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224화 (224/271)

224 : 후회 (4)

***

왜 그런 날이 있잖아. 더 자고 싶은데, 더 자야 하는데, 한번 잠에서 깨면 더 잠들기 힘든 그런 날.

오늘이 딱 그랬다. 잠이 부족한데, 조금 더 자고 싶은데, 한번 잠에서 깨어나니까 더 잠잘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어제 술자리를 정리한 시간이 새벽 2시 조금 넘어서 정리하고 양치하는 데 한 30분 걸렸다고 치면, 남자 방 들어와 자리 잡고 누운 게 한 2시 반 정도 됐을 거다.

누웠다고 바로 잠든 것도 아니지. 머리가 아파서 조금 끙끙거리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었는데, 그놈의 두통 때문에 깊게 잠들지도 못했고, 얕은 잠마저도 그리 오래 자지 못했다.

안 떠지는 눈을 겨우 뜨고 시간을 확인하니 7시가 조금 넘었다. 아우. 네 시간 정도 잔 건가?

이게 다 섞어 먹어서 그런 거다. 같은 양의 알콜을 섭취해도 주종이 섞이면 어쩐지 숙취가 더 심해지는 느낌이다. 이것도 어디 영국 대학교에서 연구 안 했으려나?

…잠깐만. 나는 방법이 있잖아? 나만 사용할 수 있는 숙취 해소 방법이 있네? 신력 쓰면 단박에 괜찮아지는 거잖아?

괜찮아져라 머리머리! 사라져라 두통두통! 그러면 바로 괜찮아지겠지? 쓸까? 신력 써버릴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게 평소에도 막 쓰고 다녔다면, 아무런 부담 없이 그냥 써버렸을 텐데, 나도 잘 안 쓰다 보니 주저하게 되는 게 있다.

생각해 보면 신력을 몇 번 쓰지도 않았다. 일단 처음에 능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고속버스에서 시험 삼아 써봤고, 그다음에 지연이가 잠가놓은 사물함 열 때 썼고, 진철이 형 아버님 뵈었을 때랑, 그리고 우리 제이슨 미국으로 도망가려고 할 때 써봤고.

그리고 또 있었나? 맞다. 승환이 그 자식에게 보여준다고 시간아 멈춰라 했었지. 창회 어머님께서 차려주신 밥 먹을 때, 그때도 열심히 먹겠다고 버프 한번 썼었다.

또 없지?

아, 김민우 발기부전도 있구나.

갑자기 궁금하네? 김민우 어떻게 지내는지. 치료 열심히 받고 있는지, 어떤지 모르겠다. 그거 승환이 삼촌에게 여쭤보면 바로 알려주실 텐데.

아니지,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제가 김민우에게 발기부전의 저주를 걸었는데, 혹시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봐 주실 수 있나요?’ 그렇게 물어보라고? 완전 미친놈 되는 거지.

아무튼,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일곱 번 사용했구나.

그렇게 따져보니 또 적은 것도 아니네. 할아버지에게 가업을 이어라라는 말을 들은 게 1학기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서였으니, 5개월 사이에 일곱 번이면… 적은 건 아닌데?

흐음. 이거 자꾸 치트키 쓰는 버릇 들이면 안 되는데….

그래도 이거 하나는 당당하다. 나는 개인적인 욕망을 충족하고자 능력을 쓴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만약 내가 진짜 내 욕심 채우겠다고 능력 썼으면, 서현 씨 방 몰래 훔쳐보고, 시험 기간에 공부 하나도 안 하고 에이쁠로 다 깔고 그랬지.

제이슨이랑 김민우? 그건 일종의 사회정의 구현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내 개인감정이 아예 들어가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본질은 조금 더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고 싶은 숭고한 대의에 있다.

절대 내 개인의 치졸한 복수심 같은 거 아니다. 아닐 거야. 아마.

아무튼,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숙취를 제거하는 것이 과연 내 개인적인 욕망을 충족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한번 천천히 생각해 볼까?

일단 이익과 손해의 관점에서 보면, 숙취가 사라지는 것이 나에게는 이익이 되나?

예스.

일단 이 그지 같은 두통에서 빠져나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지.

그럼 타인의 손해로 이어지나?

아니지.

시험 성적을 조작하면 다른 피해자가 나오지만, 내가 숙취가 없어진다고 다른 사람 숙취가 더 강해진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잖아?

타인의 이익이 될 수도 있나?

있지.

내가 먼저 정신 차린 후, 숙취에 허우적거리는 친구들, 후배들을 도와줄 수 있다면 이건 공리(公利)의 관점에서도 맞지. 나의 행복이 모두의 행복이 되는 거죠? 그렇죠? 벤담 선생님?

거기까지 결론을 내리니 더 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네.

괜찮아져라 머리머리! 사라져라 두통두통!

속으로 그렇게 막 말하려던 그 순간 어제 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한 선택이었으니까, 책임도 내가 지는 거지.’

어제 ‘학교 내에서 사귀는 것’이라는 화두를 던졌던 민주에게 내가 잘난 척을 하면서 그렇게 말했었지.

성격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선택에는 책임이 뒤따른다는 부분에서 결국 본질은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임이란 단어에는 꾸짖는다는 의미의 ‘꾸짖을 책(責)’ 자가 들어간다. 그런데 이 ‘責’ 자가 원래는 갚아야 하는 빚의 의미로 사용되었었다. 그렇게 사용되다가 빚을 재촉하다, 꾸짖다, 책임 같은 의미로 바뀌었고, ‘責’ 자에 사람인 변을 붙여 만들어진 ‘債’ 자가 지금 빚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책임, 빚. 갚아야 할 채무.

사실 내가 능력을 사용해 숙취를 없앴다고 해도 누군가에게 그 대가를, 채무를 갚아야 할 이유는 없다. 기껏해야 할아버지에게 혼나는 정도겠지. 할아버지가 경고한 ‘천지 만물과 삼라만상’을 주재하는 것도 아니니, 기껏해야 왼손 스트레이트 정도겠지.

그렇지만, 책임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후, 신력을 쓰려던 마음이 급격하기 식어버린다.

할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신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사람이니까. 스물한 해를 사람으로 살았고, 그래서 아직도 사람으로서 생각하니까.’

에이, 괜히 쓸데없는 말을 했었네. 그래도 뭐 그게 솔직한 마음이기는 하니까.

그래서 그냥 이 숙취를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능력 있다고 자꾸 써봤자 나쁜 버릇만 들지. 그리고 내가 감당 못 할 책임도 아니고 말이지.

그래. 사람답게 살자.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사람답게 살자. 여태 수많은 유혹도 잘 넘겨왔는데 고작 이깟 숙취 때문에 치트키 쓰면 너무 뽀대가 안 나. 남자가 가오가 있어야지.

일단 물 마시자. 숙취엔 물이다. 혈중 알콜농도를 낮추자.

그런 생각으로 주방으로 가서 물을 한 컵 따라 마시고 있는데, 남자 방에서 박승환이 엄청나게 괴로운 얼굴로 비실비실 나에게 걸어온다.

그리고는.

“한수야.”

날 부른다.

“왜? 물 줘?”

“물 말고.”

“그럼 뭐?”

“그거 해줘.”

“그거? 뭐?”

“버프. 숙취 해소 버프 넣어줘.”

이 지랄을 한다.

나는 그런 박승환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 녀석의 머리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은 후.

‘우리 승환이. 폭풍설사 했으면 좋겠네.’

그렇게 생각했다.

신력 쓴 거 아니다. 그냥 생각만 한 거다. 생각만.

***

상황을 보니 다른 녀석들도 한 11시나 되어야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여서 물 마시고 다시 누워 자려고 했는데, 그럴 수 없었다.

아니, 나뿐만 아니라 다른 녀석들도 8시 반쯤에는 전부 다 일어나야만 했다.

창회 고모님이 오셨거든. 아침밥 먹으라고.

고모님이 직접 아침밥을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은 아니고, 가져오셨다. 정확히 말하면 고모님과 함께 오신 리조트 직원분들께서 음식을 포장해 우리 숙소로 가져다주신 거다.

투숙객들에게는 리조트 본관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조식이 제공되는데, 고모님 생각에 알아서 가서 먹어라, 하시면 술 많이 먹은 우리들이 십중팔구 안 갈 것 같으셨던 거다.

그렇다고 또 그냥 냅두면 아침을 거르거나, 라면이나 끓여 먹을 것 같아서 직접 케이터링해 오신 거지.

창회네 집안 규칙이란다. 아침은 절대 거르지 말 것.

“…대단들 하네요. 역시 젊어서 그런가.”

고모님께서 벽 한쪽에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빈 병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씀하신다.

아, 부끄럽다.

“생각 없어도, 그래도 한 숟가락 먹는 것과 안 먹는 것 차이가 커요. 안 들어가도 국물이라도 꼭 마시고.”

그런 말씀을 남기시고는 고모님은 떠나가셨고, 어제 결전의 장소였던 거실에는 밥, 된장국, 그리고 몇 가지 반찬이 세팅되어 있다.

“…가져오신 정성 생각해서 한 숟갈이라도 뜨자.”

내가 그렇게 말했고, 다들 ‘아. 먹기 싫은데.’ 그런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나는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웬만하면 아침 챙겨 먹는 스타일이긴 한데, 요즘 애들은 아침 잘 안 먹지. 특히 여자애들은 더 안 먹고.

유라, 지연이, 민주도 아침 잘 안 먹는 스타일인지 다소 부담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는다.

하긴, 어젯밤에 소주, 양주 짬뽕에 틈*라면 다섯 개를 끓여 먹었는데, 지금 속에 뭐가 들어가겠어?

“어머?”

국을 한입 떠먹은 유라가 그렇게 말한다.

“어머. 어머.”

민주도 그렇게 반응한다.

배추가 들어간 맑은 된장국. 확실히 때깔부터 ‘너의 속을 편하게 해주겠노라’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나도 숟가락을 들어 한입 떠먹어보았다. 국물을 입에 머금었는데….

하숙집 주인 할머니 생각이 난다.

진한 멸치 육수에 깊은 맛과 된장의 조화가 술 잔뜩 먹고 들어오면, 다음 날 아침 등짝 스매시와 함께 ‘무슨 놈의 술을 얼마나 처먹은 거냐? 으이구.’ 하시며 해장국을 내어주시던 하숙집 할머니가 생각난다.

꿀떡하고 삼키자, 식도와 위장이 1945년 8월 15일의 민중들처럼 ‘해장이다! 속이 풀린다!’ 그렇게 만세를 부른다.

와, 진짜 좋네. 진짜 좋다. 역시 한국인은 국물이지.

나뿐만 아니라, 부담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던 녀석들 전부 오르가즘 느끼는 표정을 하고 국물을 쪽쪽 빨아 먹고 있다.

한 사람만 빼고.

“…가, 갑자기 배, 배가.”

박승환이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우연이야, 우연. 완벽한 우연.

***

“오빠, 우리 오늘은 뭐 해요?”

지연이가 물어본다.

“오늘? 쉬어야지.”

내가 말했다.

사실 계획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기왕 차를 빌려서 여기까지 왔으니, 주변을 좀 돌아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이야기를 하기는 했었다.

우리가 유적답사를 하는 사학과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 지역을 갔을 때만 방문할 수 있는 사찰이나 문화재를 구경하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거든.

찾아보니 이 지역에 향교나 읍성 같은 문화재도 있고, 가깝다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우리나라 대표 삼보사찰 중 하나인 통도사도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어서 한번 가볼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런 생각을 했는데, 술 많이 먹었더니 ‘문화재는 무슨, 미래를 바라봐야지.’ 그런 생각밖에 안 든다.

“그냥 쉰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어디 가까운 데라도 갔다 오자.”

유라가 그렇게 말한다.

“나 지금 운전 못 해.”

화장실에 들락날락한 후, 반쯤 시체가 되어 누워 있는 박승환이 그렇게 말한다.

“나도. 지금 음주 측정하면 면허취소 수치 나올 거 같은데?”

나도 그렇게 말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지연이나 유라 이야기 들으니, 또 그냥 이렇게 가만히 있는 건 좀 그렇다 싶다.

“그럼 이건 어때?”

듣고만 있던 김창회가 끼어든다.

“어떤 거?”

“나 초등학교 다닐 때 소풍 가던 공원이 근처에 있거든. 거기 가서 가볍게 산책하고 올까? 멀지도 않아. 차 타고 10분 정도.”

창회가 그렇게 말한다.

“좋다. 가자. 우리도 소풍 가자. 너도 좋지?”

최유라가 그렇게 가장 먼저 찬성을 외친 후 박찬희에게 물어본다.

“…어. 응. 조, 좋지.”

의결권 따위는 없는 박찬희가 그렇게 대답한다.

지연이와 민주도 유라 따라서 바로 찬성한다.

솔직히 나는 그냥 쉬고 싶다는 마음이 컸는데, 소풍이라는 단어를 들으니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든다.

알콜 해소는 맑은 물과 깨끗한 산소로! 좋네.

“나 운전 못 한다고.”

박승환이 그렇게 말하자,

“셔틀버스 있으니까 태워달라고 하면 돼. 한번 가보자. 진짜 괜찮아. 거기.”

창회가 그렇게 말한다.

평소 뭐 하자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법이 없는 김창회 녀석이 저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진짜 좋은가 보다.

뭐 우리가 운전할 필요도 없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창회 의견에 따르는 분위기가 만들어졌고, 우리는 가벼운 복장과 마음으로 숙소를 나왔고, 그렇게 해발 851m의 산을 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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