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 : 우울한 꿈
“다녀왔습니다!”
나는 현관문을 열고 그렇게 말했다.
“다녀…오셨어요? 이게 다 뭐예요?”
현관까지 마중 나온 서현 씨가 내 품에 안긴, 무언가가 가득 담긴 라면 박스를 보고는 그렇게 물어본다.
“아, 이거요? 먹을 게 좀 남아서….”
처음 지연이네 집 앞에서 식료품을 차에 실을 때부터 ‘좀 많은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기는 했었다. 리조트에 도착해서 짐을 풀었을 때, 좀 많은 거 아닌가 했었던 의문은 ‘진짜 엄청 많네’라는 확신이 되었고.
나름 열심히 먹는다고 먹었는데, 그래도 왕창 남아버렸다. 그래서 이렇게 n분의 1을 해서 집으로 들고 온 거지.
“어머, 이건 뭐예요?”
서현 씨는 그렇게 말하며 라면 박스 안에 들어있던 반찬통을 집어 든다.
“아. 그거는 창회 고모님께서 싸주신 밑반찬이요.”
음식이 무슨 은행 예금처럼 이자가 붙는 것도 아닌데 처음 갈 때보다 더 늘어난 이유가 바로 창회 고모님께서 싸주신 반찬 때문에 그렇다.
사실 우리가 생각해둔 계획은 이러했다.
오늘 아침, 그러니까 여행 마지막 날 아침에 있는 걸 다 때려 넣고 아침밥을 해 먹자고. 최대한 짐을 줄여보자. 뭐 그런 계획을 세웠더랬다. 원래 엠티 마지막 날 아침은 전날 굽다 남은 고기나 먹다 남은 햄, 소시지 같은 거 다 때려 넣고 끓여 먹는 김치찌개가 국룰 아니던가.
그랬는데, 오늘 아침 갑작스럽게 창회 할아버님과의 조찬 간담회가 잡혀버린 거다. 할아버님께서 직접 리조트까지 오시겠다고 하시는데, ‘안 되겠는데요? 저희 먹을 게 너무 많이 남아서 그거 먹어야 되겠는데요?’ 그럴 수는 없는 거지.
그래서 아침에 소비할 식재료가 그대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거다.
거기에 창회 큰고모님께서 사람 수에 맞춰서 김치랑 밑반찬까지 가져다주셨으니 내려갈 때보다 올라올 때 짐이 더 늘어버린 거다.
서울 올라와서 다시 챙겨보니 한 사람당 라면 한 박스씩 분배가 된 거고.
“어머. 이거는 깻잎찜이네요. 이거 만드는 거 은근히 귀찮고 번거로운데.”
서현 씨가 반찬통 하나를 집어 들며 그렇게 말한다.
아, 그거는요. 제가 첫날 할아버님하고 점심 먹을 때 깻잎찜 엄청 맛있다고 막 재롱떨었는데, 고모님이 그거 기억하시고는 저 따로 싸주신 거예요.
-친척 집에 있다며? 눈치 보여서 밥은 제대로 먹기나 하겠어?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저만 따로 싸주셨어요, 라고 말하는 대신 그냥 머리 긁적이며 웃어 보였다.
“다행이에요. 안 그래도 마트 가려던 참이었는데.”
서현 씨는 그렇게 말하며 박스에서 식료품을 하나씩 꺼낸다. 라면이 나올 때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지만.
“그나저나 여행은 어떠셨어요? 재미있었어요?”
서현 씨가 물어본다.
“네. 즐거웠어요.”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
“저 오빠 좋아해요.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려 숙소로 돌아가는 지연이의 뒷모습을, 나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붙잡아야 했다, 붙잡아서 지연이가 건네준 진심, 마음속 깊숙한 곳에 간직하고 있던 진심에 대한 답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끝끝내 나는 지연이를 붙잡지 못했다.
그렇게 서서, 지연이가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뒤늦게 다시 숙소로 돌아갔을 때, 지연이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승환이와 농담을 주고받고, 유라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지연이의 모습은 평상시와 전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중훈이와 민주가 다시 숙소로 돌아와서 부끄러움 가득한 얼굴로 두 사람이 이제 단순한 선후배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을 때, 누구보다 밝은 얼굴로 민주를 축하해주는 지연이의 모습에서 어떠한 위화감도 찾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말이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평상시의 지연이와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단 한 번도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으니까.
***
“한수 씨?”
“…네?”
“무슨 생각 하세요?”
“아…. 아니에요.”
“피곤하신가 봐요.”
“네. 뭐. 조금.”
“음. 그러면 일단 좀 쉬세요. 저녁에 따로 약속 있거나 그런 건 아니시죠?”
“네. 없어요.”
“그러면 오늘은 이걸로 저녁 먹어요. 오랜만에 제대로 된 집밥 먹을 수 있겠네요.”
서현 씨가 반찬통을 들어 보이며 그렇게 말한다.
***
육체적으로는 그다지 피곤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랬는데, 내 방으로 들어와 그냥 잠깐 누워있겠다고 생각했다가, 어느새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떠 보니, 어느새 오후 7시가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잠을 자고 일어났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안개에 뒤덮인 것처럼 희뿌연 불쾌감으로 가득했다.
낮잠을 잤다고 해도 피로가 풀리는 깊은 잠은 아니었고, 괜히 컨디션만 떨어트리는 수면질 낮은 선잠이었으니까. 단순히 선잠도 아니고, 어딘가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 꿈이 동반된, 그런 기분 나쁜 선잠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있는 상태 그대로 조금 전 꾸었던 꿈의 파편을 하나씩 줍기 시작했다.
전체적으로 어떤 꿈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았다.
그저, 지연이와 서현 씨가 나왔다는 것. 그리고 그 두 사람이 슬픈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그런 이미지만이 어렴풋하게 떠올랐고, 꿈에서 그 둘과 무엇을 했는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었을까? 왜 그런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을까?
내가 실망시켰으니까. 두 사람에게 실망을 안겨주었으니까.
무슨 실망을?
기억해내려 했지만, 그 뒤로는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어나야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계속 누워서 그 꿈을 되새기다가, 나중에 그 꿈에, 불편함과 불쾌감에 잠식되어버릴 것 같은 공포감이 들었으니까.
***
식탁 위에는 창회 고모님이 싸주신 밑반찬들과 여행에서 남은 식재료로 만든 요리가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식탁 맞은편에는 서현 씨가 젓가락을 든 손을 멈춘 채로 내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머. 그러면 중훈 씨도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다는 거네요?”
나는 서현 씨에게 이번 여행 기간 중 가장 큰 화젯거리였던 중훈이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그렇죠. 그 녀석도 바보가 아닌 이상, 민주가 자기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은 알았을 테고, 그러니까 ‘혹시?’ 그런 생각을 안 할 수는 없었겠죠. 하지만 그 녀석 입장에서 바로 자기도 마음이 있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던 거구요.”
“지연 씨 때문에요?”
“그렇죠. 미련이 남았다거나 그런 건 아닌데, 스스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너무 마음이 가벼운 것이 아닌가 하는.”
내 말에 서현 씨는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사실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에요. 당연히 그런 생각하는 게 맞고. 하지만 그런 생각에 발목 잡힐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렇게 말해줬어요. 너 그렇게 가벼운 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아무도 없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우리는 그런 생각 안 한다. 마음 가는 대로 해라.”
“그래서요?”
“그랬는데, 그 타이밍에 민주가 찾아왔고, 그래서 두 사람이 따로 이야기를 하러 사라졌고요. 나중에 둘 다 얼굴 새빨개져서 오더라구요. 그런 두 사람 얼굴 보니 물어볼 필요도 없겠더라고요.”
“안 놀렸어요? 한수 씨 친구들이라면 가만히 안 있었을 것 같은데. 특히 승환 씨는.”
서현 씨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평소에 승환이 욕을 너무 많이 했나 보다.
뭐, MSG를 안 쳤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그렇다고 없는 말 지어내서 한 적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마음 같아서는 중훈이 녀석을 밖으로 끌고 나가서 주리라도 틀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숨김없이 모두 고하라!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분위기라는 게 있으니까요. 두 사람이 이제 막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었는데, 바로 당장 그러는 건 좀 그렇잖아요. 더군다나 민주는 후배라고는 해도 아직 그렇게 장난칠 정도로 친하다고 하기도 그렇고. 뭐, 암묵적으로 그런 합의가 이루어진 거죠. 나중에 하자, 민주 없을 때. 뭐 그렇게 하고 일단 넘어갔어요.”
“주리를 틀기는 틀겠다는 말이네요.”
“하기는 해야죠. 항상 했는데.”
“뭐였죠? 사문위원회였나요? 그게 또 열리는 건가요?”
“그렇겠죠. 이번에는 인민재판일지도.”
서현 씨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웃는다.
“한수 씨 친구분들 이야기 들을 때마다 부럽다는 생각이 들어요.”
서현 씨가 그렇게 말한다.
“네? 어떤 부분에서요?”
“저는 그런 대학 생활 못 해봤으니까요.”
“어땠는데요? 서현 씨는?”
“저는… 음. 공부한 기억밖에 없어요.”
“공부요?”
“네. 빨리 학위 따고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었거든요.”
“…유학 생활 힘들었어요?”
“사실 힘들지는 않았어요. 아무래도 저는 다른 유학생들보다는 경제적인 지원을 많이 받았으니까, 다른 건 신경 안 쓰고 공부만 하면 됐거든요. 집안일 도와주시는 이모도 계셨고. 유학 생활이 힘들었다기보다는….”
거기까지 말한 서현 씨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하더니.
“그냥. 좀 뭐랄까요. 외로웠달까?”
이렇게 말한다.
“외로웠다고요?”
“네. 친구도 있었고 주변에 사람이 없던 건 아닌데, 그런데도 좀 외롭다는 기분이 항상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냥 그랬어요.”
서현 씨는 그렇게 말하고 작게 웃는다.
그리고 그런 서현 씨의 미소정에서 나는 서현 씨가 더 이상 그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
표면적으로는 평상시와 같은 일요일 저녁이었다.
서현 씨가 저녁을 준비했고, 뒷정리와 설거지는 내가 했다.
저녁을 먹고 언제나처럼 산책을 나갔고, 산책을 다녀온 후 거실에 앉아서 차를 마셨다.
그렇게 산책을 하고 차를 마시면서 우리는 평상시처럼 서로의 일상을 공유했다.
창회에게 속아 해발 800m가 넘는 산에 올라간 이야기라든가, 그런 김창회가 우리 몰래 연애를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처럼 여행 중에 있었던 소소한 이야기를 서현 씨에게 해주었고, 서현 씨도 주말 동안 본가에 가서 할아버지하고 저녁을 먹었고,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서 시간을 보냈다는 그런 소소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평상시와 다름없는 모습을 잘 꾸며냈다고 생각했었다.
마음속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나만이 알고 있는 고민과 생각들을 잘 감추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일요일 밤의 의식을 마치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려고 하던 그때, 서현 씨가 이렇게 물어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혹시 여행 중에 무슨 일 있으셨어요?”
나는 서현 씨를 돌아보았다.
서현 씨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요. 특별한 일 없었어요.”
나는 그렇게 말했다.
대답을 들었지만, 서현 씨는 말없이 내 눈을 바라보고만 있다.
마치, 내 마음속 깊은 곳을 지켜보고 있기라도 한 듯, 그렇게 내 눈을 바라만 보고 있다.
“한수 씨, 혹시… 아니에요. 알겠어요. 쉬세요.”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표정을 하던 서현 씨는 그렇게 말하고 날 놓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