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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업을 이어라-237화 (237/271)

237 : 같은 마음 (5)

***

셔틀버스가 도착하고, 마스크를 쓴 지연이가 버스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지연이를 확인했지만 아는 체를 하거나, 그 녀석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그저,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는 지연이의 모습을 멀찍이서 잠시 지켜보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셔틀버스가 도착하기 전까지, 아니, 내리는 지연이의 모습을 보기 전까지 나는 계속 후회하고 있었다.

괜히 만난다고 했다고, 처음부터 다음에 보자고 이야기를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계속 후회하고 있었다. 더 이상 바꿀 수 없는 과거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랬는데, 막상 지연이의 모습을 보자, 후회하던 그 마음이 사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 전 기훈이 할머니의 기뻐하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마음의 어둠이 잠시 걷힌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앗! 오빠.”

나를 발견한 지연이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고는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마스크 뒤의 얼굴은 활짝 웃고 있다는 것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도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지연이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고마움과 미안함이 동시에 담겨 있는 걸음으로.

***

도서관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있는 벤치, 우리 두 사람은 각자의 손에 커피를 들고서, 이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다.

카페로 가자고 했는데, 지연이는 답답한 실내보다는 바람을 느끼고 싶다고 했고, 우리는 도서관 카페에서 커피를 사다가 이렇게 밖에 앉아서, 아직은 열기가 남아 있는 늦여름 오후의 한적함 가운데 앉아 있었다.

“오빠. 속 아픈 건 좀 어때요? 괜찮아요?”

지연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렇게 물어본다.

“어. 괜찮아. 그렇게 심각한 거 아니야.”

“…점심은요?”

“대충 먹었어.”

자연스럽게 거짓말이 나온다.

내 대답을 들었지만, 지연이는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시선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진짜…. 괜찮아요?”

“네. 진짜 괜찮아요. 왜? 내 얼굴이 이상해? 아픈 사람 같아?”

나는 일부러 목소리를 반 톤 높여 말한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아니라고 말했지만, 지연이 표정은 아닌 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뭐, 당연하겠지. 지금 내 얼굴은 엉망이 되어 있을 거다. 어제 제대로 잠을 못 잤으니까.

아니, 잠이 문제가 아니지. 오늘 하루 종일 내 마음을 가득 채웠던 우울함이 얼굴에 드리워져 있을 테니까.

“괜찮아. 어제 잠을 잘 못 자서 그래. 다크서클 심해? 턱 밑까지 내려와 있어?”

“턱은 아니고, 광대 정도…? 근데 왜 잠을 못 잤어요? 혹시 무슨 일 있었어요?”

“어.”

“무슨 일이요?”

“…티어.”

“티어? 게임이요?”

“응.”

지연이는 잠시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날 바라보더니, 내 팔을 찰싹 때린다.

“…아픈데.”

“당연히 아파야죠! 사람 걱정하게 해 놓고.”

지연이가 그렇게 말한다. 보지 않아도 마스크 뒤에 뾰로통한 표정을 하고 있겠지.

“지연 씨도 게이머시잖아요. 티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꼭 우리 오빠처럼 말하네요.”

“그거 욕이지?”

“아. 아니요?”

“왜 말을 더듬으시는 거죠?”

“아니에요.”

지연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마스크를 살짝 올리고 커피를 입으로 가져간다.

“그건 그렇고, 넌 괜찮아?”

“네! 전 괜찮아요.”

지연이는 그렇게 말하며 팔을 들어 올려 이두박근이 강조되는 포즈를 취한다. 근육이라고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게 문제지만.

“…근육은 없는데요?”

“여자는 그쪽이 아니라 팔뚝 살을 보는 거예요.”

“아. 그런가?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진짜 괜찮아?”

“네. 괜찮아요. 의사 선생님도 괜찮다고 하셨어요.”

“근데 왜 마스크?”

“얼굴에 뭐가 났거든요.”

지연이는 능숙하게 받아친다. 마치 미리 준비해 놓은 대답인 것처럼.

그래서 더 수상하다.

“잠깐만. 실례합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지연이의 이마를 짚었다.

지연이는 움찔했지만, 내 손을 쳐 내지는 않고, 웃 하고 긴장 서린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만 있다.

근데, 이거, 진짜 열 내린 거 맞아? 열감이 있는 것 같은데?

“어때요? 열 내렸죠?”

지연이가 먼저 그렇게 말한다.

“…모르겠는데? 아니, 열 있는 것 같은데?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오빠 손이 차서 그래요. 마음이 차가우니까 손도 차가운 거예요.”

“…보통은 그 반대 아냐?”

나는 그렇게 말하며 일단 손을 떼어 냈다.

더 확실히 알고자 했다면, 저번에 지연이가 그랬던 것처럼 내 이마를 지연이 이마에 대 보면 알 수 있을 텐데, 대낮에 야외에서 그렇게 대담한 행동을 할 정도의 용기는 없다.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저는 진짜 괜찮아요. 오빠야말로 진짜 괜찮아요?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에요?”

지연이가 다시 그렇게 물어본다. 걱정을 한가득 담은 눈동자가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엉망이야? 오늘 내 얼굴?”

장난스럽게 받아친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아니면?”

“뭔가, 좀… 분위기가 다르달까. 평소의 오빠 말투이기는 한데…. 조금.”

지연이의 말에 나는 커피를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표정을 감추고 싶었으니까.

***

“어머? 진짜요?”

지연이가 놀란 눈으로 되물어본다.

“어. 아직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건 아닌데, 일단 퇴원하시는 건 확정인 것 같아. 가족에게까지 이야기한 거 보면.”

“와. 잘됐네요. 진짜 잘됐어요.”

기훈이 아버님이 퇴원하시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지연이는 마치 자기 가족 일처럼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다. 그 모습에서 단 한 줌의 거짓도 찾아낼 수 없다.

당연한 이야기다. 올해 신입생 중에서 가장 예쁘다는 이야기를 듣는 이 녀석은 보여지는 외형보다 훨씬 더 예쁘고 아름다운 내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으니까.

“할머니께서 정말 기뻐하시겠어요.”

“그래. 너무 좋아하시더라. 안 그래도 할머니가 기념으로 저녁 차려 주고 싶다고 하셨거든. 너에게 전화한다는 거 내가 이야기 해 주겠다고 했어.”

“저녁이요? 언제요?”

“일단 오늘 저녁으로 이야기는 되었는데….”

“오늘이요?”

“응. 혹시 괜찮아?”

“어. 음. 저는 오늘은 안 될 것 같아요.”

“약속?”

“네. 약속이랄까…. 약속이요.”

지연이는 그렇게 말한다. 조금 전 기뻐하던 때와 달리 그 말투에 거짓이 잔뜩 묻어 있다.

하지만 애써 묻지 않는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지연이는 단지 불편하다는 이유로 이런 제안을 거절할 녀석이 아니니까.

“그렇구나. 어쩔 수 없지. 할머니 아쉬워하시겠다.”

“뭐 꼭 오늘만 날인가요? 다음에 저도 밥 얻어먹으면 되죠.”

“…아저씨 같아.”

“네? 뭐가요?”

“오늘만 날이냐는 그 말투.”

“그래요?”

“아니. 아저씨 안 같아. 순정 만화에 나오는 소녀 말투 같아.”

내 놀림에 지연이는 말없이 날 바라본다.

마스크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마스크 안에는 뾰로통한 표정의 지연이 얼굴이 있을 것이다.

갑자기 그 얼굴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볼 수 있을 때 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농담을 주고받고, 놀리고, 놀림 받으며 웃고 웃어 주는 일상이 그리워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에게 전화드려야겠네요. 오늘 못 가서 죄송하다고.”

이내 표정을 푼 지연이는 다시 웃음 담긴 눈으로 날 바라보며 그렇게 말해 준다.

나는 잠시 그 눈을 바라보다.

“그래. 그래 주면 고맙지.”

그렇게 말했다.

“넵! 이따가 전화드릴게요.”

“그래.”

“네.”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잠시 각자에 손에 들린 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우리 두 사람은 말없이 각자 커피에 집중했다.

침묵이 이어졌지만, 우리 두 사람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둘 다 알고 있었으니까. 이제 그 주제에 관해 이야기해야 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날…. 죄송했어요.”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지연이였다.

“축제 끝나고도 그랬고, 그날 밤에도 그렇고…. 저는 항상 그렇게 일방적으로….”

지연이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떨군다.

나는 그런 지연이를, 미안함과 슬픔이 맴도는 지연이의 옆모습을 잠시 바라본다.

지연이는 언제나 날 웃게 해 주는데, 나는 지연이에게 이런 표정만을 안겨 주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

나는 지연이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무엇보다 먼저 고맙다는 말부터 해 주고 싶었어.”

지연이는 내 말을 들었지만 여전히 고개 숙인 채 여전히 발끝만 바라보고 있다.

“용기를 내 주어서, 나에게 마음을 보여 줘서, 단지 그래서 고맙다고 말하는 건 아니야.”

그제야 지연이가 고개를 살짝 들어 날 바라본다.

“유지연이라는 사람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너와 이렇게까지 가까운 사이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어. 이름도 모르고, 아니, 너의 이름은 모를 수가 없었겠네. 다들 너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으니까. 그래도 이름이나 알고, 얼굴이나 겨우 기억하는 다른 후배들처럼, 지나다가 마주치면 못 알아보고 스쳐 지나가거나, 아니면 가벼운 인사 정도나 하는 그저 그런 사이가 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었어.”

솔직한 이야기였다.

지연이가 처음 우리과 후배로 입학했을 때, 짧은 시간에 선배들 사이에서 주목받는 후배가 되었을 때,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라고, 그저 같은 학교, 같은 과. 고작 그 정도의 인연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쩌다 너와 마주하게 되고, 조금씩 가까워지고, 같이 공유하는 시간이 늘어나게 되고, 그리고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부터 너를 보고 있더라.”

지연이는 다시 고개를 숙인다. 시선이 땅을 향한다.

“처음에는 그저 후배라고 생각했었어. 단순한 후배. 예쁘고 성격 좋은 여자 후배, 이야기가 잘 통하고, 놀리면 리액션이 좋은, 그래서 같이 있으면 즐거운 그런 후배.”

지연이가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그랬는데, 언제부턴가 너를 찾고 있더라. 친구들과 모일 때, 아니, 꼭 친구들과 다 같이 모이는 시간이 아니더라도, 만나기로 약속하지 않았더라도, 식당에 갔을 때, 잠시 과 방에 들릴 때, 니가 있는지 찾아보게 되더라. 거기에 지연이 니가 있으면 반갑고, 좋고, 나도 모르게 웃게 되고,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단순한 후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

“딱히 뭘 하지 않아도, 그냥 마주 앉아서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아도, 아무런 어색함 없이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친구. 내가 하는 말을 오해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 없이 편하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 옆에서 등을 두드려 주고 싶은 그런 친구.”

“…….”

“즐겁더라. 같이 놀고, 이야기하고, 웃고, 그렇게 너와 보내는 시간이 즐겁다고 느꼈고, 언제부턴가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 이야기에 웃어 주는 너를 보는 그 시간이 행복하다고.”

지연이가 다시 고개를 끄덕여 준다.

마치 자기도 그렇다는 듯.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어. 너를 만날 수 있어서, 너와 친해질 수 있어서, 그리고 너와 이렇게 마주 보고 이야기할 수 있어서, 그 모든 시간들이 고맙다고 생각했어.”

지연이가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본다.

나는 그 눈을 보며 처음으로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이야기를 해 준다.

“그리고 나도 널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지연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린다.

“나도 너 좋아해. 후배나 친구, 그런 관점에서의 호감이 아니라, 유지연이라는 사람을 좋아해.”

그렇게 솔직한 내 마음을 말해 주었다.

나를 바라보는 지연이의 눈동자에 감정이 일렁인다. 어젯밤 서현 씨의 그 눈동자처럼 슬픔이 들어차 있다.

지연이는 다시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잠시 뒤.

“…그렇지만, 저만 바라봐 줄 수는 없는 거죠?”

그렇게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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