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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업을 이어라-242화 (242/271)

242 : 따까리 (1)

***

차 가지고 온 중훈이는 차 타고 돌아갔다. 찬희는 피곤하기도 하고, 지하철 타면 너무 돌아간다고, 택시를 탔고, 집이 근처인 창회는 걸어갔다.

그리고 나와 승환이 두 사람만 지하철을 타고 가고 있었다.

아무리 버프가 있었다고 해도, 배 터질 때까지 먹었고, 거기다가 잠깐 투닥투닥했더니, 지하철에 타서 자리에 앉자마자 피곤함이 몰려왔다.

사실 밥 많이 먹었다고, 친구 놈들과 투덕거렸다고 피곤한 건 아니었다. 다른 이유가 있었지.

신체적으로는 어제, 아니 오늘 제대로 잠을 못 잔 게 크지. 몇 시간 누워 있지 않았고, 그 시간도 잠을 잤다고 하기에는 좀 애매하다.

사실 그보다 정신적인 피로가 더 크다.

서현 씨, 그리고 지연이…. 오늘 하루 동안 너무나도 많은 심력을 소모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다.

예전 같았으면, 피곤하니 일단 집에 가서 씻고 자자.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정신적인 피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집이, 잠이, 나에게 정신적 휴식을 안겨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아니, 오히려 지금 집이라는 장소는 정신적인 피로를 더욱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자꾸 한숨이 나오려고 한다.

“너 진짜 오늘 무슨 일 있냐?”

실제로 한숨을 쉰 건 아닌데, 옆에 앉은 승환이가 그래도 어딘가 우울한 내 상태를 눈치라도 챘는지, 그렇게 물어본다.

“아냐. 무슨 일은.”

그런 내 대답을 들었지만, 승환이는 여전히 날 바라보고 있다.

똑똑한 녀석이니까, 거기에 눈치도 빠른 녀석이니까 아마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그래.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지.”

박승환이 그렇게 말한다.

뭐야. 이 자식, 혹시 뭐 눈치챈 건가?

“그런 큰돈을 품고 있으니 불안할 만도 하겠지. 다른 사람 같으면 안 해 주겠지만, 뭐 너는 친구니까, 어쩔 수 없지. 내가 희생해야지.”

그러면서 나에게 손바닥을 내민다.

“…뭔데? 이건.”

“맡아 줄게. 내가.”

그러면서 손가락을 까딱까딱.

“진짜 내가 큰 희생하는 거다. 내가 너나 되니까 맡아 주는 거야. 자. 형에게 맡겨. 믿고 맡길 수 있는 승환 신용 금고. 보관료는 지인 할인으로 특별히! 10% 되겠습니다.”

역시 개드립이었어. 잠깐이나마 박승환 이 녀석이 똑똑하다고 말했던 내 자신을 저주한다.

“…스위스 은행이냐? 보관료까지 받게.”

“검은돈에 대한 철저한 보안과 비밀 엄수에 대한 서비스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호갱님, 아니, 고객님.”

“검은돈? 이게 검은돈이야?”

“장영호에게 받은 합의금이잖아? 출처가 범죄 조직이라는 이야기죠.”

“…젠장. 부정할 수가 없네.”

“부정할 수 없지. 내가 바로 옆에서 지켜봤으니까.”

박승환이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한다.

나는 그런 녀석을 보다 피식하고 웃어 버렸다.

안다. 저 녀석이 왜 저런 개드립을 치는지. 지 나름의 걱정해 주는 방법이다.

나는 그런 승환이의 마음 씀씀이에 고마움과 동시에 씁쓸함도 같이 느꼈다.

아버님이 퇴원하신다는 할머니의 전화를 받았을 때, 지연이를 만났을 때, 친구들과 농담을 주고받을 때, 나는 잠시나마 마음속에 드리워져 있던 어둠이 물러난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이내 그 어둠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내 마음을 다시 잠식해 들어온다. 아주 잠깐의 틈만 있으면, 아주 잠깐의 생각할 시간만 있으면, 이내 어둠은 내 마음속을 가득 뒤덮어 온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승환이의 농담에 잠깐이나마 웃을 수 있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래봤자 아주 잠시뿐이라는 것을. 이 녀석과 헤어지면 다시금 어둠이 내 마음 전체를 장악한다는 것을.

“커피 마실래?”

갑자기 승환이가 그렇게 물어본다.

“…커피?”

“어.”

“밤인데?”

“뭐 언제는 밤이라고 커피 안 마셨냐?”

“…그건 그렇지. 근데 갑자기 웬 커피?”

“그냥. 뭐랄까….”

박승환은 녀석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냥, 뭔가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나 싶어서.”

평소에 듣기 힘든 진지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다.

***

양재천 뚝방길.

저번에 함께 걸으면서 승환이에게 중학교 시절 이야기를 들었던 그 뚝방길을 같이 걷고 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또 이 길을 걷고 있다.

처음에 커피를 마시자는 권유를 받았을 때는 거절하려고 했었다.

승환이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권유를 했는지 알고 있었지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나 혼자만의 이야기도 아니고, 서현 씨, 지연이도 관계되어 있는 이야기를 제삼자인 승환이에게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절하려고 했는데, 승환이가 꼭 이야기해 달라는 말은 아니라고, 그냥 같이 산책이나 하자는 말에 그날이 생각났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승환이와 양재천 뚝방길을 걸었던 그날 밤이 떠올랐다. 그 차가운 공기가, 고요함이 갑자기 그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나는 승환이와 같이 이 길을 걷고 있다.

승환이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그저 발걸음을 맞춰 내 옆에서 같이 걸어 주고 있을 뿐이다.

나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온 사위가 조용한 뚝방길을 따라 그리 빠르지 않은 발걸음으로 천천히 걷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말없이 얼마나 걸었을까?

계속 이어질 것 같은 침묵을 깬 것은 나도, 승환이도 아니었다.

내 주머니에 들어 있던 휴대폰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했다. 서현 씨의 이름이 떠 있었다.

승환이는 눈치 빠르게 조금 더 속도를 높여 앞으로 걸어가 주었다.

나는 그런 승환이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통화 괜찮으세요?

전화기 너머에서 서현 씨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평소와 달리 조심스러운 목소리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다 나 때문에.

“괜찮아요.”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나오는 목소리는 퉁명스럽다. 나조차도 놀랄 정도로.

-죄송해요. 늦으셔서 전화했어요. 혹시 언제 들어오시는지….

서현 씨가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

나는 잠시 주저했다. 몇 시까지 들어간다고 하면 될까?

“오늘은…. 승환이네서 자고 가려고요. 죄송해요. 미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해 버린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서현 씨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말을 주저한다.

-아니에요. 내일 아침에 들어오시나요?

“네. 내일 오전 중으로.”

-알겠습니다. 죄송해요. 괜히 전화 드려서.

“제가 죄송해요. 미리 연락드렸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서현 씨와의 짧은 통화가 끝이 났다.

나는 전화기를 잠시 바라보다 다시 작게 한숨을 쉬고는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오늘 나 진짜 등신 같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을 때, 승환이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겠다.’

그런 눈으로.

***

“흐으음.”

그렇게 이상한 소리를 낸 박승환은 잠시 말없이 날 물끄러미 바라본다.

평소 같았으면 ‘뭘 꼬라보는데!’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눈 찌르기를 시전했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액션을 취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일단 난 상관없다.”

그리고 그렇게 말한다.

“…뭐가?”

“우리 집에서 자고 가도 괜찮다고.”

당연한 걸 묻는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다.

아. 씨. 괜히 부끄럽다. 너무 생각 없이 말해 버렸어.

그냥, 오늘은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나도 모르게 승환이네 집에서 자고 간다는 말을 해 버렸다.

사실 하룻밤 보내는 거야 일도 아니다. 피시방도 있고, 찜질방도 있고, 뭐 여차하면 모텔도 있으니까.

문제는 내가 박승환이 듣고 있는 상황에서 승환이 집에서 자고 가겠다는 말을 생각 없이 해 버린 거고, 박승환은 그런 나에게 자기는 상관없다고 말하고 있는 거다.

아. 젠장. 난감하네.

“불편하면 안 그래도 괜찮고.”

그런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승환이 녀석은 시원스럽게 말해 준다.

“뭐, 선릉역 가면 모텔 많으니까, 우리 집 불편할 것 같으면 거기서 하루 지내든가.”

저렇게 쿨하게 나와 버리니 내가 더 미안하게 느껴진다.

참나. 나 오늘 진짜 한심하네.

거기까지 말한 박승환은 다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한다. 마치, 내가 말해 주기 전까지 자기는 묻지 않겠다는 듯, 천천히 다시 앞서 나아간다. 그리고는 몇 발자국 걸어 나가다, 다시 몸을 돌리고 다시 나에게 말한다.

“뭐, 니가 어련히 알아서 잘 판단하겠지만….”

그리고는 뭔가 잠시 생각하더니.

“별거 없으면 그냥 자고 가라. 돈도 많이 가지고 있는데.”

그리고는 다시 몸을 돌려 걸어간다.

그 녀석의 뒷모습을 보는데, 진짜 내 스스로가 한심하고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라는 녀석은 혹시라도 내가 불편할까 봐, 어색할까 봐, 저렇게 말 하나하나 신경 써서 해 주고 있는데, 나는 뭐, 가치도 없는 자존심 가지고 이 난리를 피우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신세 좀 지자.”

내가 말했다.

“신세는 무슨.”

박승환이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는 더 이상 말없이 걷는다.

그런 이 녀석이 좋았다. 무슨 일 있었냐고 묻지 않는 승환이가 고마웠다.

“사실. 뭐. 별건 아닌데….”

그런 녀석의 마음에 대한 보답 겸, 하루 재워 주는 숙박비 겸 해서 나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

내가 서현 씨에게 내 마음을 보여 주었다. 서현 씨도 같은 마음이라고 했다. 하지만 내 곁에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이유는 묻지 않았다. 서현 씨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지만, 좀 마음이 그랬다.

지연이하고도 이야기를 나눴다. 고백을 받았었고, 그에 대한 답을 들려줬다. 지연이는 이해해 준다고 했고, 그 녀석에게 몹쓸 짓을 한 것 같아서 마음이 좀 그렇다.

뭐 그런 이야기였다.

나는 승환이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정리해서 이야기를 하자 진짜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맙게도 승환이는 ‘뭐 고작 그런 일 가지고 이 청승을 떤 거냐?’같은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가끔씩 고개를 끄덕여 가며, 내 이야기를 들어만 주고 있었다.

“뭐, 결국 그렇게 된 거야. 너한테 이야기하면서 생각해 보니 내가 좀 한심하게 느껴진다. 고작 이런 거 가지고 이러고 있으니….”

나는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아니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은데.”

내 이야기를 듣고서 승환이가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응?”

“단순히 누가 좋고, 누가 안 좋고, 사귀네 마네,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 지금 니가 해 준 이야기는.”

승환이가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장난기 쏙 빠진 얼굴로 그렇게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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