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 : 같은 마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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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 씨가 대답해 주었다. 같은 마음이라고, 나와 같은 마음이라고.
어쩌면 기대했을지 모를 대답을 들었지만, 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녀의 대답이 내 이야기에, 내 진심에 모든 것을 포괄하는 ‘yes’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속단하고 기뻐하기에, 그녀의 눈동자에 일렁이는 슬픔이 너무 짙었으니까.
서현 씨는 그 슬픈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면서 천천히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처음에…. 한수 씨의 거처를 옮겨도 된다는 어르신의 허락이 떨어졌을 때, 할아버지가 한수 씨 옆에서 보필하는 임무를 맡기려던 사람은 사실 제가 아니라 저희 오빠였어요.”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 준다.
“할아버지가 오빠에게 했던 부탁은 지금처럼 같은 집에서 거주하는 방식은 아니었어요. 그저 곁에서 지켜보고, 자주 연락드리면서, 한수 씨가 불편하지는 않은지, 필요한 것은 없는지, 또는 한수 씨가 무언가를 요청하면 그 요청 사항을 해결하거나 전달하는 그런 방식이었어요.”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인의 관점에서 봤을 때, 아니, 애초에 나를 옆에서 모신다는 것부터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지만, 상식선에서 생각했을 때, 그런 방식이 가장 적합하다.
그런데. 어떻게 강우현 그분이 아니라 서현 씨가, 그것도 같은 집에서 지내게 된 것일까?
“그런데 제가 하겠다고 했어요. 제가 작은 어르신을 모시겠다고. 같은 집에서….”
서현 씨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고개를 살짝 숙여 시선을 피한다.
“저희 엄마에게 이야기 들으셨다고 들었어요. 제가 왜 그랬는지….”
“네.”
서현 씨가 왜 나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저번에 어머님을 만났을 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서현 씨는 내가 그 사실을 안다는 사실이 부끄러운지, 시선을 피한 채로 계속 말을 잇는다.
“할아버지는 안 된다고 하셨어요. 그렇게 쉽게 생각하고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다 큰 손녀가 아무리 작은 어르신이라고 해도 외간 남자와 같은 집에서 지내는 것이 걱정되셔서 그런 것이라는 것을 저도 알고 있었어요.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엄마도 반대하셨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 입장이라도 반대했을 것이다. 아니, 단순히 반대에서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소중한 손녀를, 막내딸을 다른 남자와 한집에서 살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할아버지와 엄마가 반대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어요. 알고 있었지만 고집을 부렸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에게 고집을 부렸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할아버지 말씀이 맞았을지도 몰라요.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반쯤은 호기심에 기반한 그런 마음으로. 하지만….”
서현 씨는 고개를 들어 올린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한다.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으니까, 오랫동안 상상만 해 왔던, 한수 씨를 직접 만나고, 가까이서 지켜보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었기에, 고집을 부리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나는 서현 씨가 말한 ‘마지막 기회’라는 단어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일단은 서현 씨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 보기로 했다.
“한수 씨와 같은 공간에서 머무는 상황에 대해 걱정을 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죠. 저도 알고 있으니까요. 한수 씨 나이대의 남자들이 욕망에 얼마나 충실한지. 하지만 믿어 보기로 했어요.”
“…누구를?”
“우선은…. 어르신이요.”
“우리… 할아버지요?”
“네. 어르신이라면, 제가 아는 어르신이라면, 만에 하나 제가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지켜보고만 계시지 않으실 거라고. 그렇게 믿어 보고 싶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라면 분명히 그럴 것이다. 혹시라도 내가 서현 씨에게 더러운 마음을 품었다면, 그리고 설사 그 더러운 마음을 실행으로 옮기려 했다면, 할아버지가 모를 리가 없고, 그리고 절대로 그것을 두고만 보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한수 씨도 믿어 보고 싶었어요.”
“…….”
“네. 제가 알고 있던 한수 씨,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그 한수라는 사람은 욕망에 흔들릴 사람이 아니라고, 근거는 없었지만 믿어 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제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때 확신할 수 있었어요.”
“그때라면….”
“한수 씨가 같이 지낼 수 없다고 말했던 그때요.”
“…….”
“우리가 같은 집에서 지내게 될 거라고 말했을 때, 한수 씨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나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죄송하지만, 귀엽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래서 그 얼굴이, 그 표정이 더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조금 더 놀래켜 주고 싶었어요. 그랬는데, 잘못된 생각이었어요.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보여 드릴 때, 그때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어요.”
나는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서현 씨가 주차장 한쪽에 주차되어 있던 배기량 4천 CC의 검은색 스포츠카를 소개해 줬을 때, 2억 원이 넘어가는 그 스포츠카가 내 차라고 말해 줬을 때, 내 마음속에 떠올랐던 생각은 ‘이건 아닌데…’였었다.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차를 바라보던 한수 씨를 보면서, 그제서야 저도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느끼게 되었어요. 한수 씨 말이 맞아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한 사람으로서가 아닌, 작은 어르신으로서의 한수 씨만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제가 한수 씨를, 아니, 한수 씨가 아닌 작은 어르신을 모시는 상황이라면 같이 지낼 수 없다고 말씀하셨을 때, 제가 무엇을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를 깨달았어요. 부끄러웠어요.”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기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제 생각이 맞아서, 제가 알고 있던, 상상해 왔던 한수 씨가 맞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서….”
서현 씨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작게 숙인다.
“그날 이후, 저도 한수 씨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작은 어르신이 아닌 한수라는 이름을 가진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친구를 만나고 친구들과는 어떻게 지내는지, 뭘 하면서 노는지, 그런 사소한 것들이 궁금해졌어요. 그리고 그 모습을 보게 되었어요. 한수 씨가 선배 아버님을 대하는 모습을.”
진철이 형 아버님 이야기였다.
“한수 씨가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어요. 어떤 생각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어렴풋이 이해하고는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내심 있었어요. 그랬는데, 병원에서 선배의 아버님을 만났을 때, 아무런 주저함 없이 능력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평소에는 저나 할아버지에게 최대한 신세 안 지겠다는 태도를 견지하는데, 큰 이해관계도 없는 선배를 위해서, 할아버지와 고모부에게 고개 숙여 부탁하는 모습을 보면서, 확실히 이 사람은 제가 아는 일반적인 사람들하고는 다르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
“그때도, 나쁜 사람들에게 습격받고 수술까지 받을 정도로 심하게 다쳤는데, 한수 씨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참 마음이 올곧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한수 씨가 조금 전, 기훈 씨 아버님 이야기를 하셨지만, 그런 한수 씨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저도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냥 단순히 치료 시설을 찾아 주는 데 그쳤을 거예요. 하지만 한수 씨의 모습을 보면서, 혹시나 기훈 씨나 할머님의 마음이 다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한수 씨의 모습을 보면서, 저도 한수 씨처럼 생각하고 싶었어요. 조금 더 깊고 넓은 마음으로. 그렇게.”
“…….”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한수 씨를 이성의 관점에서 바라보지는 않았어요. 죄송해요. 어릴 때부터 제가 한수 씨에 대해 가졌던 생각은 말썽꾸러기 남동생 같은 이미지가 강했었기에…, 그때까지만 해도, 동생을 지켜본다는 그런 시선이었어요. 그랬는데, 할머니 마음 상하지 않게, 눈을 맞추며 다정스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한수 씨를 보았을 때…. 처음으로 한수 씨가 제 마음에 스며드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리고 창회 씨 생일….”
서현 씨는 그렇게 말하고 작게 미소 짓는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날을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아니, 절대로 그날 밤을 잊을 수 없어요. 창회 씨와 어머님을 위해 준비된 선물이었지만, 저도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어요. 그리고 확신했어요. 내가 이 사람을, 작은 어르신이 아닌, 한수라는 이 남자를 좋아하고 있구나.”
서현 씨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
“그래서 보여 주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우리 엄마에게, 내가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남자를 보여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수라는 건 알고 있었어요. 한수 씨에게 실례가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알면서도 반쯤은 한수 씨의 놀란 얼굴을 보고 싶다는 장난스러운 마음으로, 그리고 반쯤은 한수 씨가 용서해 줄 거라는 근거 없는 기대감으로 일을 벌였어요.”
서현 씨 눈동자에 미안함이 떠오른다.
“죄송해요. 그때, 제멋대로….”
서현 씨가 그렇게 사과한다.
“저도 그래요.”
나는 서현 씨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네?”
“저도 그날 어머님과 같이했던 저녁 식사.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이 되었어요.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고마워요.”
“나도 고마워요.”
그렇게 말하고 우리 두 사람은 잠시 동안 말없이 서로의 발끝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아직 서현 씨에게는 해명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날 밤 이야기.
“그날 밤은….”
서현 씨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여전히 시선은 아래로 둔 채로.
“제 마음에 솔직하고 싶었어요. 솔직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나는 그렇게 말하는 서현 씨를 바라본다.
마치, 그날 밤이 아니면 다시는 마음에 솔직해질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그리고 나는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마지막 기회’라는 단어처럼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알고 있으면서도….”
“왜 안 되죠?”
내가 물었다.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서현 씨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그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픈 눈으로 말없이 날 바라보고만 있다.
“왜 안 된다는 거죠?”
나는 그런 서현 씨의 눈을 보면서 다시 물어본다.
설사 지금의 내 질문이 그녀를 상처 입게 한다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녀에게서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서현 씨는 한참 동안 내 눈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방울져 뺨을 따라 흘러내리는 순간에.
내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한다.
“제가 한수 씨 곁에 있을 수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