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 : 같은 마음 (6)
지연이는 고개를 숙인 채 발끝만 바라보고 있다.
나는 잠시 말없이, 그런 지연이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
“…미안.”
그렇게.
미안하다는 내 대답을 들은 지연이의 고개가 작게 위아래로 움직인다. 마치,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담담하고 자연스럽게.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 끄덕임을, 담담한 슬픔이 배어 나오는 옆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다.
그렇게 몇 분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오빠.”
지연이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바라본다.
“고마워요. 솔직하게 말해 줘서.”
그렇게 말하는 지연이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다.
“저는 괜찮아요.”
지연이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렇게 말해 준다.
“오빠도 저를 그렇게 생각해 주고 있다면, 저만의 일방적인 마음이 아니었다면, 저는 괜찮아요.”
하지만 이내 고개를 숙인다.
나를 바라보던 시선도, 입가에 걸려 있던 옅은 미소도 사라진다.
“많이 생각해 봤어요. 오빠는 나를 그냥 친한 후배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는데…. 괜히 이야기해서 사이만 더 어색해지는 건 아닐까….”
“…….”
“많이 고민해 봤는데, 그래도 이야기는 하고 싶다고, 내가 어떤 마음인지 전해 주고 싶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오래전부터…. 여행 가기 훨씬 오래전부터요.”
“…….”
“이건 알아줬으면 해요. 그날 밤 오빠에게 이야기했던 건, 단순히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랬던 것은 아니라는 걸.”
“그래. 알고 있어.”
지연이가 희미하게 웃는다.
“…좋아하는 마음은 등가 교환이 아니니까, 오빠가 내 마음을 받아 주지 않는다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하는 생각을 안 했던 것은 아니지만, 마음 굳게 먹고 있었어요. 괜찮다고, 오빠가 나와 같은 시선으로 봐 주지 않는다고 해도, 그냥 친한 후배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고 해도, 혹시라도 저의 고백이 우리 사이를 어색하게 만든다고 해도…. 그래도 내가 오빠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그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전해 줄 수 있다면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생각했는데….”
지연이가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본다.
“괜찮아요. 오빠도 저와 같은 마음이었다는 걸 알았으니, 저는 괜찮아요. 고마워요.”
지연이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말없이 내 눈을 바라본다.
“오빠.”
지연이가 평상시의 목소리로, 아니 평상시의 목소리를 가장한 톤으로 날 부른다.
“…어.”
“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지연이의 얼굴에 다시 옅은 미소가 걸린다. 애써 한 톤 높인 목소리처럼, 슬퍼 보이는 미소.
나는 고개를 끄덕여 준다.
“혹시. 그 언니….”
지연이는 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떨군다.
“…아니.”
나는 그런 지연이의 옆모습을 보면서 대답한다.
“서현 씨 때문이 아니야. 사귀고 있지도 않고, 그럴 일도 없을 거야.”
그렇게 확실하게 말해 주었다.
서현 씨 때문에 지연이의 마음을 거절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연이가 다시 고개를 든다.
“그러면 혹시 저희 아빠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물어본다.
“아니, 선생님 때문도 아니야.”
내가 대답한다.
“…알고 계셨어요?”
“어, 얼마 전에 우연히. 하지만 선생님하고도 관계없어.”
내 말에 지연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것만은 확실하게 말해 주고 싶어. 서현 씨나 선생님 때문은 아니라는 거. 지연이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든가, 부족하다든가, 그런 이유도 아니야. 꼭 이유를 말한다면 나 때문인데….”
거기까지 말한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어떻게 하지? 내 마음을 설명하려면 그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
그 망할 놈의 작은 어르신 이야기를 말이다.
이야기해 주자. 감추지 말고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 주자.
나를 좋아해 주는,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이 소중한 사람에게, 알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있는 그대로, 내가 그 작은 어르신인지 뭔지가 되었고, 내 인생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만 같아서, 그래서 혹시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걱정이 든다고, 그렇게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 주자.
그렇게 마음을 정했을 때.
“괜찮아요. 억지로 설명하지 않아도…. 저는 괜찮아요. 오빠.”
지연이가 그렇게 말해 준다.
그렇게 말해 주는 지연이의 얼굴에는 다시 미소가 떠올라 있다.
저금 전, 자신은 괜찮다고 보여 주기 위해 억지로 꾸며 낸 미소가 아닌, 슬픔이 담겨 있는 자연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다.
“가끔씩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어요. 오빠에게는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느낌.”
슬픔이 담겨 있는 옅은 미소,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 그리고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는 지연이의 눈동자.
“궁금했어요. 물어볼까 생각했던 적도 있어요. 하지만 오빠라면, 내가 아는 오빠라면 아마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지금도 그래요. 오빠라면 단순히 사귀느냐, 사귀지 않느냐의 관점에서 결정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이유가 있을 거고, 그 이유가 오빠만의 문제는 아닐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중요한 건….”
나는 말없이 지연이의 눈을 바라만 보고 있다.
“제가 가장 바라는 것은 오빠가 행복하게 지내는 거예요. 제가 그 행복이 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괜찮아요. 저는 괜찮아요.”
옅은 미소를 띤 지연이는 울지 않는다.
그저 선명하게 들려오는 음절 하나하나에, 나도 느낄 수 있는 슬픔을 담아서 전달한다.
“그래도 이것 하나만 기억해 줬으면 해요. 제가 오빠를 좋아하는 마음만은 진심이었다고. 아니, 진심이라고. 그 마음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의심 없이 걸어왔고, 그리고 저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지연이는 다시 고개를 떨군다.
“아직은 제 마음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계속 걸어가고 싶어요. 같이 가자고, 같이 걸어 달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저, 나중에, 혹시라도, 제가 생각나면, 아직 뒤에서 걷고 있는지 궁금해지면, 그때는 뒤를 돌아봐 주세요. 거기 제가 서 있을께요.”
물기 젖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다.
나는 아무 말 못하고 그저 지연이를 바라만 보고 있다. 어떤 말을 해 줘야 할지, 어떻게 위로해 줘야 할지 갈피도 잡지 못한 채, 그저 아무것도 못하고 지연이를 바라만 보고 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지연이는 눈을 비비며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려 조금은 빨개진 눈동자로 날 바라본다.
“아. 진짜. 오빠. 저 너무 질척거리죠?”
“…….”
“진짜 여자는 배짱과 자존심인데, 저 오늘 너무 부끄러운 모습만 보이는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며 억지로 웃는 지연이를, 나는 아무 말 못 하고, 바라만 보고 있었다.
***
유지훈은 아파트 입구를 벌써 20분 째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손에는 커피가 들려 있었다.
핑곗거리였다.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밖으로 나왔고, 늦저녁의 여유를 즐기며 아파트 입구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철딱서니 없는 여동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외출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여동생이 몰래 도망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병원에 데려갔던 당사자가 유지훈 본인이었다.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최소한 이삼일, 적어도 오늘은 무리하지 말고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두 귀로 분명하게 들었다.
그랬는데, 이 철없는 여동생이 부모님의 허락도 없이 무단 외출을 해 버린 것이다.
분명 오전에,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그런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외출하기 전, 뭐 하고 있나 싶어서 방문을 열었을 때, 턱 밑까지 이불을 끌어 올리고선 잘 거니까 방해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해 놓고서 오후에 몰래 탈주를 해 버렸다.
계획적이었다는 이야기다. 속여 먹으려는 위장 기만 행위였다는 이야기다.
대학생이라고, 성인 되었다고 오냐오냐해 줬더니, 이제 아주 엄마, 아빠, 오빠 무서운 것도 모르고.
진짜 오늘은 가만 안 두겠어.
유지훈은 그렇게 다짐하며 손에 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젠장. 커피 말고 다른 걸 살걸 그랬어.
유지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원래 커피를 좋아하지 않았다. 기능적으로 필요할 때, 예를 들어 공부해야 하는 양 대비 시간이 부족할 때처럼, 카페인의 각성 작용이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커피를 즐기지 않았다.
그런 그였지만, 생각 없이 커피를 시켰고, 여동생을 기다리며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어느새 3분의 1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유지연. 너 진짜 오늘 가만 안 둔다. 이 커피를 다 마시기 전까지 나타나지 않으면 진짜 가만 안 두겠어.
유지훈은 속으로 그렇게 다짐을 거듭하면서 지하철역과 이어지는 골목으로 시선을 주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혼내 줘야 할까? 엎어 놓고 볼기짝을 때려 버릴까?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5살 때, 실수로 휘두른 손길에 맞고 눈물을 터트린 여동생의 모습을 본 이후, 단 한 번도 여동생에게 손대 본 적 없는 유지훈이었다.
여동생을 체벌한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아버지, 어머니는 물론 그 자신조차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아오. 진짜. 이 자식. 머리 굵었다고 잔소리해도 듣지도 않을 텐데…. 일단 들어오기만 해 봐. 진짜 가만 안 두겠어. 이번에는 그냥 못 넘어가.
그렇게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커피를 입으로 가져가는 유지훈의 시선에, 멀리서 터벅터벅 걸어오는 한 인영(人影)이 보였다.
맞나?
유지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용의자로 보이는 한 사람의 모습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20여 미터 앞에까지 다가왔을 때, 유지훈은 용의자가 가족을 걱정시킨 괘씸한 여동생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잡았다. 요놈!
유지훈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남은 커피를 원샷하고는 빈 컵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는 팔짱을 낀 모습으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여동생을 노려보았다.
여동생은 오빠가 분노의 찬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지도 모른 채, 고개를 푹 숙이고서, 힘없는 발걸음으로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유지훈은 그 모습을 보고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저 봐 봐. 몸도 안 좋으면서 빨빨거리고 싸돌아다니다 상태 더 나빠졌네. 저거.
동시에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
상태가 나빠 보이는 여동생을 혼내도 될까?
그런 마음이 들었다.
아니야. 약해지면 안 돼! 반만. 내가 생각했던 것의 딱 반만 혼내 줘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유지훈은 동생이 10미터 안쪽으로 들어왔을 때, 괘씸한 여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유지연.”
그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근엄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들은 여동생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무서운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는 오빠를 바라보았다.
유지훈은 최대한 무서운 표정을 지으려 했다.
일단 기선 제압이 중요해. 초장 분위기를 확실히 잡아야지.
하지만 그런 유지훈의 생각은 금세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오빠를 본 동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큰 울음이 터져 나온다는 징후였다.
어? 뭐야? 갑자기 왜 저래?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려는 여동생을 보고, 어떻게 된 상황인지 확실히 파악도 하기 전에, 여동생은 빠른 걸음으로 오빠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오빠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소리 내서 울기 시작했다.
유지훈은 당황했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렸을 때, 여동생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이렇게 울음을 터트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니, 울음은커녕, 이렇게 격한 감정을 보여 준 적도 없었다.
단지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학교에서 이유 없는 따돌림을 당했을 때도, 그저 슬퍼하는 눈으로 작게 웃을 뿐, 눈물을 보이거나 하는 녀석이 아니었다.
그런 여동생이 울고 있었다.
자신의 품에서 엉엉 소리 내며, 온몸을 떨면서, 울고 있었다.
유지훈은 팔을 들었다. 그리고 두 팔로 하나뿐인 동생의 떨리는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행인들은 그런 두 남매의 모습을 흥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유지훈은 남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손길로 여동생의 등을 쓸어 주었다.
그렇게 등을 쓸어 주면서, 유지훈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리고 속으로 속삭였다.
이 자식. 감히 내 동생을 울렸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