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 : 같은 마음 (4)
***
도서관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도서관 특유의 은은한 조명과 책 특유의 냄새, 그리고 조용한 공간에 작게 울려 퍼지는 종이 넘기는 소리.
도서관에 가면 기분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은은한 조명도, 익숙한 책의 냄새도, 마음을 차분하게 해 주는 종이 넘기는 소리도 차갑게 가라앉은 마음에 어떠한 위안도 되어 주지 못했다.
우울한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눈을 돌려 보겠다고, 억지로 활자에 시선을 주었지만, 갑자기 난독증이라도 생긴 것처럼, 글자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두어 시간을 버티다, 결국 한 시가 조금 넘어서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바람이나 쐬자는 핑계로 도서관을 나왔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인문관 올라가는 도로가 벤치에 앉아 있었다.
지수와 이별하고, 마치 세상이라도 무너진 것 같은 표정으로 사람들을 피해 홀로 앉아 시간을 보냈던 벤치에 오랜만에 앉아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한심했다.
수십 년을 함께 했던 가족도 아니고, 1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의 여자 친구였을 뿐인데, 고작 헤어짐이었을 뿐인데, 그때는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청승을 떨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쓴웃음이 나온다.
지금은 뭐 다른가? 한심하긴 지금도 마찬가지. 아니, 지금이 더하지.
누군가 보았다면 실연당해서 또 궁상떨고 있다고 비웃음을 사도 할말 없는 모습 아닌가.
물론 변명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좋아하고, 고백하고, 거절당한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서현 씨와 사귀고 싶다고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니라고, 진실을, 그동안 외면하고 있던 진실을 확실히 하기 위함이라고.
“…젠장할.”
나도 모르게 그렇게 감정이 소리의 형태로 튀어 나온다.
나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는데,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는데, 그냥 나대로, 내 마음 가는대로 살아왔을 뿐인데!
작은 어르신! 그놈의 작은 어르신!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젠장!”
나는 결국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욕설을 내뱉고야 말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이 더러운 기분을 참아 내지 못할 것 같았다. 지금 기분 같아서는 그냥 마구 소리 지르고 싶었다.
남들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마구 욕설을 내뱉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소리내어 욕설을 퍼부어 봤자,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으니까.
***
몇 안 되는 단어였지만, 그렇게라도 속에 있는 말을 뱉어 내고 나니, 막혔던 숨구멍이 조금은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고작 조금 더 편하게 숨을 쉬는 정도지, 오전 내내 내 마음을 짓눌렀던 응어리가 풀렸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당분간은 이 우울한 기분이 내 마음속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지금 이 우울한 기분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시간이 약이라고 하던데, 괜찮아질 때까지 계속 이렇게 찌질하게 있어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자 예전에 고향 선배 하나가 해 줬던 말이 떠올랐다.
-왜 그럴 때 있잖아. 마음이 답답하고 짜증 날 때, 생각이 계속 끊이지 않고 내 머릿속에서 스트레스를 계속 만들어 낼 때. 내가 노력해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냥 죽겠다는 마음으로 노력 해 볼 텐데,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뭐 하나 바꿀 수 없는 그런 상황. 그럴 때는 그냥 걷는 거야. 어디라고 목적지를 정해 놓지 않고, 그냥 발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계속 걷고 또 걷는 거야. 그렇게 한 열 시간 정도 걸으면 머릿속이 싹 비워진다. 걷기 전까지만 해도 머릿속을 헤집던 걱정거리는 생각도 안 나고, 그저 힘들다. 힘들어 죽겠다. 그 생각밖에 안 든다니까. 그렇게 몸을 제대로 혹사한 다음, 더 이상은 못 걷겠다 싶을 때, 집에 가서 샤워하고 밥 먹고 잠자는 거지.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게 무슨 헛짓거린가 싶었는데, 지금은 엄청 매력적으로 들린다. 괜찮을 것 같다고, 아니,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이 기분을 바꿀 수만 있다면, 10시간 걷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았다.
일단 걸을까? 어디로 갈까? 아니, 목적지 따위는 아무런 상관없지. 그냥 일단 교문 밖으로 나갈까?
그렇게 마음을 먹고 막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 주머니 속 휴대 전화가 울렸다.
-오빠 저 지금 출발해요. 2시 4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그렇게 제자리에 선 채로 잠시 동안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지금 출발한다는 지연이의 메시지가, 마치, 조금 더 이성적으로 판단하라는 말처럼 느껴졌다.
‘셔틀 타면 연락 줘.’
그렇게 답을 보내고, 다시 벤치에 앉았다.
뭐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게 없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다시 휴대폰 진동이 느껴졌다.
지연이겠지. 알겠다는 그런 이야기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전화기를 확인하는데, 예상하지 못한 이름이 알림 창에 떠 있었다.
-혹시 통화 괜찮으세요?
윤기훈이 보낸 메시지였다.
***
무시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훈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은 누구와도 만나거나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지연이야 조금 특별한 경우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까지 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평상시에 따로 연락을 하지 않던 기훈이 녀석이 통화를 하자고 했다면, 일상적인 안부를 묻기 위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용건이 있다는 이야기다.
-여보세요?
짧은 통화 연결음이 울리고 바로 기훈이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무슨 일 있어?”
-안녕하세요? …형.
안녕하냐고? 아니, 전혀 안녕하지 못한데.
“어. 뭐. 그래. 너는? 별일 없지?”
-네.
“그래. 무슨 일인데?”
-다름이 아니고…. 혹시 언제 시간 괜찮으신지 물어보려고요.
“시간? 무슨 시간?”
-저녁 식사를 대접해 드리고 싶어서….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기훈이 목소리에는 조심스러움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런 녀석의 목소리 톤과 저녁을 먹자는 이야기에 나는 순간 짜증이 솟구치는 느낌을 받았다.
저녁? 고작 그런 의도로? 지금 내 상황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고작 밥을 먹자고 전화를 했다고?
사실 나도 알고 있다. 기훈이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다.
잘못은 나에게 있는 거다. 편협하고 삐뚤어진 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나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 때문에 짜증이 더욱 증폭된다는 것도.
나는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셨다.
침착하자. 어린애처럼 굴지 말자.
“…기훈아.”
-네.
“미안한데, 저기. 지금….”
내가 지금 상황에서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차분한 톤으로 말을 이어 가려 하는데, 전화기 너머에서 잠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누구랑 같이 있나?
-잠시만요. 형. 할머니 바꿔 드릴게요.
전화기 너머에서 그런 말이 들려온다.
할머니? 기훈이 할머니?
그리고 이어지는 할머니의 목소리.
-한수 학생. 통화 괜찮아요?
“네? 네. 괜찮습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건강하시죠?”
나도 모르게 목소리 톤이 올라간다.
-그럼요. 요즘은 마음이 편해서 그런가 아프지도 않아요.
“아. 다행입니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분명히 조금 전 터질 것 같이 짜증이 솟구쳤었는데, 할머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내 마음을 잠식했던 어두움과 짜증이 일순간 흩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 기훈이가 말을 제대로 전달을 못 하는 것 같아서 내가 전화기를 뺏었어요. 지금 통화 괜찮아요?
“아. 네. 괜찮습니다.”
-다른 게 아니라, 한수 학생 시간 좀 내 줬으면 싶어서요. 맛있는 거 해 주고 싶어서.
“네? 네. 그런데, 왜 갑자기….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아이고. 내 정신 봐라. 나도 이렇게 머리가 깜빡깜빡한다니까. 다름이 아니라 기훈이 아빠 퇴원 결정이 내려졌어요.
“…퇴원이요?”
-담당 의사 선생님께서 퇴원해도 될 것 같다고. 이제 통원 치료 받으면 될 것 같다고 그렇게 말해 줬대요. 글쎄.
“아. 정말이요? 와. 다행이네요. 축하드립니다.”
-정말 이게 다 학생들 덕이에요. 한수 학생, 창회 학생, 승환 학생 등등. 내가 너무 고마워서, 진짜 밥이라도 한 끼 대접해 주지 않으면 정말 천벌을 받을 것 같아서, 그래서 기훈이에게 얼른 전화해 보라고 그랬어요.
“아. 네. 아닙니다. 저희가 뭐 한 게 없는데….”
-아이고. 자꾸 이야기가 길어지네. 바쁜데, 미안해요. 한수 학생은 언제 시간 괜찮아요?
“저는 언제든 괜찮습니다. 언제든.”
그렇게 말하고 아차 싶었다.
언제든 괜찮다니. 당분간 안 괜찮을 것 같은데.
-그래요? 그럼 오늘 저녁은 어때요?
할머니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
전화기 너머로 오늘 저녁은 너무 급작스럽다는 기훈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늘 저녁…이요?”
-미안해요. 늙은이라서 그런지 마음이 급해서. 그래도 빨리 대접해 주고 싶어서, 미안해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마음이 느껴진다. 정말로 기쁘고, 그 기쁨을 같이 나누고 싶어 하신다는 마음이.
“…네. 오늘 저녁 괜찮습니다.”
-아이고. 다행이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한수 학생.
“아닙니다. 제가 더…. 감사합니다.”
-그래요. 뭐 먹고 싶어요?
“저는 다 좋습니다.”
-알겠어요. 보잘것없는 솜씨지만 그래도 한번 열심히 준비해 볼게요.
“네. 아니, 너무 많이 준비하시진 마시고.”
-알았어요. 그럼 다시 기훈이 바꿔 줄게요.
그렇게 할머니와의 정신없는 통화가 끝나고 다시 기훈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죄송할 것 없어. 다행이다. 축하한다.”
-…네. 감사합니다.
“그래. 그럼 너는 오늘 저녁에 시간 되는 거야?”
-네. 관장님께 말씀드렸어요.
“헬스장?”
-네.
“그래. 그러면, 창회나 다른 녀석들은?”
-형에게 먼저 연락드렸어요. 시간 정해 주시면 다른 형들에게 맞춰서 전화하려고….
전화기 너머로 흘러들어 오는 기훈이의 말을 듣고서 나도 모르게 작게 웃어 버렸다.
이 녀석, 나한테는 맨날 데면데면하면서 창회랑은 무슨 피를 나눈 형제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붙어 다니더니, 그래도 나에게 가장 먼저 전화했다는 사실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알았어. 전화해 봐. 아마 다들 별일 없을 거야. 아버님 소식 전해 주면 일 있어도 시간 낼 거고.”
-네.
“그럼 이따가 보자. 언제 갈까?”
-네. 아무 때나 편할 때 오세요.
“그래. 그럼 한 7시 정도에, 아니. 7시까지 갈게.”
-네.
“그래. 그럼 이따가 보자.”
-아. 저기 잠시만요.
전화기 너머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려온다.
“응?”
-혹시 지연이 누나하고, 그분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
“…그분?”
-부동산 계약할 때 서류 봐 주셨던….
서현 씨 이야기다.
“…내가 물어봐 줄게. 지연이도.”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따가 뵐게요.
그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끊어졌다.
나는 통화가 끝난 전화기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한참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