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 : 후회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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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용히 중훈이가 해주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요약해서 이야기하면 중훈이는 민주하고 예전부터 따로 꾸준히 깨톡을 주고받고 있었단다.
그렇다고 관계의 급격한 진전을 가져온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고, 민주가 처음 우리랑 같이 어울린 그 날, 중훈이가 민주를 집에까지 데려다줬고, 민주가 ‘데려다줘서 고마웠다’고 깨톡을 보낸 이후에 자연스럽게 깨톡을 주고받게 됐다는 거다.
뭐 대단한 내용이 있었던 건 아니란다.
밥 먹었냐? 친구 만난다.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다 같은 그런 일상적인 깨톡이었고, 그래봤자 하루에 한두 번 정도, 많아도 서너 번을 넘지는 않았다고.
나는 몰랐네. 민주가 우리 단톡방에 들어와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민주하고 개인적으로 톡을 주고받거나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알기로는 승환이나 창회도 따로 깨톡을 주고받거나 하지는 않았을 거다.
찬희? 그랬다간 죽었겠지. 최유라에게.
아무튼, 그렇게 개인적인 깨톡을 주고받게 되니까 중훈이 입장에서는 혹시?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는데, 이중훈답지 않게 자기 마음을 잘 컨트롤했다는 거다.
“괜히 오바했다가 또 분위기 이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씁쓸한 얼굴로 그렇게 말한다.
우리 중훈이. 성장했구나. 성장했어. 역시 극복할 수 있는 상처는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구나.
아무튼, 그렇게 지내던 와중에 둘이서만 따로 만나는 일이 생겼다는 거다.
고마음 영화를 볼 때 말이지.
중훈이 말로는 다른 의도는 없었단다.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고마음 영화를 그냥 다 같이 보고 싶다. 그 정도 생각이었지.
그때 영화를 어디에서 보느냐 가지고 한참을 실랑이하다가 결국에는 용산에서 보는 걸로 결정이 되었는데, 민주가 중훈이에게 따로 깨톡을 보내, 그날 좀 일찍 만날 수 있겠냐고 물어봤다는 거다.
일단 이중훈 입장에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도서관 가서 공부하는 거 말고는 딱히 할 일도 없으니까.
알겠다고 좋다고 했고, 그래서 둘이 따로 용산에서 미리 만나서 점심을 먹었는데, 그때 내 이야기가 나왔다는 거다.
“내 이야기가 나왔다고? 어떤 거?”
“지수에 대해서.”
지수랑 어떻게 사귀게 되었는지, 헤어지고 괜찮은지. 이런 걸 대놓고는 아니고 은연중에 물어보더란다.
내가 민주 마음을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 민주가 알고 싶어 한 건 CC가 깨지고 나서의 후유증이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중훈이 녀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거지. 대신, 민주 이 녀석도 한수에게 관심이 있구나. 그렇게 넘겨짚었던 거고.
“또 질투심에 사로 잡혔었겠구만.”
내 농담에 이중훈이 쓰게 웃고는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그렇게 내 이름이 나오니까, 또 지연이 같은 그런 상황인가 싶어서 조금 더 마음을 단단하게 먹었단다. 밀당하는 건 아닌데, 깨톡이 오거나 해도 확대해석하지 않고, 괜히 오해 살 일 없게 조심했다고.
“…그랬는데. 점점 민주 쪽에서 먼저 나에게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야. 최대한 보수적으로 생각하려고 하는데도 나도 사람인지라 ‘혹시… 나한테 관심 있나?’ 하는 생각이랄까, 기대감이랄까 아무튼 그런 게 자꾸 드는 거야.”
중훈이는 의외로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간다.
그리고 그제, 우리 여행 떠나기로 한 날이 결정적이었다는 거지.
전날 깨톡만 한두 시간 넘게 계속했단다. 특별히 감정을 내보이거나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일상적인 이야기, 다음 날 여행 가는 이야기로 대화가 계속 끊이지 않고 이어졌고, 그러다가 민주 어머님께서 음식을 따로 해주신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거다.
사실 고기, 그거 무거워 봤자 얼마나 무겁겠어? 기껏해야 2~3kg이지. 김창회라면 새끼손가락 하나로도, 아니지, 그 자식이라면 손 안 대고도 들고 올 수 있을 무게다. 여자라고 해서 못 들 무게가 아니지.
이중훈도 그 생각을 했단다. 들어준다고 하면 괜히 내가 오바하는 건 아닐까?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
그랬는데, 스스로에게 ‘아니야. 이건 그냥 예의상 하는 말.’이라고 주문을 걸고. 무겁겠네. 내가 들어줄까? 그렇게 말을 했는데, 민주가 그랬다는 거다.
‘괜찮아요. 별로 무겁지 않아요. 안 들어주셔도 되는데…. 그러면 내일 중간에서 만나서 같이 가실래요?’라고.
그 순간 중훈이의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은 거지.
다행히 직접 얼굴을 보고 이야기한 것도 아니고, 전화 통화도 아니어서 그런 감정을 잘 감추고. ‘그래. 그럴까? 어차피 가는 길이니까 내가 목동 쪽으로 갈게.’라고 했고, 민주가 알겠다고, 고맙다고 하면서 두 사람이 같이 오게 된 거란다.
아무튼 그 일이 있고 난 후, 자꾸 민주에게 시선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고 그렇게 말해주었다.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나는 잠시 말없이 이중훈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잠시 동안 바라보다가,
“근데 왜 민주가 나한테 관심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 건데?”
그렇게 물었다.
이중훈은 자기가 생각해도 부끄러운지, 괜히 애먼 머리만 긁적이고 있다.
“…처음에는 그냥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말을 시작한다.
***
-민주 말이야. 왜 우리랑 같이 어울리는 걸까?
-왜 불편해?
-아니, 불편한 건 아니고,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서.
-무슨 느낌?
-뭔가 목적이 있는 거 아닐까?
-목적? 무슨 목적? 민주가 뭘 노리고?
***
“처음에는 민주가 혹시 나에게 호감이 있는 거 아닌가?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했는데?”
“…차마 입 밖으로 안 나오더라고. 그 말이.”
“그래서 내 이름을 꺼냈다?”
“뭐….”
이중훈이 그렇게 말하고 머리를 긁적인다.
이제 알겠네. 왜 방어기제 어쩌구 같은 소리를 했는지.
“일단 너 나한테 한 대 맞자.”
내가 그렇게 말했다.
이중훈은 쓴웃음을 짓더니.
“그래. 뭐, 처맞아도 할 말 없다.”
그런다.
진짜 그냥 한 대 쳐버릴까 싶었는데, 또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사람 때리면 안 되지.
“이 새끼야. 그건 방어기제가 아니지. 비겁한 거지.”
나는 주먹 대신 팩트로 이중훈을 후두려 쳤다.
이중훈은 할 말 없는지 고개만 끄덕인다.
“…말을 못 꺼내겠더라. 괜히 나만 또 우스운 놈 될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한다.
나는 그런 중훈이에게 뭐라 한마디 더 해줄까 하다가 그냥 담배 두 개비 꺼내서 중훈이 하나 물려주고 불을 붙여줬다. 나도 입에 물고.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담배만 피웠다.
“그래서 어쩔 건데?”
담배가 반쯤 재로 변했을 때 나는 담배를 비벼 끄고는 중훈이에게 물었다.
“…뭐가?”
“민주. 아니, 니 마음.”
이중훈은 대답 없이 꽁초로 변한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 후. 바닥에 비벼 끄고는.
“담배 한 대 더….”
“그만 펴. 임마. 너 진짜 토한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중훈이는 작게 웃고는 다시 먼 곳을 바라본다.
나는 채근하지 않았다. 그저 잠자코 중훈이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잘 모르겠어.”
이중훈이 말한다.
“…모르겠다?”
“어. 잘 모르겠어. 민주가 부족하다든가 마음에 안 든다든가 그런 건 아니야. 민주 물론 예쁘고 착하고, 이야기해보니 마음도 깊고, 말도 잘 통하고. 그런데 뭐랄까….”
“…혹시 지연이 때문에?”
내 말에 중훈이가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본다.
“아니. 그건 아니야. 지연이에게 미련이 남았다든가 그런 건 아니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어.”
그렇게 정색하면서까지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일단 잠자코 있었다.
“민주 때문이 아니고 나 때문이지.”
“니가 뭐?”
“…민주도 알고 있더라고 내가 지연이 좋아했었던 거.”
“근데?”
“얼마 전까지 지연이 좋다고 그러고 다녔는데, 이제 와서 마음이 바뀌었다고, 다른 사람에게 호감이 있다고 말할 수 있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벼운 놈처럼 비춰질 것 같아서 두렵고, 아니, 내 스스로가 나 너무 마음이 가볍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중훈이의 말을 들으니, 이제 완전히 이해가 갔다. 왜 조금 전 방어기제라는 단어를 썼는지, 왜 주저하고 있는지. 이제야 중훈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짜 가벼운 놈들은 그런 생각 안 해.”
내 말에 중훈이가 날 바라본다.
“나 너 좋아해. 너는? 별로? 오케이. 빠이. 그러고 다른 사람 찾아가지. 그런 고민 안 한다고.”
내 말에 이중훈이 작게 웃는다.
“이렇게 저렇게 쓸데없는 생각 해봤자, 생각대로 되는 거 하나도 없다.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해. 그렇게 해도 너 가벼운 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 중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 그냥 솔직하게, 마음 가는 대로 그렇게 말하고 까여. 남자답게.”
“…까이는 걸로 끝나는 거냐?”
“나야 모르지.”
그렇게 말하는 날 이중훈은 말없이 바라보다가 피식 하고 웃는다.
“하나만 물어보자.”
“뭔데?”
“너 혹시….”
이중훈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주저한다.
“뭔데? 말을 하다 말어? 물어봐. 오늘은 다 대답해줄게. 씨바 돈도 2억이나 벌었는데.”
“…받을 거냐?”
“들어봤냐?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 일구이언이부지자(一口二言二父之子).”
“그거 패드립인데.”
“그럼 장부일언허인천금불역(丈夫一言許千金不易)이다, 이 자식아.”
“그 정도면 장부 아니라고 하면 되는 거네.”
“소인배의 삶을 사시겠다?”
“돈이 2억이니까.”
“하긴, 2억이면 소인배 할 만하지. 그래서, 물어볼 게 뭔데?”
“혹시, 너 지연이랑….”
“몰래 사귀고 있냐고?”
“어.”
“아니.”
나는 그렇게 말해준다.
“내가 찬희냐? 비밀로 하고, 어차피 다 뽀록 날 거.”
내 말에 이중훈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왜? 혹시….”
“너 때문에 그런 거냐고?”
“어.”
“아니야 임마. 우리 중훈이 자의식 과잉이네.”
“그럼 왜?”
“뭐가?”
“너도 좋아하잖아. 지연이.”
이중훈이 그렇게 말한다.
“…….”
중훈이의 말에 처음으로 내 말문이 막혔다.
좋아하잖아. 그 말에 긍정도, 그렇다고 부정도 할 수 없는 내 마음이 있었다.
“혹시 나 때문이라면 안 그래도 되는데. 그런 건 아니지?”
“…아니야.”
“그럼 혹시 그때 지연이 그 말 때문에?”
“무슨 말?”
“그때 지연이가 그랬잖아. 당장 사귀고 싶은 건 아니라고.”
중훈이의 그 말에 내 의식이 몇 달 전 그날로 되돌아간다.
***
-철없는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는데, 제 솔직한 마음은 당분간 지금 같은 상황이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한수 오빠가… 그… 특별하게 좋기는 한데, 지금 당장 사귀고 싶다거나, 남자친구가 되어서 나만 바라봐 줬으면 좋겠다거나, 이런 마음은 아닌 것 같아요. 그저 조금 더 알고 싶고, 조금 더 말하고 싶고, 조금 더 자주 집에 같이 가고 싶고….
과방, 축제가 끝나고 선배들이 사준 피자를 먹고 있던 그날, 지연이가 나에 대한 마음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던 그날.
지연이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한수 오빠도 좋아하지만 다른 선배… 오빠, 언니들도 좋아요. 유라 언니는 원래 좋아하는 언니였지만, 이번에 같이 요리 팀 하면서 속정 깊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됐고, 중훈… 오빠는 저 신경 써 주시는 거,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고요. 찬희 오빠도, 창회 오빠도 항상 무서운 표정 짓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 1학년들 만나면 캔 커피라도 하나 챙겨 주려고 마음 써 주는 것도 잘 알고 있고요. 그런 부분들에서 선배들도 좋아해요.
-기침과 좋아하는 것은 숨길 수 없다고 하니까. 한수 오빠도 좋아하지만, 한수 오빠보다, 지금 선배들과 함께 이렇게 피자 먹는 게 더 좋아요. 그래서. 그냥…. 제가 한수 오빠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지금 우리 동기들과 선배들, 이렇게 지내는 게 저는 참 좋은 것 같아요. 그래서. 뭐. 좀. 이상한 이야기인데, 당분간은 이렇게 지냈으면 하는 게 솔직한 마음이에요. 그냥. 이 이야기도 드리고 싶어요.
***
“혹시 지연이가 그때 한 말 때문에 그런 거라면, 한수 너,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중훈이의 목소리에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그게 무슨 말이야?”
“지연이 마음도 생각해 보라는 말이야.”
“지연이 마음?”
“그래. 지연이가 먼저….”
그렇게 중훈이가 막 말을 꺼내려다 멈추었다.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조금 전, 밖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유라, 지연이 그리고 민주였다.
“이야기하는 중에 미안한데. 잠깐 중훈이 좀 빌려가도 될까?”
유라가 그렇게 말한다.
유라 옆에 민주가 고개 푹 숙이고 있는 걸 보니, 세 사람도 이야기를 통해 무언가 결론을 내린 것 같다.
“…나?”
이중훈이 또 그렇게 바보 같은 말을 한다.
“데려가. 우린 이야기 다 했어.”
내가 그렇게 말하자 이중훈은 잠시 날 보더니 고개 끄덕하고는 여자애들 쪽으로 몸을 돌린다.
그리고는 민주하고 단둘이서만 다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한다.
나하고 유라, 지연이는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면서 작게 웃었다.
“담배 폈어?”
유라가 물었다.
“어.”
“끊는다며?”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그랬나?”
“찬희에게나 뭐라고 그래.”
“끊었어, 찬희.”
“그래?”
“어.”
“과연 끊었을까?”
“끊게 될 거야. 담배든 목숨이든 둘 중에 하나는.”
유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주먹을 꼭 쥔다.
불쌍한 우리 찬희. 아니다. 이번 기회에 끊으면 좋지. 좋지도 않은 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난 먼저 들어간다.”
유라가 그렇게 말한다.
먼저 들어간다고?
“너무 늦지 않게 들어와.”
유라가 지연이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 숙소 쪽으로 걸어간다.
그렇게 나는 지연이와 단둘이서 멀어져 가는 유라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