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240화 (240/271)

240 : 5년 만기 정기적금 (2)

***

제사 지낼 때나 사용할 것 같은 커다란 교자상 위에 차곡차곡 쌓이는 음식들을 보자 덜컥 겁부터 난다.

각오는 했었는데, 분명히 할머니께서 음식을 많이 준비하실 것 같다고 예상은 했었는데, 할머니는 나의 그런 예상을 훌쩍 뛰어넘으신다.

“왜 그러고 있어요들. 얼른 들어요, 얼른. 밥도 한 솥 해 놨으니까, 밥 먹고 싶으면 말하고.”

군대는 안 다녀왔지만, 분대 하나는 배 터지게 먹고도 남을 수 있을 정도의 갈비찜을 상위에 내려놓으시며 할머니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의 난 식욕이라는 욕구를 잃어버린 상태이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부터 뭘 먹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서현 씨가 차려 놓은 아침을 억지로 밀어 넣었더니 하루 종일 속이 좀 좋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점심까지 걸렀는데도 여전히 속은 불편한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음식을 보고 있자니, 걱정부터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다. 말은 안 하지만, 승환이도, 창회도, 찬희도, 중훈이도 다들 ‘큰일났네’ 하는 눈빛으로 음식을 바라보고 있다.

할머니 지시에 따라 음식을 나르는 기훈이 녀석만이 걱정 반, 미안함 반 담긴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일단, 먹자.”

내가 젓가락을 들며 그렇게 말했다.

할아버지 밑에서 유교 탈레반 전사로 만들어진 내 입장에서, 어르신이 수저를 드시기 전 먼저 수저를 드는 것은 손목이 뎅강 잘려도 할 말 없는 패륜 행위이지만, 할머니께서 계속 음식을 준비하시는 동안 그냥 이렇게 멍하니 있는 것도 실례라는 생각이 든다.

내 말에 친구 놈들도 젓가락을 집어 든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다. 즐길 수 없으면?

뭘 어떡해. 그냥 먹어야지.

박승환이 입 모양으로 ‘버프’라고 말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줬다.

일단 나에게 식욕이 도는 버프부터 걸자.

***

분명히 말씀 드렸다. 지연이하고 서현 씨는 오늘 못 올 것 같아요. 참석 인원은 나, 창회, 승환이, 찬희, 중훈이 이렇게 다섯 명입니다.

기훈이를 통한 것도 아니고 내가 직접 말씀드렸다.

그랬는데, 할머니는 너무 많은 음식을 준비해 놓으셨다.

고작 반나절?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 많은 음식을 만드실 수 있는 건가? 양도 양이지만 음식 솜씨가 더 대단하시다.

이 정도면 할머니하고 진지하게 사업 이야기를 나눠 봐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승환이가 할머니를 부른다.

“할머니.”

“왜요? 부족해? 밥 줄까요?”

“아니요. 그게 아니고, 할머니. 혹시….”

우리 모두의 시선이 승환이에게로 향한다.

“저하고 장사 한번 안 해 보실래요?”

“…장사요?”

“네. 케이터링이라고, 쉽게 말해서 출장 뷔페 같은 건데….”

그렇게 사업 설명회를 가장해 사기, 기망 행위를 자행하는 사기꾼처럼 입을 털고 있다.

와…. 나는 생각만 했는데, 박승환 저 자식은 진짜 그걸 입 밖으로 꺼내네?

대단하다. 진짜 박승환, 정말 대단하다.

아니 박승환뿐만이 아니다. 진짜 사업성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중훈이도 지분 참여를 하겠다고 손들고 있다.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다시 젓가락을 움직여 갈비 한 토막을 앞접시에 올린다.

신기하다. 이게 들어가긴 들어가네.

분명 조금 전까지는 음식은커녕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는데, 일단 입에 넣고 보니 들어가긴 들어간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 점심을 건너뛴 것도 그렇고, 조금 전 나 스스로 걸은 버프 효과도 있을 테고, 무엇보다 할머니께서 맛있게 음식을 만들어 주신 것도 있고.

하지만 음식을 먹는 내 스스로가 조금 우습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조금 전까지 세상 무너진 놈처럼 먹고 싶지도 않아. 마시고 싶지도 않아. 그래 놓고서, 지금은 이렇게 앉아서 밥을 먹고 있다니.

서현 씨나 지연이는 저녁을 먹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이렇게 갈비찜을 먹고 있는 나 자신이 나쁜 놈처럼 느껴진다.

아니, 나쁜 놈 맞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두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니까.

“야, 넌 어떻게 생각하냐고.”

이런 저런 상념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날카로운 질문이 내 고막을 파고든다.

“어? 뭐가?”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보니, 다들 날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맛있냐? 정신 줄까지 놓고 먹을 정도로?”

찬희가 그렇게 핀잔을 준다.

“그러지 마라. 왜 잘 먹는 애한테 뭐라 그래. 한수야. 많이 먹어라. 식탐 있는 거, 부끄러운 거 아니야.”

박승환이 내 편을 드는 척하면서 교모하게 날 깐다.

아오. 이 자식들. 진짜, 할머니만 안 계셨으면 상 엎었다. 진짜.

“근데 뭐가?”

내가 물었다.

“응?”

“나한테 뭐 물어본 거 아냐?”

“아. 우리 학교 그거 있잖아. 교내 벤처 지원 사업.”

“…있기는 하지.”

근데 그 이야기가 왜 나오는데.

“우리 회사 차리자고. 교내 벤처. 할머니 레시피를 기반으로 전국 일천만 자취 가구에 밀키트를 공급하는 회사.”

찬희가 그렇게 말한다.

우리나라 자취 가구가 일천만이나 되나? 아니, 그건 그렇고, 저 녀석 눈 왜 저렇게 진지한 건데?

“…밀키트?”

“반찬 배달이라고 하면 심사 통과가 되겠냐? 밀키트라고 해야지. 그리고 요거 명분도 좋다니까. 지금 시장의 대세인 구독 경제. 넷플릭스만 구독하냐? 아니지, 반찬도 구독해 먹자!”

박찬희가 그렇게 사기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본투비 사기꾼은 승환이 녀석인 줄 알았는데, 진짜 큰 사고 칠 놈은 여기 있었네?

유라야. 안 되겠다. 저 자식은 안 될 것 같아. 니가 열심히 돈 벌어 오면 저 자식이 사업한다고 다 까먹을 게 분명해. 도망쳐!

나는 할아버지가 나를 바라보는 3단계 시선으로, 자세하게 설명하면 ‘벌레 같은 놈’이라는 시선으로 찬희를 바라보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나저나 이 자식들 진짜 많이 편해졌나 보다.

할머니 앞에서 저런 실없는 농담도 서슴찮게 하는 걸 보니.

***

정말 열심히 노력해서 한 3분의 1 먹었다.

그나마 나하고 박승환이는 버프 덕분에 좀 살 것 같은데, 창회, 찬희, 중훈이 놈은 진심으로 괴로워하고 있다.

고생했다. 너희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있다.

사실 아버님은 그전에도 술을 끊으려고 시도를 하신 적이 몇 번 있으셨단다. 지역 사회 복지센터를 재활 상담도 받고, 약도 처방받으셨었단다.

문제는 그때 처방받은 약이 엄청난 부작용을 동반했다는 것이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알콜에 강한 거부 반응을 일으킴으로써 술을 혐오하게 만드는 작용을 하는 약이었는데, 구토, 설사, 어지러움 같은 육체적인 부작용은 물론, 환각이나 착란, 우울증 증세까지도 같이 일어났다는 거다.

아버님은 단순히 술을 끊어서 그런 문제들이 생기는 것으로 판단하고, 어떻게든 억지로 끊어 보려고 하셨는데, 결국은 부작용을 이겨 내지 못하셨다는 거지.

문제는?

더 큰 피드백으로 돌아왔다는 거다.

나는 술을 못 끊나 보다. 이제는 늦었나 보다. 그런 좌절감이 더 심각한 알코올 중독으로 이어졌다는 거다.

그랬는데, 이번에 병원에 입원하면서 상담을 통해서 그 약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 왜 국내에서 판매가 중지 되었는지를 알게 되셨단다.

“이번에 바꾼 약이 항갈망제라고 하더라고요. 술을 마시고 싶은 욕구를 낮춰 주는 그런 약. 다행스럽게도, 기훈이 애비도 그 약은 잘 맞는다고 하더라구요. 부작용도 없고.”

공부를 열심히 하셨는지, 할머니는 그렇게 우리에게 자세하게 치료 과정에 대해서 설명해 주신다.

“무엇보다도 감사한 게, 애 아빠 혈색이 너무 좋아졌어요. 그전에, 술 많이 먹을 때는 밥도 안 먹고, 그래서 건강이 너무 나빴는데, 지금 병원에서는 먹는 것도 신경 써서 몸에 좋은 것만 골라 주고. 애미보다 낫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감사하게 잘해 줘서. 아이고. 참. 백번을 감사해도 모자를 정도로….”

감정은 마치, 하품처럼 전염된다는 말이 있다.

누군가가 기뻐하면 그 주변 사람도 기뻐하고, 누군가가 슬퍼하면, 그 주변 사람도 슬퍼지는 것처럼 할머니께서 느끼시는 기쁨이 우리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할머니를 바라보는 친구들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다.

“정말 고마워요. 진짜로. 나는 진짜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제 기훈이 애비하고 약 먹고 죽을 일만 남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학생들이….”

할머니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며 손수건을 들어 눈을 찍으신다. 기훈이 녀석은 고개를 돌리고 있다.

나도 속에서 뭔가가 울컥하고 올라온다.

찬희 놈은 이미 눈에 눈물이 한가득이고, 창회 녀석도 고개 들고 천장만 바라보고 있다.

“저희가 뭐 한 게 있나요. 전부 다 아버님께서 노력하신 거죠.”

승환이가 저 녀석답지 않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할머니에게 말한다.

“저희가 더 감사드리고 싶어요. 그렇게 잘 이겨 내 주셔서, 이렇게 좋은 날 만들어 주셔서. 그리고 할머니도 잘 버텨 주셔서, 그래서 감사드리고 싶어요.”

승환이가 그렇게 말하고는 날 바라본다. 이제 나에게 배턴을 넘긴다는 듯.

“아버님 언제 퇴원하세요?”

“…다음 일요일이요.”

기훈이가 대신 대답한다.

“그러면, 모시러 가야겠네. 이 기사?”

내가 그렇게 말하며 이중훈을 보았다.

“넵! 이 기사! 일요일에 차량 준비해 놓고 있겠습니다!”

이중훈이 과장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다.

“아이고. 아니에요. 자꾸 그렇게 학생들에게 신세를 질 수 없죠.”

할머니가 손사래 치셨지만, 이중훈은 만약 자기를 빼놓으면 다시는 밥 먹으러 안 올 거라고 말도 안 되는 협박을 곁들인다.

그 모습을 보는 우리 모두의 얼굴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걸린다.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이 모습을, 이 행복을 서현 씨가, 지연이가 함께 보고 느꼈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하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그리고 다시 우울해졌다.

“맞다. 내 정신 봐라. 기훈아. 그것 좀 가지고 온나.”

할머니가 기훈이에게 무언가를 가져오라고 하신다.

이 타이밍에? 이거 느낌이 싸한데?

친구 놈들도 서로서로 눈치를 본다.

느낌에 할머니가 우리 주려고 뭐 준비하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리고 우려한 대로 할머니 방에 들어갔다 나온 기훈이 녀석 손에는 흰색 봉투가 쥐어져 있다.

“이거는 내가. 우리 학생들에게….”

할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시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봉투를 건네주시려 하신다.

“아이고. 할머니. 이런 거 주시면 저희 앞으로 놀러 안 올래요.”

자리에서 가장 먼저 벌떡 일어나 손사래를 친 사람은 박찬희였다.

찬희 뿐만 아니라, 중훈이, 창회 전부 다 받을 수 없다는 제스쳐를 취하고 있다.

“아니. 이거는 고마워서 주는 거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고….”

할머니는 우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작게 웃으시며 말씀하신다.

“용돈, 다들 손주 같아서, 그래서 할미가 주는 용돈.”

할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시며 인자한 웃음을 지어 주신다.

용돈, 웃어른이 주시는 용돈. 고마움의 사례가 아닌, 그냥 주시는 용돈이라고.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승환이가 가장 먼저 봉투를 받아 든다.

승환이를 시작으로 다들 쭈뼛쭈뼛하며 한 명씩 봉투를 받는다. 나도 받았고.

“고마워요. 앞으로도 자주 놀러와요. 맛있는 거 먹으러 오고. 그리고. 이거는 한수 학생에게.”

할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시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나에게 주신다.

통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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