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 : 5년 만기 정기적금 (1)
***
오후 6시가 넘은 시간, 사가정역 1번 출구 앞에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신나 보이는 학생들, 정시퇴근에 행복해하는 직장인들, 저녁 장사를 준비하는 자영업자들이 만들어 내는 기분 좋은 소란스러움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는 지하철역 입구에 비스듬하게 기대에 서서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평소와 같은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어제까지는 저랬는데, 평소처럼 웃고, 이야기하고 그랬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제 그 시간이 아득히 멀게만 느껴진다.
마치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었던 것처럼, 그렇게 느껴진다.
참나. 이게 뭔 궁상이냐.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려 본다.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별거 아니라는 거.
사실 별거 아니다. 가족이 아픈 것도 아니고, 급하게 큰돈이 필요한 상황도 아니고, 당장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를 걱정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당장 해결할 수 없는 고통에,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들었다면, 코웃음을 쳤을지도, 아니, 어쩌면 화를 내도 변명할 수 없는 사소한 문제였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지금 이러고 있다.
참나. 이게 뭔 궁상이람.
“뭔데? 왜 그렇게 궁상떨고 있는데?”
마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 말이 들려온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박승환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그랬었지. 기훈이 집에 가기 위해 이 녀석과 지하철역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었지.
“…왔냐?”
“왔지. 왜?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은. 아무 일 없다.”
“그런데 왜 그렇게 나라 잃은 백성 같은 얼굴을 하고 앉아 있는데? 아니지, 지금 니 얼굴은 예상 못 한 해방을 맞이한 친일파 얼굴이라고 하는 게 더 맞겠네.”
“…친일파?”
“자. 저 사람들을 봐봐. 다들 오후 6시의 행복함을 만끽하고 있잖아? 근데 우리 친구만 죽상을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반사회적인 모습이란 말인가.”
“…반사회적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다른 놈들은?”
말을 말아야지. 박승환 이 자식이랑 계속 말 섞어 봤자 좋을 게 없다.
“창회는 운동 끝나면 바로 기훈이네 집으로 가 있겠다고 했으니 먼저 갔겠네. 찬희는 오늘 과외 끝나면 바로 기훈이네 집으로 간다고 했고, 중훈이는 좀 전에 출발했는데, 길이 막혀서 7시까지 도착 못 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하더라.”
“…버스 타고 온다고?”
아니, 이해를 못 하겠네. 멀쩡한 지하철 내버려 두고, 이 막히는 시간에 일부러 버스를 타겠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고?
“아니, 차 끌고 온다고.”
박승환이 말한다.
“…데이트했네.”
내 말에 박승환이 고개를 끄덕인다.
저번 여행에서 중훈이와 민주는 특별한 사이가 되었다. 그 말은 지금 한참 좋을 때라는 이야기다. 중훈이 녀석이 데이트할 때 모셔 오고 모셔 가겠다고 엄마 차를 끌고 나왔다는 이야기다.
“…그냥 오지 말라고 하지.”
내가 말했다.
“안 그랬겠냐? 그냥 오지 말고 둘이서 놀아라. 지금 너의 행복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잔칫날이 초상집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 그렇게 말했는데 지가 안 된다고, 다른 자리면 몰라도 오늘은 빠지면 안 된다고 그러는데, 또 꺼져라 할 수는 없으니까.”
“…혹시 민주도 같이 오는 건가?”
“설마. 아무리 온 세상이 핑크빛이라고 해도 생각이라는 게 있겠지. 그리고 같이 와도 상관없잖아. 여자 친구가 직접 염해 준다면 저승 가는 길 여한 없이 성불하겠지.”
박승환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렇게 말한다.
상상해봤는데 그림이 나쁘지 않네.
“그것도 괜찮네. 아무튼 그럼 우리는 그냥 가면 되겠네.”
“슬슬 가자. 걸어가면 대충 시간 맞겠네. 아니, 근데 왜 여기서 보자고 한 거야? 기훈이 집이면 면목역이 훨씬 가까운데.”
나는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 나간다.
제정신이 아니어서 생각 없이 그냥 대충 정했다고 말해 봤자 욕이나 먹을 테니까.
승환이는 재빨리 내 옆에 붙으면서 물어본다.
“근데 지연이는?”
“약속 있대.”
“약속?”
“가족 모임.”
나도 모르게 그렇게 거짓말을 한다.
“가족 모임이라…. 나는 이해 못 할 이야기네.”
박승환이 해맑은 얼굴로 그런 소리를 한다.
참나. 누가 반사회적인 인간인데?
“…남들 앞에서는 그런 말 하지 마라.”
“이해해라. 내가 성장 배경이 좀 남다르잖냐. 그건 그렇고, 서현 씨는? 서현 씨도 못 온대?”
승환이가 그렇게 물어본다.
“오늘 일이 있대.”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왔을 때, 강서현을 반긴 것은 집 안 가득한 고요함이었다.
처음도 아니었는데, 한수보다 먼저 집에 도착한 것이 오늘도 처음은 아니었는데, 강서현은 유독 오늘의 고요함에 어색함과 이질감을 느꼈다.
아니, 어색함과는 달랐다. 꼭 무언가로 정의하자면 서글픔, 그렇게 느껴졌다.
강서현은 현관에 서서 잠시 아무도 없는 거실 복도를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고 신발을 벗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정해진 미래였다. 다만 예상보다 좀 더 빨리 다가왔을 뿐.
이미 알고 있었잖아. 이렇게 될 거라는 걸.
강서현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집 안으로 발을 옮겼다.
거실 소파에 가방을 내려놓고, 자켓을 벗어 걸쳐 놓았다.
그리고 물끄러미 거실을, 정확히 말하면, 티타임에 그가 항상 앉는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동시에 그의 목소리도 떠올랐다. 친구들 이야기를 해 주며 들떠 있던 그의 밝은 목소리도 떠올랐다.
조금 전 들었던 그의 목소리와는 사뭇 달랐던.
***
-…그래서 오늘 오실 수 있는지 여쭤보려고 연락드렸어요.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한수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목소리였다.
그녀가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었던 윤기훈의 아버지가 퇴원하게 되었다는, 그리고 윤기훈의 할머니가 기쁜 마음에 저녁을 대접해 주고 싶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달해 줄 때도, 그는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톤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저는 오늘 못 갈 것 같아요. 일이 있어서….”
강서현은 그렇게 말했다. 최대한 평소와 같은 목소리를 흉내 낸다고 했지만, 그렇게 들리는지 그녀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냥 알겠습니다. 그러고 전화가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런 예상과는 달리 전화는 끊어지지 않았다.
-저 때문이라면, 안 그래 주셨으면 좋겠어요.
잠시 침묵 뒤에 다시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현 씨도…. 아니, 서현 씨가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이렇게 좋은 결과가 나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한수가 그렇게 말했다.
강서현은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해 줄 법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평소와는 다른 그의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죄송해요. 저도 진짜로 가고 싶은데, 일이….”
거짓말을 했다.
일 같은 건 없었다. 아니, 설사 일이 있다고 해도, 오늘 그 자리에는 같이하고 싶었다.
기뻐하는 할머니의, 아니 한수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분명히 기뻐할 것이다. 자기 일처럼 기뻐할 것이 분명했다.
“죄송해요. 제가 할머님께는 따로 전화드리도록 할게요.”
강서현은 마음을 다잡고 그렇게 마무리 지었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통화는 끝났지만, 강서현의 귓가에는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던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계속 감돌고 있었다.
***
강서현은 거실을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쉬고 몸을 일으켰다.
일단 진정하자. 물부터 한 잔 마시고 진정하자.
속으로 그렇게 말해 주고는 주방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장면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식탁이었다.
강서현은 잠시 텅 빈 식탁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오늘 아침을 차려 놓고 나갔음을 기억해 냈다.
먹어 줬을까?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며 식탁을 바라보던 강서현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 시선 끝에는 냉장고가 있었다.
자신이었다면 먹지 않았을 것 같았다. 실제로 강서현은 아침을 준비했지만, 정작 본인은 먹지 않았다. 무언가를 먹고 싶다는 욕구가 전혀 없었으니까.
강서현은 냉장고를 바라보다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냉장고 쪽이 아니었다. 그녀의 걸음 끝에는 음식물 쓰레기를 담아 놓는 통이 있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강서현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쓰레기통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깨끗했다. 오늘 아침의 음식은 물론, 어떤 음식물 쓰레기도 담겨 있지 않았다.
지난 주말에 깨끗하게 청소를 해 놓은 그 상태 그대로였다.
강서현은 뭐라 규정할 수 없는 감정이 담긴 숨을 작게 뱉어 내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조금 전 바라보았던 냉장고를 향해 다가갔다.
냉장고 앞에까지 도착해서, 손잡이를 잡고, 잠시 숨을 고른 후, 가볍게 힘을 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냉장실 한쪽에, 자신이 오늘 아침에 과일을 손질해 담아 뒀던 그 접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접시는 랩으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과일이 담겨 있었다.
과일이 담겨 있다는 것을 확인한 강서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예상은 했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과일이 담겨 있는 그릇을 보자, 마음 한편이 무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강서현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손을 뻗어 접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이내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상했다. 뭔가 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강서현은 손에 든 접시를 들어 올려 자세히 살펴보았다.
줄어 있었다. 아침에 그녀가 담아 놓은 양보다 확실하게 줄어 있었다.
먹었다. 그가 과일을 먹었다.
그리고 자신이 과일과 함께 토스트와 샐러드도 준비해 뒀다는 기억을 떠올렸다.
강서현은 접시를 내려놓고 다시 냉장고를 열고 안을 살펴보았다.
토스트가 담긴 접시나 샐러드가 담겨 있는 보울은 없었다. 혹시나 싶어 다시 한번 살펴봤지만, 냉장고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냉동고?
강서현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 계속 부정적인 시나리오를 가장 먼저 떠올리고 있는 자신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냉장고 문을 닫은 강서현은 고개를 돌려 싱크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식기를 건조시키기 위해 설치해 놓은 트레이 위에 접시와 보울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늘은 가사 도우미가 방문하는 요일이 아니었다.
그가 설거지를 해 놓았다는 의미였다.
강서현은 싱크대로 다가가 토스트가 담아져 있던 접시를 집어 들었다.
혹시라도 내가 민망하게 생각할까 봐 어디 다른 곳에 버려 버린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그런 생각을 자신이 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확신할 수 있었다.
차라리 그대로 남겨 놓고 갔을지언정, 그녀를 속이기 위해서 거짓된 행동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절대로.
강서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깨끗하게 닦여 있는 접시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