교 때, 승환이는 아버지와 담판을 지으러 갔었다. 만약 자기 친구에게 호구지책을 마련해 주지 않을 경우 가출하겠다고.
-일단 가출한 다음, 숙식 해결되는 알바 자리 구해서, 열심히 알바하면서 공부도 하고, 그러다 성인 되면, 대학 가든가, 상황이 안 좋으면 군대 부사관으로 가서 몇 년 정도 군 복무하고, 그렇게 경제적으로 독립하게 되면, 그때부터 착실히 준비해서 그 사람 등에 칼을 꽂아 버리겠다는 생각이었지.
그런 말을 했었지.
“…부사관. 괜찮네.”
“괜찮지.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월급도 주고, 아니, 단순히 그런 먹고 사는 문제뿐만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위해 숭고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는 전문적이라는 자부심!”
박승환은 무슨 부사관 모병관이라도 되는 것처럼 진지한 얼굴로 말한다.
“누구는 로스쿨 가라고 하고, 누구는 또 부사관 가라고 하고….”
“로스쿨? 누가?”
“…지연이.”
“쌩뚱맞게 무슨 로스쿨?”
“먼저 군대부터 다녀오면 자기가 먼저 졸업해서 뒷바라지해 주겠다고.”
“키워서 잡아먹겠다는 소리네.”
“잡아먹긴 뭘 잡아먹어.”
“아씨. 진짜 그 녀석 아까워. 아무튼 그건 넘어가고, 만약 부사관 싫다면 또 방법이 있지.”
“무슨 방법인데?”
“내 따까리.”
“…뭐?”
“내 밑에서 따까리 하고 있으면 내가 밥은 먹고 살게 해 줄게.”
박승환이 졸라 진지한 얼굴로 그런 소리를 한다.
“…안 그래도 울고 싶은데 뺨을 쳐 주는구나. 쳐 주는 정도가 아니라 후려갈기는 수준인데 이건.”
박승환은 씩 웃는다. 그리고는.
“나 그거 할라고.”
그렇게 말한다.
“그거? 뭐?”
“변호사.”
박승환이 그런다.
“…변호사?”
“어. 그 사람 거 내가 물려받으려고.”
승환이는 그렇게 말하고 담배를 하나 더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저번에 내가 그랬지. 나는 그 사람처럼 너를 모시거나 하지는 않을 거라고.”
승환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진심이었거든. 솔직히 작은 어르신이고 뭐고, 니가 친군데 내가 친구 모시면서 굽신굽신하고 싶지도 않고, 또 그 사람 생각대로 따르고 싶지도 않고. 그럴 생각이었는데….”
승환이는 그렇게 말하고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인다.
“그냥 이렇게 친구로 지내도 괜찮지만, 기왕이면, 나도 뭐 내 밥벌이도 하면서, 너에게 도움도 줄 수 있고, 그런 게 뭐가 있나 생각해 보니까, 변호사도 괜찮겠다 싶고, 무엇보다도 그 사람 재산이 좀 되거든.”
“…너희 아버지?”
“아. 그 아버지라는 소리 되게 거슬리지만 일단 넘어가고. 아무튼, 그렇잖아. 1렙에 빤쓰만 입고 맨땅에 헤딩하는 것보다는 만렙찍고 풀템으로 시작하면 게임이 훨씬 편해지니까, 자본주의적으로 생각하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 뭐 그런 논리적인 계산을 한 거지. 뭐 내가 애도 아니고, 준다는데 반항심으로 거절할 이유도 없고, 뭐 아무튼 그래서. 그리고 그런 생각도 들고.”
“…어떤 생각?”
“너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 굽신거리면서 모시겠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노는 것도 그렇고, 일적으로도 너랑 같이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그런 생각.”
나는 말없이 승환이 녀석을 바라만 보고 있다.
“그때. 확실히 정했어.”
“그때?”
“창회 생일 때.”
“…….”
“창회 어머님 앞에서 재롱떠는 너 보면서, 괜찮겠다고, 너라면 뭐, 괜찮을 것 같다고. 그런 생각 들더라.”
승환이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담배를 비벼 끈다.
“아.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별로야. 이제 진짜 안 피워야지. 아무튼, 먹고살 걱정은 하지 마라. 내가 돈 엄청 벌 자신은 없어도, 그 사람 재산 물려받으면 흥청망청 탕진할 때 너랑 같이 써 줄 테니까. 탕진잼 뭔지 알지?”
“…미친놈.”
“미친 걸로 치면 니가 가장 미쳤어. 임마.”
승환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씨익 하고 웃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