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222화 (222/271)

222 : 후회 (2)

***

“…진짜 엠티 끝나면 바로 다이어트다.”

최유라가 그렇게 말하며 쌈을 입으로 가져간다.

그런 말을 할 거면 쌈이라도 작게 싸든가, 도대체 쌈 안에다가 고기를 몇 개나 넣은 거냐!

다른 상황 같았으면 바로 ‘동작 그만. 지금 고기 빼기냐?’ 그렇게 말하고 손목을 잡아챘겠지만, 오늘은 봐주기로 했다.

왜냐하면 지금 테이블 위에 고기가, 음식이 넘쳐나고 있거든.

일단 우리가 사 온 삼겹살은 아예 꺼내지도 못했다.

민주 어머님이 만들어주신 불고기에, 거기에 창회 고모님이 따로 싸주신 보쌈에 모둠전 같은 음식만 올려놨는데도, 벌써 테이블이 가득 차 있다.

“괜찮아. 고기랑 채소는 살 안 쪄.”

찬희가 그렇게 말하면서 유라 앞으로 고기를 퍼 나른다.

아주 열부(烈夫) 나셨어.

“그런데 니네 둘 좀 전에 어디 갔다 온 거냐?”

이중훈이 그렇게 묻자, 열심히 고기를 나르던 찬희가 움찔한다.

“응? 아, 아까?”

당황한 얼굴로 그렇게 말을 더듬는다.

이 자식아. 너는 법 지키며 살아라. 행여라도 나중에 범법 저지르고 걸리면 바로 납작 엎드려서 있는 대로 다 자백하고. 얼굴에 다 티가 나니까.

“어디 가긴, 잠깐 둘이서 데이트하고 왔지. 너는 눈치 없이 그런 걸 묻냐.”

반면에 최유라는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당당하게 그렇게 말한다.

역시 상여자 최유라!

“유라 니가 이해하라. 중훈이 저 녀석이 센스가 없잖냐.”

승환이가 그렇게 중훈이이게 핀잔을 준다.

“아니, 나는 그런 게 아니고. 그냥 갑자기 안 보이니까 걱정이 되어서….”

이중훈이 그렇게 핑계를 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센스 없는 이중훈 선생 확정이다.

아무튼, 이야기하는 걸 들어보니, 아까 내가 낮잠 자는 사이에 몇몇은 산책한다고 나갔었는데, 그때 최유라하고 박찬희 둘이서만 어디로 사라졌었나 보다.

어디 갔겠어?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 하면서 걷다가 으슥한 곳에서 뽀뽀나 하고 왔겠지.

뭐 이해는 한다. 지금 한창 둘만 같이 있고 싶을 때니까.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절대 넘어갈 수 없다.

커플 염장질에 대한 치졸한 질투 같은 건 아니고, 박찬희 저 자식에게는 갚아야 할 빚이 있거든.

작년 속초 여행 때, 내가 지수랑 잠깐 놀다 왔을 때, 찬희 저 자식이 아주 쌩난리를 쳤었더랬다. 단체 여행에서 개인행동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며 당장 해수욕장에 십자가를 세워야 한다고, 화형식을 열어야 한다느니 그러면서 선동한 녀석이 다름 아닌 박찬희 저 자식이다.

너는 까먹고 있을지 몰라도 나는 그날 너의 모습을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고. 이 자식아!

그냥 이렇게 두루뭉술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면 그건 오산이다. 징계위원회든 사문위원회든 재판장이든 인민재판이든 무조건 열어야지. 하늘의 그물은 성근 것 같아도 다 걸리게 되어있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후배들 있는데 괜히 쓸데없는 소리 했다가는 질투에 눈이 먼 쪼잔한 인간이라는 소리나 듣겠지.

시기가 문제가 아니야. 방법이 문제지.

***

뭉뚱그려서 ‘술 게임’이라고 부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안에는 엄청 다양한 세부 카테고리를 가지고 있다.

일단 80년대 학번들도 했었다고 하는 우리 고유의 전통 놀이 ‘아이엠 그라운드’ 계열이 있고, ‘더 게임 오브 데쓰’, ‘순신 백’처럼 100% 운에 따라 좌우되는 운발 게임도 있다. 007빵이나 두부 게임, 눈치 게임 같은 건 순발력 카테고리에 들어가고, 369나 고백 점프, 구구단을 외자는 두뇌게임 계열이다. 베스킨라빈스 써리원도 수열 규칙이 적용되니까 두뇌게임 쪽이라고 할 수 있고. 그리고 ‘사랑해’나 ‘똥쌌다’처럼 논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무근본 게임도 있다.

대충 내가 아는 것만 해도 한 스무 개는 되겠네.

이런 술 게임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 얼마나 능숙하게 하느냐에 따라 그날 술자리의 컨디션이 좌우한다.

뭐, 말로는 ‘하면서 배우면 된다.’고 하지만, 몇 번 걸려서 쭉쭉쭉 원샷 몇 번 때리면 그때부터는 마치 빈곤의 대물림처럼 계속 술을 마시게 되는 거다.

그러면? 어느 순간 필름 끊기고, 아침에 일어나 보면 자기는 기억도 안 나는데, 흑역사가 남아 대대로 전승되는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거지.

그래서 술 게임의 숙련도는 엄청나게 중요하다. 너튜브에 ‘예비 신입생, 아싸 탈출을 위한 대표 술 게임. 이것만큼은 배우고 OT 가라’ 같은 영상이 있는 올라와 있는 게 다 이유가 있는 거다.

그런데 아무리 술 게임 종류를 많이 알고, 능숙하게 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모두가 합심해서 작정하고 한 놈 먼저 보내겠다고 들입다 패버리면 숙련도고 뭐고 아무 소용이 없다.

그리고 오늘의 첫 번째 목표가 박찬희였다.

내가 혼자서 복수하겠다고 그랬던 건 아니고,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찬희를 집중 공략했다. 저 녀석 오늘 너무 깝쳤거든.

지 딴에는 나름 버텨본다고 버텼지만 다구리 앞에 장사 없다고, 소주병 빈 병이 열 병을 조금 넘겼을 때, 박찬희는 ‘최유라 너마저….’라는 말을 남기고 장렬하게 링 아웃 되어버렸다.

그러게, 커플이라고 잘난 척을 하지 말았어야지. 어디서 염장질이야!

그렇게 첫 번째 희생자를 빈방, AKA 영안실에 안치해놓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돌아오니 술자리 분위기가 바뀌어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술 게임은 전투다. 내가 살려면 너가 죽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참호 안의 병사들처럼 술을 못 멕여서 안달이더니, 지금은 1914년 크리스마스의 참호 전선처럼 다들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누구냐? 누가 트리를 들고, 참호 밖으로 나온 것이냐?

“맛있어요!”

민주가 손에 든 잔을 홀짝이고는 그렇게 말한다.

저거구나. 저거였네. 중훈이 손에 들린 위스키 병이 크리스마스트리였었네.

담배를 피우고 오는 동안 이중훈은 분위기를 바꾼다고, 아버님께서 하사해주신 양주를 꺼내 콜라랑 섞어서 한 잔씩 쫙 돌렸나 보다.

“좀 독하지 않아?”

중훈이가 민주하고 지연이에게 묻는다.

“아니요. 전 딱 좋은데요?”

“저도요. 조금 더 찐해도 될 것 같아요.”

민주와 지연이의 반응에 이중훈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우후훗 하고 웃는다.

웃기네. 저 자식. 세상에 잭콕만큼 만들기 쉬운 칵테일이 어디 있어? 위스키 찔끔 따르고 그 위에 콜라만 부으면 끝인데.

아무튼 다들 1차전에서 술 많이 마셨는데도, 또 콜라를 섞어놓으니까 또 그건 들어가나 보다.

“바텐더, 나도 잭콕 한 잔 주게.”

내가 중훈이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손님. 더블로 드릴까요?”

“오늘은 좀 과한 것 같으니, 온더락으로 부탁하네….”

“죄송합니다, 손님. 얼음이 다 떨어져서 침 뱉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음. 역시. 괜찮네.

사실 안 괜찮을 수가 없지. 콜라가 들어가는데.

알코올 도수 75.5도인 론디아즈 151도 콜라 타면 먹을 수 있다. 이래서 무서운 거다. 자본주의의 검은 똥물이.

그건 그렇고 작년에 속초 여행 때는 돈 없다고 텐트에서 자고, 안주 부족해서 생라면 먹고, 술도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소주로 달렸는데, 맥주도 진짜 아끼고 아껴서 모두가 인정하는 재미있는 이야기 했을 때만 부상처럼 한 잔씩 마실 수 있었는데 말이지.

불과 1년 사이에 고급 리조트에서 고기를 산처럼 쌓아놓고, 잭콕을 마시고 있다. 점심도 되게 훌륭했고.

이거 이거 잘못 버릇 들면 안 되는데. 나야 그렇다고 쳐도, 지연이나 민주가 앞으로 엠티가 계속 이런 식으로 될 거라고 생각하면 곤란한데.

그런 생각으로 후배들을 바라보는데, 마침 민주가 유라에게 말을 건다.

“언니, 저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응? 뭔데?”

“다른 건 아니고요, 찬희 오빠랑 언제부터 사귀었는지 궁금해서요.”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이 어떻게 사귀게 되었는지는 민주는 모르겠구나. 지연이를 포함해 우리는 전부 다 알고 있는데.

그나저나 민주 저 녀석 좀 취하기는 했나 보다. 같이 어울려 놀고는 있지만 여자 선배인 유라는 조금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저렇게 질문하는 거 보니.

“응? 우리? 얼마 안 되었어. 중간고사 끝나고 나서부터 사귀기로 했으니까.”

유라가 시원하게 대답해준다. 뭐 숨길 것도 아니지.

“찬희 오빠가 먼저 고백한 거예요?”

“설마. 내가 먼저 했을까?”

유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뭐 재미있는 기억이라도 떠올랐는지 쿡 하고 웃는다.

민주는 그런 유라를 잠시 동안 바라보다가.

“…걱정 안 되셨어요?”

그렇게 묻는다.

“걱정? 뭐가?”

“친구끼리 그런 사이로 발전하는 거요. 두 분이 작년부터 되게 친한 친구셨잖아요. 그런데 사귀는 건, 뭐랄까, 관계가 바뀌는 거니까….”

민주가 그렇게 말하자 유라도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헤어지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

“네.”

유라도 그랬었지. 걱정했었다고. 나중에, 잘못되었을 때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고.

“학교에서 사귀는 거, 부럽기도 한데, 한편으로는 그런 걱정도 되고….”

민주는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고민하는 듯한 얼굴을 하더니.

“사실… 얼마 전에 학교에서 고백을 받았었어요.”

그렇게 말한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자연스럽게 유라를 바라보았다.

우리 후배이자 최유라의 비밀 조카인 형태가 민주에게 고백을 했다가 까였다고 했었다.

친구와 사귀는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고백 받았다는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그렇다면 고백한 사람이 형태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유라에게 한다? 민주는 형태가 유라랑 친인척 관계라는 것을 알고서 저런 말을 꺼내는 것일까?

유라는 나를 향해 작게 고개를 젓는다. 민주는 모르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겠지.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 해도 친척에게 저런 말을 할까. 그랬다면 저 녀석 진짜 나쁜 사람이다.

“그래? 누구? 혹시 우리 과?”

중훈이가 그렇게 물어본다.

으이구. 이 자식아! 너는 왜 또 눈치 없이 거기서 끼어들어!

“…네. 근데 누구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는 않아요. 그 친구에게 미안하니까요. 죄송해요.”

민주가 그렇게 말한다.

다행이다. 만약 ‘형태였어요. 우리 동기요.’ 그랬으면 진짜 실망할 뻔했어.

“아, 괜찮아. 아니. 당연히 그래야지. 아무튼, 그러면 그 고백한 친구랑 사귀는 게 걱정되어서 거절했다는 이야기?”

중훈이가 묻는다.

“아니요. 이유가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닌데…. 아무튼, 고백 받았을 때, 잠깐 생각해봤거든요. 만약 그 친구랑 사귀게 된다면 어떨까? 그렇게 생각해 봤는데… 만나면서 즐겁고 행복한 것보다 나중에 헤어지게 되면 어떻게 하지? 다른 친구들도 있는데 어색해지면 어떻게 하지? 그런 걱정이 먼저 들더라고요. 그리고 학교에서 사귀다 헤어지면, 남보다 못한 사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있고…. 그래서 CC를 한다는 게 단순히 좋다고 해서 쉽게 결정할 게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민주가 그렇게 말하는데 친구 놈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한다.

뭘 봐. 이 자식들아.

“나도 그런 고민 했었어.”

유라가 그렇게 말한다.

“고민 안 할 수가 없지. 찬희, 물론 1년 넘게 알고 지낸 친구 사이고. 혹시라도 잘못되면 그나마 친구 사이로 지내지도 못하게 되고. 차라리 그냥 지금까지 지내왔던 것처럼 친구로 지내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당연히 그런 생각을 안 할 수는 없지. 없는데….”

유라는 그렇게 말하며 찬희가 누워있는 방을 슬쩍 바라본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지금의 마음에 충실하자.”

“…지금의 마음이요?”

“나중에 잘 안 될 수도 있지. 잘 안 되고, 민주가 말했던 것처럼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될 수도 있는데, 그건 가능성 있는 미래지, 지금 현재는 아니니까. 지금의 나도 찬희를 좋아하고, 찬희와 같이 있고 싶고, 그러니까 나중에 후회하게 되면 그때 후회하고, 일단 지금의 마음에 집중하자. 그런 생각이 든 거야. 그리고….”

유라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나에게로 시선을 주고는.

“후회하더라고. 그 마음을 외면하면.”

그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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