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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업을 이어라-218화 (218/271)

218 : You make me wanna be a better man. (3)

병진이 형은 진지한 눈으로 누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런 병진이 형을 누나는 웃음기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잠시 동안 서로를 그렇게 바라보던 누나가 묻는다.

“일단 물어봐도 될까? 왜 내가 좋은데?”

예뻐서 그렇다고 해! 무조건 예뻐서 좋아한다고, 일단 그게 가장 먼저 나와야 해!

그렇게 판을 깔아놓고 마음이 따뜻하다느니, 돈이 많다느니, 막 대해줄 것 같다느니 같은 짜잘한 이유는 예쁘다는 말 다음에 갖다 붙이는 거야!

나는 속으로 그렇게 병진이 형에게 외쳤다.

하지만 병진이 형은 그런 계산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말한다.

으이구. 망했어. 망했다고 이 인간아!

망한 건 망한 거고,

“저기 죄송한데요. 저는 일단….”

나는 그렇게 말하고 슬그머니 가방을 집어 들었다.

도망가야 하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면 폭탄 터지기 전에 도망가겠다는 비겁한 생각은 아니고….

이제부터 두 사람만의 시간이 되어야 하니까 제삼자인 나는 자리를 비켜 주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게 맞지.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없고, 내가 계속 여기 있어서도 안 되고.

그래. 내가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오롯이 병진이 형이 감당해야 할 시간이다.

결과는 참혹하겠지만….

“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저희 집 통금 있거든요. 어이쿠야,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그런 개드립을 치면서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는 찰나,

“괜찮아. 같이 있어도. 한수는 특별하니까. 병진이도 괜찮지?”

누나가 그렇게 말하고 병진이 형은 고개 끄덕여준다.

아니, 저 가고 싶은데요, 진짜 집에 가고 싶은데요? 결과는 나중에 전화로 따로 들으면 안 될까요?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하고, 다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잠시 우리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이래서 집에 가고 싶다고 한 건데!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병진이 형이었다.

“모르겠어요. 정확히 말하면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너무 많아서, 그래서 딱 이거라고 말을 못 하겠어요.”

나는 누나를 슬쩍 바라보았다. 옅은 미소를 띠고 있다. 기분 나빠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감이었던 것 같아요. 아니, 호감이었어요. 누나가 예뻐서, 그래서 호감이 갔었어요. 그랬는데, 어느 순간부터 누나가 예쁜 사람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시간으로 만 2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는 그 시간을 함께 지내다 보니, 누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남자와 여자를 떠나 사람 대 사람으로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래.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워.”

누나가 말한다.

병진이 형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한다.

“저번에 한수가 그랬어요. 고백 안 하냐고. 누나가 본사 들어가면 이제 보기 힘들어질 텐데, 그 전에 고백해야 하지 않겠냐고.”

누나의 시선도 나를 향한다.

그 시선에 따뜻한 미소가 담겨있다.

“그때 내가 그랬어요. 고백도 자격이 있어야 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한수가 그러더라고요. 고백하는데 무슨 자격이 필요하냐고.”

내가 그랬지. 내가 그랬었다.

“나중에 집에 가서 한수 말을 다시 생각해봤어요. 누나도 알다시피 전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미래에 대한 확신도 없어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아니, 단순히 그것뿐만이 아니었어요. 누나는 나에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인데, 제가 누나에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자신이 없었어요. 사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에요. 인턴 계약을 했지만, 그래서 아주 작은 희망이라는 것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지만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그래서 자격이 없다고, 그렇게 생각해요.”

누나는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포기해야겠다고, 마음 접어야겠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어요. 그랬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그게 참 마음이….”

안 되지. 사람의 마음은, 두뇌의 지시를 받지 않는다. 이성은 절대 감정을 컨트롤할 수 없다.

“사실 지금 조금은 후회하고 있어요. 제가 많이 부족하고 그래서 자격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일방적으로 내 감정만 쏟아내는 것이 아닐까.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제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잘 지낼 수 있을 텐데, 친하게 지낼 수 있을 텐데. 괜히 사이만 더 어색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그런 후회가 들어요. 드는데…. 그런데… 하지만… 그 마음이라는 게….”

병진이 형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맥주잔을 집어 든다.

누나는 그런 병진이 형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봐주고 있다.

“…얼마 전 되게 오래된 영화를 봤어요.”

병진이 형이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꺼낸다.

“…어떤 영화?”

누나가 묻는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혹시 보셨어요?”

“아니.”

누나가 고개를 젓는다.

나도 처음 들어본 제목이다. 언제 적 영화지?

“1997년에 나온 영환데, 우연히 보게 되었다가 끝까지 다 봤어요. 아니,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 영화에서 잭 니콜슨이 성격 장애를 가진 남자 주인공으로 나와요. 강박증이 있어서 일상생활이 쉽지 않은. 대표적으로 보도블록에 금을 밟지 않기 위해서 굉장히 조심스럽게 걸어야 하고.”

나와 누나는 말없이 병진이 형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갑자기 영화를 추천하고 싶어서 저 형이 저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 아닐 거다.

“그런 강박 때문에, 치료를 받아야 하는 성격 장애 때문에, 자꾸 여주인공 앞에서 실수를 해요. 기분 상할 말을 하고. 아무튼 둘이서 식당에 가는데 거기서도 또 실수를 하고, 여주인공은 화가 나고, 그런 여주인공을 달래려고 또 이상한 말을 하는데, 그 대사 중의 하나가 기억에 남았어요.”

“…어떤 대사였는데?”

“You make me wanna be a better man.”

병진이 형이 누나의 눈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말한다.

“…그 대사를 듣는데 누나가 생각났어요. 처음 카페에 왔을 때, 그때의 나는 꿈도 미래도 없는, 그냥 하루하루 걱정과 후회 속에서 허우적거릴 뿐이었어요. 그런데 누나를 만나고 나서부터 조금씩, 조금씩 바뀔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아니, 바뀔 수 있었어요.”

병진이 형의 말에 누나가 고개를 끄덕인다.

“저도 알아요.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그렇지만, 조금 덜 부족할 수 있도록, 그렇게 조금 더 좋은 남자가 될 수 있도록 더 노력하고 싶어요. 누나에게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 될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에요. 그저 누나가 나에게 있어서 얼마나 대단한 존재감을 가진 사람인지, 말해주고 싶었어요.”

병진이 형은 그렇게 말을 끝내고 길게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어딘가 조금 후련한 표정을 짓는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던 말이었을까?

You make me wanna be a better man.

당신은 내가 더 좋은 남자가 되고 싶도록 만들어요.

이보다 더 적합한 말이 있을까?

나는 누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누나는 아무런 말 없이 그냥 웃고만 있다.

좋다 나쁘다, 그런 말 없이 그냥 미소를 띤 채로 병진이 형을 바라만 보고 있다.

“영화 제목이 뭐라고?”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요.”

누나는 기억하려는 듯 다시 한번 작게 그 제목을 읊조리고는 맥주잔을 들어 올렸다.

나도 병진이 형도 잔을 들어 올렸다.

맥주잔 세 개가 만들어 내는 맑고 청량한 소리가 테이블 위에서 퍼져나갔다.

“알고 있었어.”

한 모금 마신 누나가 말을 시작했다.

“알고 있었지. 나도 바보가 아닌데, 눈치가 있는데 당연히 알고 있었지. 알고 있었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모른 척하고 싶었어.”

병진이 형은 아무런 말이 없다.

물어볼 수 없겠지.

부담스러웠냐고, 그래서 모른 척하고 싶었냐고. 그렇게 물어볼 수 없겠지.

하지만 이어진 누나의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재미있고 즐거워서, 그리고 행복해서 계속 모른 척하고 있었어.”

“…네?”

나와 병진이 형이 동시에 그렇게 물어본다.

“목요일마다, 우리 이렇게 같이 있는 게 즐거워서, 재미있고 행복해서. 그래서 당분간은 계속 이렇게 지내고 싶었어.”

나도, 병진이 형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아마도 병진이 형도, ‘계속 이렇게 지내고 싶었어’라는 누나의 말이 어떤 마음에서 나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 세 사람 모두 같은 생각이었을 테니까.

“본사로 발령을 받았을 때 그런 생각이 들더라? 이제 더 이상 예전과 같은 행복한 목요일은 힘들겠구나.”

이것도 우리 모두 같은 생각이었지.

“그리고 그 생각도 들었어. 차라리 잘 된 걸지도 모르겠다.”

응? 이건 또 무슨 소리?

“…잘 된 걸지도 모르겠다고요?”

내가 물었다.

누나는 작게 웃고는 날 바라본다.

그리고는.

“한수는 조만간 그만둘 생각이지?”

그렇게 묻는다.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점장 누나라면, 병진이 형이라면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았으니까.

“네. 새 점장님 오고 병진이 형 교육 들어가고, 새로 알바 뽑을 때, 그때 말하려고 했어요.”

누나도 병진이 형도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지연이가 좀 걸리긴 했는데, 어떤 상황인지 설명해 주면 지연이도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지연이가 어떤 선택을 하든 저는 그 선택을 존중해 줄 거고요. 그리고 확신하지는 못하겠지만, 지연이는 아마 계속 하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우리 카페에서 알바를 하게 된 데는 어느 정도 제 영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겠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저 한 사람만 보고 알바 시작한 건 아니니까요. 그리고 카페 일. 본인도 즐거워하고 있고, 재미있어하고 있으니, 제가 그만둔다고 바로 그만둘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당분간 월요일은 도와줄 생각이긴 한데. 솔직히 목요일은 안 하고 싶어요. 두 사람 없는 목요일은 너무 힘들 것 같아요.”

내 말에 누나랑 병진이 형 둘 다 고개를 끄덕인다.

두 사람은 이해해줄 줄 알았다.

“그만둬도 연락은 계속할 거지?”

누나가 그렇게 물어본다.

“당연하죠.”

내 대답을 들은 누나는 작게 웃고는 다시 병진이 형을 바라본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 한수도 그만두고, 병진이도 다른 지점 가면 점점 멀어질 수도 있겠구나. 예전처럼 그렇게 자주 보지는 못하겠구나. 근데, 인연이 끊어질 것 같다는 생각은 안 들더라고. 차라리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 관계가 변한다면, 제대로 변화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

“…어떻게요?”

병진이 형이 묻는다.

“한수와는 점장과 알바가 아닌 좋은 누나 동생 사이로.”

누나가 날 보고 그렇게 말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의 시선이 병진이 형에게로 향한다.

“그리고 병진이하고는….”

거기까지 말하고 멈춘다.

자연스럽게 나도 병진이 형도 침을 꿀꺽 삼킨다.

하지만 누나는 말없이 병진이 형을 보며 웃고만 있다.

그렇게 몇 초가 더 흐른 후.

“나는 그런 거 싫더라. 우리 사귀자 그러면 그때부터 연인이 되는 거고, 그날부터 1일이고, 두 사람의 관계가 바뀌는 거. 나는 그런 거 좀 이상하더라고. 자연스럽게,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서로를 향해 가까워지다가, 어느 순간 서로에게 물드는, 그런 게 좋더라. 병진이는 어때?”

누나가 그렇게 말한다.

병진이 형은 멍한 표정으로 누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습을 보고 웃기만 하던 누나는 갑자기.

“그 영화 그렇게 재미있었어?”

그렇게 묻는다.

“…네?”

“아까 말해준 그 영화.”

“네? 네. 재미있다기보다 괜찮았어요. 좋은 영화였어요.”

“그렇구나. 그럼 다음에 보여줘.”

누나가 말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병진이 형이 똥볼을 차려고 한다.

“네? 어디서… 큭.”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가 테이블 밑으로 형 정강이를 차버렸거든.

형은 잠시 아픈 표정을 지었지만 작게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리고는, 누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

“네. 같이 보러 가요.”

그렇게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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