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219화 (219/271)

219 : 종택(宗宅) (1)

딱히 그렇게 하자고 약속을 하지는 않았지만, 서현 씨와 나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암묵적인 규칙이 하나 있다.

현관에서 배웅해주기.

뭐 배웅이라고 해서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냥, 나나 서현 씨 두 사람 중 누구든 외출한다면, 무엇을 하고 있든 하던 일을 멈추고 현관까지 따라가서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해주는 것 정도.

보통은 내가 하지. 나는 등교 시간이 들쭉날쭉한 대학생이고, 서현 씨는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하는 직장인이니까.

사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좀 어색하기도 하고, 막 일어나 개기름 번들번들한 얼굴로 인사하는 것도 부끄럽고 그래서, 자는 척하면서 방에서 서현 씨가 출근할 때까지 기다린 적도 있었지.

그랬는데 침대에 앉아 귀를 쫑긋 세우고 서현 씨 나가는 소리를 기다리는 내 자신이 되게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어르신을 모시고 뭐고 그런 걸 떠나서, 같은 집에서, 같은 식탁에 앉아, 같은 음식을 먹는 식구로서 예의가 아니지.

그렇게 반성한 다음부터는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예를 들어 전날 새벽까지 술 퍼마시고 개꽐라 되어서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무조건 서현 씨를 배웅했다.

서현 씨도 처음에는 내가 잠들어 있는 것 같으면 인사 없이 조용히 그냥 출근했는데, 지금은 문밖에서라도 ‘다녀올게요.’라고 꼭 인사를 해준다.

서현 씨도 마찬가지다. 거의 없기는 하지만, 내가 먼저 집을 나서는 날이면 서현 씨도 현관까지 나와서 ‘차 조심하고, 누가 꽈자 사준다고 해도 따라가지 말고.’ 그렇게 말해준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얼마 없는, 서현 씨가 배웅해주는 날이었다.

“별로 못 주무셨는데 괜찮겠어요?”

서현 씨가 묻는다.

내가 집에 들어온 시간은 새벽 3시가 좀 넘어서. 그리고 지금은 새벽 6시가 살짝 넘은 시간.

이게 다 병진이 형 그 인간 때문이다.

아니, 점장 누나랑 사귀기로 했으면, 둘이서 알콩달콩 사랑을 속삭일 생각을 해야지. 2년 넘게 같이 지내놓고서 이제 와서 뭐가 부끄럽다고 날 붙잡고 보내주질 않아서, 결국 그 시간까지 막 시작한 커플 사이에서 완충재 역할을 하게 만들어, 아오.

그렇게 집에 돌아와서 바로 잠든 것도 아니고, 친구 놈들이랑 가는 여행 가방 싸고, 뭐 하고 하니까 4시 넘었고.

한 한 시간 반 잤나? 체감상으로 눈만 살짝 감았다 뜬 것 같다.

“괜찮아요. 차에서 자면 돼요.”

“…운전도 해야 한다면서요?”

“일단은 승환이가 운전할 거예요. 그리고 중훈이도 있으니까.”

내가 그렇게 말했지만, 서현 씨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이다.

계속 있다간 ‘횡단보도 건널 때 꼭 손들고, 누가 까까 사준다고 하면 절대 따라가면 안 돼요.’ 소리 듣겠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일요일에 오시는 거죠?”

“네.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예정은 되어있는데, 아마 점심은 먹고 올 것 같아요. 하지만 저녁은 집에서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네. 혹시라도 늦게 되면 연락 주세요.”

“전화 드릴 일은 없어요. 절대로! 저녁은 집에서 먹을 겁니다!”

내 강철 같은 의지의 표현에 서현 씨가 작게 웃는다.

“그럼 조심히 다녀오세요.”

“넵. 다녀오겠습니다. 서현 씨는 계속 집에 계실 건가요?”

“아니요. 저도 할아버지 집에 갔다 오려고요.”

“회장님 좋아하시겠네요. 아무튼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인사하고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지하철역으로 걸어갔다.

해맑게 웃으며 인사는 하고 나왔지만,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 내 머릿속에는 괴리감이라는 단어가 계속 떠올랐다.

괴리(乖離)감. 어그러진다는 괴(乖) 자와 떼어놓는다는 리(離) 자가, 그리고 느낌을 의미하는 접미사 ‘감’이 합쳐져 만들어진 파생어.

서현 씨는 평소와 같았다.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고, 평소와 같은 인사였다.

그렇기에 괴리감이 느껴졌다.

일주일 전, 아니, 정확히 5일 전 그날, 창문 너머로 파도 소리가 들려오던 이국의 그날 밤, 서현 씨가 나에게 입을 맞춘 그 순간, 우리 두 사람의 관계는 변해버렸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서현 씨는 어땠는지 몰라도, 적어도 나는 ‘그냥 그런 일이 있었지’ 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서현 씨는 변하지 않았다. 평소와 같은 서현 씨였다.

평소와 같은 서현 씨와의 관계에서 나는 괴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도대체 서현 씨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 진짜 모르겠다.”

인적이 드문 이른 새벽,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지하철역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

창회 고향 근처로 떠나는 여행.

뭐 여행이라기보다는 MT지. 멤버십 트레이닝. 무슨 멤버십 트레이닝이야. 고기 꾸워서 밤새 술 퍼마시는 먹(M)고 토(T)하기지.

아무튼, 단순 먹고 놀자는 엠티일 뿐인데, 이렇게 아침, 아니, 새벽부터 움직여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번 엠티에 퀘스트가 하나 있거든.

바로 ‘창회 할아버님과의 점심’이라는 퀘스트였다.

창회 녀석은 그럴 필요 없다고 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거기까지 내려갔는데, 당연히 인사를 드려야지.

그리고 인사만 드리고 나올 수 있나? 밥 차려 주시면 맛있게 싹싹 긁어 먹고 와야지.

아무튼, 점심시간에 맞추려면 새벽부터 부지런히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내비게이션에서만 세 시간 반이 걸린다고 나온다. 중간에 휴게소에 들러서 화장실도 가고, 핫바도 하나씩 먹으려면 여유 있게 네 시간 전에, 혹시 길 막히는 상황까지 계산하면 네 시간 반 정도 전에는 출발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고, 그럴 거면 아예 7시에 출발하자고 결정된 것이다.

모이기로 한 장소는 교대역, 지연이 집 근처였다.

뭐 우리 지연이가 유난히 예뻐서 지연이 편하라고 교대역에 모이기로 한 것은 아니고, 교대역이 고속도로 타기도 가장 가깝고, 무엇보다 어제 쇼핑한 먹을거리가 다 지연이네 집에 있었다.

이게 다 합리적인 판단을 통해 도출한 결과라는 이야기지.

지하철을 타고 교대역에 도착한 시간이 6시 40분. 약속 시간보다 20분이나 빨리 도착했는데, 지연이네 아파트 쪽 출구인 13번 출구로 올라가니 벌써 중훈이하고 민주가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가장 멀리 사는 사람들이 가장 빨리 왔네. 아니, 근데 둘이 같이 왔어?”

내가 그렇게 묻자. 이중훈이 뿌듯한 시선으로 바닥에 놓여있는 아이스박스를 가리킨다.

알고 보니, 민주 어머님께서 여행 가서 먹으라고 불고깃감을 재어 주셨다네?

어젯밤 그 소식을 들은 중훈이가 지하철 첫차 타고 목동까지 가서 들고 왔다고.

뭐야. 이 자식. 설마 우리 모르게 민주와 관계 진전이 있었던 것일까?

“찬희는?”

“거의 다 왔대. 역삼 지났다니까 한 10분이면 올 거야.”

“유라도?”

“어.”

“설마 그 녀석들도 뭐 챙겨 오는 건 아니겠지?”

“설마. 어제 쇼핑 겁나 했는데. 승환이는?”

“55분 정도에 도착한대.”

“아파트 앞으로?”

“어.”

“그럼 시간도 남는데 커피나 마실까?”

우리 세 사람은 역 근처 카페에 가서 커피를 샀다.

치사하게 우리 것만 산 건 아니고, 다른 애들 마실 것까지 전부 다.

승환이는 운전해야 하니까 특별히 쓰리 샷 추가해서. 먹고 기뻐할 모습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커피 사 들고 나와서 홀짝이고 있으니 찬희와 유라가 나타난다.

뭐야. 찬희 녀석 손에 뭐가 또 들려 있다.

“그건 뭐야?”

“유부초밥.”

최유라가 말한다.

“유부초밥?”

“가면서 먹으라고 엄마가 만들어줬어.”

참나. 이거 괜히 여행 간다고 했다가 어머님들 귀찮게 해드린 건 아닌가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작년 여행 때도 유라 어머님께서 김밥 싸주셨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지수 어머님께서도 고기 재어 주셨었지.

어제 장도 엄청 봤다고 했는데…. 저 많은 걸 이틀 동안 다 먹을 수 있을까?

***

승환이 놈은 피도 눈물도 없는 녀석답게 정확히 6시 55분에 아파트 입구에 차를 끌고 나타났다. 무슨 저런 놈이 다 있나 싶네.

그리고 지연이는 그 많은 짐들을 전부 다 아파트 정문 앞에 쌓아놓고 있었다.

“이 많은 걸 너 혼자 다 가져다 놓은 거야?”

“아니요. 오빠가 도와줬어요.”

그렇게 말하는 지연이가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다는 걸 보니, 지연이 오빠가 순순히 도와준 것 같지는 않다. 뭔가 여동생을 되게 짜증 나게 하는 조건을 내건 것 같은데?

직접 만나본 그 형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 같다.

아무튼, 아파트 정문에 쌓여있는 짐들을 모두 합심해 승환이가 끌고 온 승합차에 다 실었다.

실으면서 보니 진짜 많다. 꼴랑 2박 3일인데, 아니, 정확히 말하면 2박 2일인데, 어제 다들 굶은 상태로 장을 봤는지, 양이 어마무시하다. 아껴먹으면 2주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사람도 모두 모였고, 짐도 다 실었고, 본격적인 출근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바로 출발해서 빠르게 경부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역시 교대에 모인 것이 신의 한 수였어. 조금만 늦었으면 바로 출근 러시아워에 걸려버렸을 거야.

아무튼, 원래 내 계획은 고속도로에 접어들면 바로 자버릴 생각이었다. 그래서 커피도 디카페인으로 마셨는데, 이건 뭐 도저히 잠을 잘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녀석들 놀러 간다고 신났는지, 떠든다고 정신이 없다. 찬희 녀석은 아침부터 또 무슨 잘못을 했는지 유라에게 혼나고 있고, 중훈이는 민주에게 말도 안 되는 썰을 풀고 있다.

박승환도 운전에 집중하지 않고, 쓰리 샷 추가한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면서 계속 대화에 끼어든다.

아오, 시끄러워. 이 녀석들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는데 피곤하지도 않나? 왜들 이렇게 신난 건데?

아무튼, 그런 분위기에서 잠자겠다고 조용히 하라고 하기도 뭐해서 나는 지연이에게 어젯밤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진짜요?”

“그렇다니까. 결국 그 인간이 사고를 쳐버렸어.”

병진이 형이 누나에게 고백했다, 그리고 누나가 받아줬다는 이야기를 해주자, 지연이는 마치 자기가 연애를 시작하기라도 한 것처럼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이럴 줄 알았지. 지연이라면 진심으로 기뻐해 줄 거라고 생각했었다.

“멋있어요.”

지연이가 말한다.

“응? 누가?”

“병진 오빠요.”

“병진이 형이? 어디가?”

어제 그 인간 을매나 바보 같았는데.

“고민을 한 거잖아요. 정직원 되었으니까, 이제 자격이 생겼으니까 고백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고민.”

아. 그 부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형의 마음속을 들여다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병진이 형이라면, 그 사람이라면, 정직원 계약이 되었으니까, 이제 미래를 바라볼 수 있다고 계산을 하고 고백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고 결정할 사람은 아니지.

“저는 병진 오빠 잘 모르지만, 몇 번 만나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처음에 상상했던 모습이랑은 다르더라고요.”

“처음에 상상했던 모습은 어떤데?”

“되게 가볍고 허술한 사람?”

지연이가 그런 병진이 형을 떠올렸다면 그건 백 퍼센트 나 때문이다. 내가 병진이 형에 대한 이야기 몇 번 했거든.

아니, 험담을 한 것은 아니다. 그냥 병진이 형과 나 사이에 있었던 작은 해프닝, 재미있는 이야기 정도?

물론 조금 양념을 치고, 사알짝 과장을 하고 그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뭐 완전히 ‘그 인간 아주 몹쓸 인간이야.’ 같은 이야길 한 건 아닌데….

아니다. 솔직히 반성하자. 지연이 웃기겠다는 욕심에 MSG를 쪼오금 치기는 했다.

“그랬는데, 만나서 이야기해보니 처음 생각했던 모습하고는 좀 다른 것 같더라고요. 뭐랄까…. 역시 오빠 주변 사람이라는 느낌?”

“내 주변 사람이 어떤데?”

“마음의 밀도가 높은 사람.”

“마음의 밀도?”

“네. 생각도 깊고, 마음도 따스하고.”

지연이가 그렇게 면전에서 낯간지러운 소리를 한다.

“…승환이도 내 주변 사람인데?”

“승환 선배도 마음의 밀도가 높지 않나요? 재질은 좀 다른 것 같지만….”

지연이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역시 우리 지연이. 사람 보는 눈이 있어.

“아무튼, 병진 오빠나 점장 언니나, 저는 만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쉽게 속단할 수는 없겠지만,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 받았어요. 그리고 좋은 사람이니까 오빠도 그렇게 친하게 지내는 것일 테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좋은 사람들인 것은 맞다.

“만약 병진 오빠가 ‘나 이제 정직원 되었으니까 고백해야지!’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했다면…. 좀 실망이었을 것 같아요. 아니요. 제가 아니고 점장 언니가요.”

“…누나가 그걸 알아챘을까?”

“그럼요.”

“어떻게?”

“알아요. 여자는.”

“여자는 알 수 있다?”

“네. 이 사람이 정말 날 좋아하는지, 얼마나 좋아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고백을 하는 건지 여자라면 알 수 있어요.”

“…지연 씨는 아직 연애 한 번도 안 해보셨다고 하셨잖아요.”

“연애는 못해봤어도 고백은 많이 받아봤어요. 그리고 프로토스의 실드 같은 거예요. 개발해야 하는 스킬이 아니라 같은 종족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종족 특성.”

지연이는 그렇게 말한다.

단박에 이해가 가는 적절한 예이기는 한데…. 확실히 지연이 오빠가 지연이한테 나쁜 영향을 많이 끼친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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