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241화 (241/271)

241 : 5년 만기 정기적금 (3)

“이제, 이거 한수 학생에게 돌려줘도 될 것 같아요. 고마워요. 한수 학생.”

할머니는 내 앞으로 통장을 밀면서 그렇게 말씀하신다.

통장을 확인한 친구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한다.

눈빛으로 묻고 있다. 도대체 저 통장이 뭐냐고.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그 통장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저게 뭐냐 하면, 기훈이와 할머니가 이사하는 날, 다른 사람 모르게 할머니에게 드렸던 비상금통장이다.

장영호에게 받은 합의금 오천오백만 원, 그중에 삼천만 원은 서현 씨에게 바로 갚았고, 천만 원은 기훈이 아버님 치료비로 서현 씨 고모부님께 드렸다. 그리고 남은 천오백 만원을 통장에 담아 할머니 비상금으로 드린 것이다.

말 그대로 비상금. 그런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혹시라도 윤기훈 저 자식이 정신 못 차리고 또 사고 치고 그럴 때를 대비한 비상금이다. 어찌 됐든 월세는 내야 하니까.

뭐 꼭 사고 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아니더라고 해도, 혹시 일을 못하게 되는 그런 경우가 있을 수도 있고.

아무튼 이런저런 돌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월세와 생활비 조로 비상금 통장을 만들어 드렸었다.

당연히 비밀로 했다. 기훈이는 물론 친구녀석들에게도. 오직 서현 씨만 저 통장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다.

그런 비밀의 통장이 지금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다른 학생들은 몰랐나 보네요. 이거는 한수 학생이….”

아니, 그러실 것 까진 없는데, 할머니가 또 그걸 애들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신다.

저기, 할머니. 안 그러셔도 되는데요….

하지만 그렇다고 또 말릴 수도 없고, 그냥 잠자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수밖에 없다.

할머니가 꺼내 놓으신 통장의 정체를 알게 된 친구 놈들이 다시 나를 바라본다.

그 시선이 오묘하다. 뭐랄까?

꼭 한 문장으로 설명하자면,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 그런 눈빛이랄까?

나는 녀석들의 눈빛을 외면하고 다시 할머니 앞으로 통장을 쓱 밀어 넣는다.

“혹시 모르니 가지고 계세요. 말 그대로 비상금이니까. 그리고 저 당장 필요 없는 돈이에요.”

내가 그렇게 말씀드렸지만, 할머니는 인자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시고는.

“마음은 간직하고 있을게요.”

그렇게 말씀하신다.

아휴. 진짜. 아휴. 참. 진짜.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을 뭐라고 설명을 못 하겠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옆에서 지켜보던 윤기훈이 그렇게 말한다.

처음이다. 저 녀석이 내 앞에서 저렇게 당당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기훈이를 바라보았다. 그 녀석도 내 눈을 바라보고 있다.

이제 괜찮다고, 자기를 믿고 할머니를 맡겨 달라고, 눈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나는 그렇게 말하며 통장을 집어 들었다.

뭔가 나쁜 놈이 된 듯한 기분이다.

그리고 거기서 끝도 아니었다.

“저도 준비한 게 있어요.”

기훈이 녀석이 그렇게 말하고는 내 앞으로 봉투 하나를 쓱 내민다.

이건 또 뭐야. 뭔데?

“이건 뭐…냐?”

“형이 빌려주신 보증금 일부요.”

그렇게 어이없는 말을 한다.

아니, 이 기쁜 날에 왜 자꾸 나를 채권 추심하러 온 사채업자로 만들어!

나는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이거 할머니도 알고 계신 건가?

할머니는 미소 짓고 계신다.

마치, 당신께서는 다 알고 계셨다는 듯, 미소 띤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신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기훈이가 말한다.

“확인해 봐요.”

할머니도 그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진짜 이제 나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봉투를 집어 든다.

봉투 안에는 수표 한 장이 들어 있다.

숫자 5, 그리고 0이 여섯 개, ‘금 오백만 원정’이라는 한글이 쓰여 있는 수표 한 장.

수표를 확인한 나는 윤기훈을 바라보았다.

너 이 자식. 너 임마. 지금 임마.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무리하지 않았어요.”

기훈이는 조금 전 그 눈빛으로, 이제는 자신에게 맡겨 달라는 당당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말한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설명해 준다.

“저번에 한수 형을 따로 만났었어요. 월급을 받았고, 조금씩이라도 형에게 갚아 나가고 싶다고.”

그랬었다. 저 답답한 녀석이 월급 받은 걸 고대로 나에게 주겠다고 계좌 번호를 물어봤었더랬지.

“그때 형에게 혼났었어요. 답답한 녀석이라고. 당장 갚지 말고 적금이라도 들라고.”

친구 놈들이 또 아까와 같은 시선으로 날 본다.

왜 나는 저 시선이 따갑지?

기훈이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한다.

“형에게 보여 드리고 싶었어요. 이제는 믿어 보셔도 된다고.”

기훈이가 날 보며 말한다.

“저도 얼마 전까지 할머니가 가지고 계신 통장에 대해서는 몰랐어요. 몰랐는데, 할머니가 말씀해 주셨어요. 이제는 돌려드려도 될 것 같다고. 그런데 그냥 돌려드리면 형이 안 받는다고 하실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저도 형에게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이제 받으셔도 된다고.”

할머니께서 고개를 끄덕이신다.

“빨리 빚을 털어 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에요. 할 수 있으면 최대한 빠른 시간에 돌려드리는 것이 맞겠지만, 무리해서 갚는다고 해서 형이 좋아하시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기훈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품에서 통장 하나를 더 꺼내 나에게 내민다.

“봐 주세요.”

나는 말없이 통장을 집어 들었다.

5년 만기 적금 통장. 총 납입금은 이천오백만 원.

“남은 돈은 이 적금이 끝나면 돌려드리도록 할께요. 마음 같아서는 최대한 빨리 돌려드리는 게 맞겠지만….”

기훈이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 잠시 말을 멈춘다.

“형들 앞에서 솔직히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저 대학에 가려고 생각 중이에요.”

“와! 씨. 야. 너 잘 생각했다.”

대학에 가겠다는 기훈이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놈은 찬희였다.

아니 저 자식은 왜 아직까지 눈물 글썽이고 있는 건데?

“그래. 임마. 야. 너. 임마. 와. 그래. 잘 생각했어. 야. 형이 과외해 줄까? 나 과외 엄청 잘하거든. 임마. 형 한국대야. 한국대!”

찬희 녀석 흥분했는지, 할머니 앞에 계신 것도 까먹은 듯 그렇게 소리 높여 말한다.

그래도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다.

다들 비슷한 마음일 테니까.

“찬희 형, 감사합니다. 나중에 따로 말씀드릴게요.”

오히려 기훈이 녀석이 의젓하게 말한다.

“좀 조용히 좀 있어. 자식아.”

중훈이가 찬희의 옷자락을 잡아 꿇어앉힌다.

“당장 내년부터 가겠다는 건 아니지만, 그대로 대학에 가게 되면 등록금이나 생활비를 신경 안 쓸 수는 없고…. 그래서 형이 이해해 주신다면, 이 적금이 만기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기훈이 녀석이 그러면서 고개를 꾸벅 숙인다.

그런 기훈이를 바라보는데,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녀석. 이 녀석 언제 이렇게 큰 거지? 몇 달 사이에….

“등록금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그렇게 말을 꺼낸 녀석은 박승환이었다.

기훈이가 지금 승환이 아버님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지?

“이사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기는 하셨는데…. 그래도 제 힘으로 준비해 두고 싶어서요.”

윤기훈이 승환이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한다.

승환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일 뿐 더는 말이 없다.

“그래. 알았어. 5년 후. 기다리고 있을께.”

나는 기훈이에게 적금 통장을 돌려주며 그렇게 말했다.

5백만 원 수표는 일단 집어 들었다. 뭐, 용처는 나중에 생각해 보자.

사실 지금은 할머니가 돌려주신 천오백만 원, 그리고 기훈이가 건네준 오백만 원의 용처 같은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저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두 조손을 눈에 담아 두고 싶었다.

***

우리가 기훈이 집에서 나온 시간은 밤 10시가 넘어서였다.

친구 집도 아니고, 그렇게 늦은 시간까지 버티는 건 폐라는 걸 잘 알고 있었는데, 중간에 끊고 나올 수가 없었다.

즐거웠으니까. 우리뿐만 아니라 기훈이도, 할머니도 모두 즐거웠으니까.

나는 경험이 없지만, 친할머니 집에 모인 손주들처럼 맛있는 밥 먹고, 즐겁게 한참을 놀다 나온 기분이었다.

“와. 아직도 배가 안 꺼져.”

이중훈이 툭 튀어나온 배를 문지르며 그렇게 말한다.

“한 이틀은 아무것도 안 먹어도 될 것 같다.”

우리 울보 박찬희도 그렇게 말한다.

김창회도 뭔가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불편한 표정을 하고 있다. 오늘 저 자식 성인 되고 가장 탄수화물 많이 처먹었을 거야. 살이나 뒤룩뒤룩 쪄라. 근육 다 지방 돼라!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부른 배를 문지르면서, 중훈이가 차를 주차해 놓은 공영 주차장으로 슬슬 걸어갔다.

“그나저나 난 몰랐네.”

찬희가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낸다.

“뭘?”

중훈이가 묻는다.

“한수 저 자식.”

친구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한다.

“음흉한 놈인줄 알았지만, 뒤에서 저런 짓 까지 하고 다닐 줄은 진짜 몰랐어.”

찬희의 말에 친구 놈들 다 같이 고개 끄덕인다.

아니, 박찬희 이 자식아. 단어 사용 제대로 안 하냐?

누가 들으면 내가 어르신들 사기치고 다니는 그런 놈인줄 알겠는데.

“원래 저렇잖아. 저 녀석. 겉과 속이 다르지.”

김창회마저도 그런 소리를 한다.

“나는 그래서 저 녀석하고 통화할 때 다 녹음 떠 놔.”

이건 승환이의 말.

어이가 없네. 어처구니가 없어.

“야. 이 자식들아. 내가 뭐 잘못했냐? 어? 잘못했어? 잘못한 거야?”

내가 그렇게 항변했지만 친구 놈들은 원래 머리 검은 짐승은 믿으면 안 된다느니, 언젠가는 내 이름이 뉴스에 나올 거라느니, 녹음 파일을 공유하는 단톡방을 만들자느니, 그딴 소리를 하고 있다.

아휴. 나도 모르겠다. 니들 맘대로 떠들어라. 여기서 내가 대응해 봤자, 모닥불에 항공유 들이붓는 꼴 밖에 안 되니까.

뭐, 그리고 사실 나도 알고 있다. 저 녀석들 돌려 까기로 위장한 칭찬을 하고 있는 거다.

‘한수 기특해. 아주 잘했어.’ 같은 낮간지러운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으니까. 저딴 방식으로 칭찬이라는 걸 하고 있는 거다.

뭐 나도 마찬가지다. 사실은 이러쿵저러쿵 애써 해명하지 않는다.

친구라는 게 이래서 좋은 거다. 말하지 않아도, 해명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그런 관계.

아니, 근데, 저 자식들 점점 수위가 높아지는 것 같은데? 칭찬이 아니라 진짜 디스가 되어 가는 것 같은데?

“그런데 잠깐만.”

갑자기 이중훈이 그렇게 친구들 말을 끊는다.

“왜?”

“그러면…. 지금 한수 품속에 이천만 원 있는 거 아냐?”

녀석이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내며 내 가슴팍을 바라본다.

“…그렇지.”

중훈이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 놈들의 시선도 나에게로 향한다.

그 시선에 뭔가 의도가 담겨져 있다고 생각이 드는 것은 나뿐일까?

“한수야. 오늘 내가 집에까지 태워다 줄까?”

갑자기 이중훈이 간사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다.

“…한수, 내일 한강에 둥둥 뜬 채로 발견되겠네.”

찬희 녀석이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한다.

“에이. 고작 돈 이천에. 그리고 한강은 좀 그렇지. 사람도 많고 CCTV도 많고.”

“역시 바다가 제일이지?”

“아직 문 연 철물점 있나? 마트에서 시멘트 파나?”

“요즘 트렌드는 소각이지. 애완동물 전문으로 하는 화장 서비스 있어. 승합차에 화장할 수 있는 장비 갖춰 놓고 부르면 바로 달려와 준다던데?”

그런 소리들을 하고 있다.

아. 이 자식들 선 넘네.

그래. 선 넘으면 다시 선 안쪽으로 밀어 넣어 줘야지.

어떻게?

패면 된다. 자고로 매를 아끼면 아이들을 망치는 법.

“…일단들 맞자.”

나는 그렇게 말하며 가장 가까운 찬희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즐겁다고.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즐겁고 행복하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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