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 후회 (8)
“괜찮아?”
“네?”
“속. 괜찮냐고.”
“네. 괜찮아요. 저 술 많이 안 마셨어요. 오빠는요?”
“나도 많이 안 먹었어. 어제 많이 마셔서 그런가 오늘은 잘 안 들어가네.”
“저도요. 그냥 술 마시는 것보다 도란도란 앉아서 이야기하고 싶어요.”
“확실히 어제 너무 달렸어.”
“그것도 있지만, 등산이 너무 힘들었어요.”
“아오, 그래. 등산! 김창회 그 망할 자식!”
“그래도 다녀오고 나니까 기분 상쾌하던데요? 땀도 많이 흘려서 피부도 좋아진 것 같고.”
“행여나 창회 앞에서 그런 말 절대로 하지 마. 나중에 언제 또 끌려갈지 몰라요.”
“그건 좀…. 아무튼 확실히 알았어요.”
“뭐를?”
“창회 선배가 왜 멤버 중 한 사람인지.”
“승환이 친구라고 해줘. 그리고 따지고 보면 지연 씨도 우리 멤버 중 한 명입니다만?”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생각보다 괜찮기는 한데, 그냥 취하려고 술 마시는 것보다는 재미있는 이야기 하다가 깔끔한 컨디션으로 잠들었으면 좋겠어요.”
“하긴, 내일 또 몇 시간 차 타고 올라가야 하니까.”
“우리는 그냥 자면 되는데, 운전하는 선배들이 걱정이네요. 오빠도 운전하죠?”
“나도 하겠지? 상황 봐서 천천히 올라가면 되지 뭐. 가면서 맛있는 것도 먹고. 먹는 이야기 했더니 갑자기 탄수화물이 땡기네. 지연 씨는? 지금 괜찮아? 배 안 고파?”
“네. 저는 안주 계속 주워 먹었더니 배는 안 고파요. 그리고 지금 배고픈 게 문제가 아니라 큰일 났어요.”
“뭐가?”
“어제오늘 너무 많이 먹었어요. 집에 가면 진짜 제대로 다이어트해야 될 것 같아요.”
“지연 씨도 다이어트를 해요?”
“그럼요. 여자들에게 다이어트는 자원채집 퀘스트 같은 거예요. 절대로 끝이 없어요.”
“…지연 씨가 가끔 그런 비유를 들 때마다 생각하는데, 니네 오빠가 참 나쁜 영향을 주었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 오빠 나빴죠.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했어요. 맨날 자기 캐릭터로 자원 채집해 놓으라고 시키고. 학교 끝나고 집에 오면 그날의 할당량이 컴퓨터 앞에 붙어있었어요.”
“…진짜 나빴다.”
“그쵸? 그때는 저보고 ‘어이. 매크로!’ 그렇게 불렀다니까요.”
“…너 초등학생 때?”
“네.”
“와. 진짜 나빴다.”
“그래도 항상 미웠던 것만은 아니었어요. 던전도 데려가 주고, 아이템도 챙겨주고. 물론 자기 거 다 먹고 나서 남은 거 챙겨준 거였지만…. 생각해보니 진짜 나쁜 오빠였네요.”
“…그나저나 몰랐네. 지연이도 다이어트 같은 거 하는 줄은.”
“해야죠. 조금만 방심하면 금방 살이 붙어요. 특히 기말 때 공부할 체력 보충한다고 막 먹었더니, 살 붙어서 방학하고 진짜 열심히 다이어트했어요.”
“…내가 보기엔 전혀 그런 느낌 없었는데?”
“있어요, 안 보이는 데. 보이는 곳까지 찌면 그때는 진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된 거예요.”
“…참 여러모로 힘들겠구나, 여성 동지들은.”
“그러니 앞으로 신경 써 주세요.”
“어떻게 신경 써드리면 되겠습니까?”
“음. 농담으로라도 ‘요즘 살쪘는데?’ 같은 말 하면 안 되고, 뭐 먹고 있을 때 무신경하게 ‘복스럽게 잘 먹는다’ 같은 말도 하면 안 되고, 얼굴에 뾰루지 같은 거 났을 때도 모른 척해주고. 음….”
“오케이. 대충 알겠습니다. 네거티브한 이미지를 담고 있는 말은 하면 안 된다. 이거죠? 그럼 해줘서 좋은 건?”
“칭찬이죠.”
“예쁘다?”
“네. 근데 그것도 무신경하게 하면 안 돼요. 마음이 담겨 있는지 없는지 여자들은 다 알아요. 예쁘면 어떻게 예쁜지, 그렇게 세세하게 말해주면 좋아요.”
“예를 들어서?”
“음. 뭐. 오늘 입고 온 옷이 예쁘다든가, 머리 새로 하고 왔을 때, 콕 집어서 칭찬해준다든가, 아니면, 향수 뭐 쓰는지 물어봐 준다든가.”
“흐음.”
“어려워요?”
“어려운 건 아닌데, 힘들겠구나 싶어서.”
“힘들다고요? 왜요?”
“지연 씨는 다 예쁘잖아. 그러니까 너 만날 때마다 예쁜 거 하나하나 칭찬해 주려면 시간 엄청 걸릴 것 같은데? 오늘 향기가 좋다. 소주 어떤 거 마셨어?”
“뭐예요.”
“아팟! 너 때리는 강도가 점점 쎄지는 것 같다?”
“아파요?”
“아니. 사실 별로 안 아파.”
“뭐예요. 진짜.”
“아무튼 알겠습니다. 칭찬을 할 때는 마음을 실어서 구체적으로 해라. 맞죠?”
“맞아요.”
“부정적인 말은 하지 말고.”
“네.”
“어렵네.”
“안 어려워요.”
“어려운 것 같은데?”
“오빠는 잘하던데요? 능숙하게.”
“능숙해? 내가?”
“네.”
“그런가?”
“저번에요. 우리 시험 기간에 만났을 때요.”
“식당에서?”
“네, 그때. 그때 저 안경 쓰고 왔을 때 오빠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해요?”
“…귀엽다고.”
“이상해. 그래놓고, 귀엽다고 하니까 이 오빠 뭐야? 왜 이렇게 사람 마음 들었다 놓는 데 능숙해? 그런 생각 들었어요.”
“…그건 난 좀 억울한데.”
“뭐가요?”
“아니. 진짜 귀여워서 귀엽다고 한 건데? 귀여운데, 야. 너 안경 하나도 안 어울려. 당장 벗어! 그럴 수는 없잖아.”
“…….”
“맞잖아. 귀여운 걸 귀엽다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해요?”
“…아무튼, 오빠는 좀 그래요. 가끔 이 오빠 뭐야? 하는 생각이 들고, 선수 같을 때가 있어요.”
“그런가?”
“그래요.”
“그것도 좀 억울한데?”
“뭐가요?”
“아니. 난 뭐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아무튼 그럼 앞으로 하지 말까요?”
“아니. 뭐 꼭 하지 말라는 그런 건 아닌데….”
“응? 뭐라고요? 잘 안 들리는데요?”
“아니에요.”
“뭐야. 혼자서 쭝얼쭝얼거리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어요?”
“아니라고요. 넘어가요.”
“네에 네에~.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아까 셋이서 무슨 이야기 한 거야?”
“아까요?”
“어. 유라랑 민주랑 셋이서.”
“무슨 이야기 했을 것 같아요?”
“…중훈이?”
“네.”
“어떤 얘기 했는데?”
“비밀이에요.”
“뭐 대충 알 것 같기는 한데… 맞구나? 웃는 걸 보니.”
“비밀이에요.”
“그나저나 민주도 대담하네. 거기서 중훈이에게 잔을 들이밀 줄은 몰랐어.”
“몰랐어요?”
“어. 이번 여행 와서도 중훈이에게 특별한 액션이 없어서 별일 없으려나 보다 그랬는데, 갑자기 급진전 되어버리니까.”
“오빠.”
“응?”
“혹시 이야기했어요?”
“뭘? 민주가 중훈이에게 관심 있다는 거?”
“네.”
“아니. 안 했어.”
“진짜요?”
“할아버지를 걸고,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 안 했어.”
“그렇구나.”
“왜? 누가 나한테 들었대?”
“아니요. 그건 아닌데….”
“아닌데?”
“그냥, 중훈 선배가… 뭐랄까, 아까 전에 느낌으로는 눈치를 조금은 채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모르면 바보지.”
“네?”
“가장 괜찮다 싶은 사람에게 잔 주세요! 그랬는데, 중훈이에게 잔 내밀었잖아. 아니, 뭐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 싶어도, 그다음에 얼굴 빨개져서 그러고 있으면 누가 봐도 다 알지.”
“그럼 중훈 선배는 그 전까지는 몰랐던 거예요?”
“음….”
“뭐예요? 그 ‘음…’은?”
“나도 비밀.”
“네?”
“여자들끼리의 이야기도 비밀이니까, 남자들끼리의 이야기도 비밀.”
“쳇. 치사해요.”
“하나도 안 치사해요. 남녀평등이라는 게 그런 거예요. 동등한 권리와 동등한 의무, 거기에 신체 능력에 따른 배려. 하지만 지금 이 사안은 신체 능력에 따른 배려 카테고리는 아니라고 생각되는데요?”
“가끔 오빠랑 이야기하고 있으면….”
“있으면?”
“우리 오빠랑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그건 되게 나쁜 평가 같은데?”
“맞아요.”
“아, 그건 싫은데….”
“싫으면 이야기해 주세요. 아무에게도 말 안 할게요.”
“그럼 지연 씨도 이야기해 주세요. 저도 아무에게도 말 안 할게요.”
“오빠 먼저요.”
“내가 먼저 말하면 지연 씨도 말해주겠다?”
“가능성이 있다 정도로 하면 안 될까요?”
“장부일언허인천금불역(丈夫一言許人千金不易).”
“그게 뭐예요?”
“장부는 한번 약속을 하면 천금을 준다 하여도 어기지 않는다.”
“…저는 장부 아닌데요?”
“사람을 지칭하는 대명사죠. 장부 아니라면 어겨도 된다는 생각은 양성평등이 당연히 받아들여지는 지금에는 시대착오적인 발언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애초에 그 말귀 자체가 시대착오적인데요?”
“그건 어쩔 수 없어. 북송 시대 때 나온 글귀니까.”
“북송이요? 무슨 책인데요?”
“자치통감.”
“…진짜 오빠는 별걸 다 알고 있네요.”
“칭찬 고맙습니다. 아무튼, 이야기해 줄 거야?”
“들어보고요.”
“참으로 고집 쎄네.”
“쫄리면… 죽으시던지.”
“어머. 얘 봐라? 그런 험한 말 누구에게 배웠어?”
“오빠요.”
“나?”
“정확히는 오빠들이요.”
“…이건 변명의 여지가 없네.”
“그쵸?”
“알았어. 약속 지켜라.”
“넵!”
“중훈이는 대충 눈치채고 있었어.”
“…그래요?”
“어. 고마음 영화 보던 날, 둘이 따로 만나서 밥 먹었다고 하더라고.”
“그래요?”
“몰랐어?”
“네. 못 들었어요.”
“그래? 아무튼, 둘이서 그렇게 따로 밥도 먹고, 깨톡도 계속 주고받고. 그러다 보니까 중훈이도 바보가 아닌지라 그런 생각을 하고는 있었다고 하더라. 혹시? 그렇게 말야.”
“근데 왜 아무런 행동이 없었을까요?”
“지연 씨 때문에.”
“저요?”
“아니야. 농담이야. 아니, 농담이 아닌가? 음… 정확히 설명하면… 그냥 돌리지 않고 얘기할게. 예전에 중훈이가 너한테 마음이 있었잖아.”
“…네.”
“그게 마음에 걸렸던 것 같아. 중훈이 말로는 아직 너에게 그 뭐랄까? 미련이랄까? 미련은 좀 적합한 단어는 아닌 것 같고…. 아무튼 좋아하는 마음이 아직 남아있는 건 아닌데, 중훈이 입장에서는 얼마 전까지 널 좋아한다고 그렇게 말했다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또 민주에게 관심이 간다고 말하는 게 좀… 가벼워 보이는 것 같달까? 그런 생각을 했다더라고.”
“…그랬군요.”
“중훈이 입장에서는 그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지. 나라도 그랬을 것 같아. 스스로가 너무 가벼운 사람 같아 보이고. 남들에게도 그렇게 보일까 봐 그게 신경 쓰이기도 하고, 뭐 그런 상황이니까. 더군다나 민주는 지연이 친구니까 더 조심하게 되고.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네.”
“그래. 뭐 그런 이야기 했지. 좀 더 웃긴 이야기도 있는데 그건 나중에 해줄게.”
“혹시 2억 원이요?”
“응?”
“민주가 누구 좋아하는 건지 가지고 2억 원 내기 거셨다면서요?”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아?”
“유라 언니가 이야기해 줬어요.”
“최유라가?”
“네.”
“최유라가 어떻게…가 아니라, 박찬희 이 입 싼 놈 같으니.”
“비밀이었어요?”
“아니. 뭐. 비밀까지는 아닌데… 그렇다면, 아까 최유라가 이야기해 준 거야? 셋이 있을 때?”
“네.”
“흐흠. 그거 민주가 들었으면 기분 나쁠 수도 있었겠는데.”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나쁘다기보다는?”
“걱정했었어요. 오해를 살까 봐.”
“오해? 어떤 오해?”
“자기가 진짜 오빠 좋아하는 걸로 오해하면 어떻게 하지? 같은 걱정이요.”
“아….”
“유라 언니도 그렇게 생각했었대요, 처음에는.”
“그렇게? 민주가 나에게 관심 있다고?”
“네.”
“아오. 이 똥멍청이들.”
“…사실 저도 그랬어요.”
“응?”
“처음에 민주가 오빠들이랑 노는 거 재미있냐고 물었을 때, 혹시 오빠에게 관심 있는 건가? 그런 생각 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