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217화 (217/271)

217 : You make me wanna be a better man. (2)

***

와…. 어이없네.

진짜 개어이없네.

병진이 형의 설명을 듣고 머릿속에 떠오른 첫 번째 생각이다.

“그러니까, 지금 저 손님이 형한테… 밖에서 따로 만나자고 했다고?”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렇게 묻고는 앞에 서 있는 두 명의 외국인 손님을 향해 가볍게 미소 지어 주었다.

두 명의 손님 중 왼쪽에 서 있는 여자분. 둘 다 예쁜데, 꼭 우열을 가리라면 조금 더 예쁜 여자분이 병진이 형에게 괜찮으면 밖에서 따로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다는 거다.

일단 배경 설명은 이렇다.

저 손님들을 나는 오늘 처음 봤는데, 한 세 달 전부터 가끔씩 찾아오는 손님이란다.

그렇다고 맨날 도장 찍는 단골손님들에 비하면 방문하는 빈도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으니까, 아마 다른 손님들, 특색 없는 일반적인 손님들 같았으면 기억하기 힘들었을 텐데, 외국인이고 또 겁나 미인이고 하니까 기억에 남았다는 거다.

뭐 그럴 수 있겠다 싶다.

아무튼, 영어 공부 열심히 한다는 우리 병진이 형. 회화 연습한다는 기분으로 이렇게 저렇게 말을 몇 번 걸었었단다.

뭐 대단한 말은 아니었단다.

오늘 좋은 날씨죠? 옷이 참 예쁘네요. 어디서 사셨어요? 아, 고속터미널. 거기 좋죠. 저도 거기 가끔 옷 사러 가요. 뭐 이런 이야기.

이 인간 개구라 쳤네. 스파 브랜드 세일한다고 하면 1년 치 옷을 한꺼번에 사는 냥반이 무슨 옷을 사러 고속터미널엘 간다고? 거기 남자 옷 팔기는 팔아?

아무튼, 그렇게 올 때마다 인사하고 웃어주고, 가벼운 이야기 나눴고, 오늘도 똑같이 그랬다는 거지.

아니,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고, 그 이야기를 했단다.

조만간 형이 여기를 떠난다고. 어디로 갈지 모르겠는데,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뵈었으면 좋겠다. 뭐 그런 이야기.

뭐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 조만간 교육받으러 본사 들어갔다가 다른 지점으로 갈 테니까.

아무튼 손님이 그 이야기를 듣더니, 그렇다면 전화번호 교환하고 갑자기 밖에서 한번 만나자고 했다는 거다. 자기 관심 있다고.

“만나면 되겠네.”

내가 말했다.

“뭐?”

“만나봐. 만나서 이야기도 해보고, 저분도 형이 나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잘해봐. 잘되면 국제 커플 너튜브도 시작하고. 예쁘시네. 조회수 잘 나오겠다.”

“야 이, 미친놈아.”

형은 나에게 그렇게 나직하게 말하고는 다시 어색하게 웃는 표정으로 손님들을 바라보고는 주절주절 말을 한다.

대충 알겠다. 뭐, 병진이 형은 예의 있게 거절하고 싶은 거다.

아니, 그러면 그냥 미안하다. 그러면 되지,

‘당신의 마음은 참으로 감사합니다만,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손님을 개인적인 자격으로 밖에서 만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관계라고 생각되는바, 당신의 호의를 거절할 수밖에 없는 저를 용서해 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이러고 있네?

이 양반 영어 공부 열심히 했다고 하던데, 수능 교재로 공부했나? 단어 사용이 왜 저따위야?

내가 도와줘야겠네.

“He got married(이 인간 결혼했어요).”

그렇게 끼어들었다.

손님의 시선이 날 향한다.

가까이서 보니까 진짜 더 예쁘네. 병진이 형 나중에 졸라 후회한다는 데 만 원 건다.

“Did you see the woman, who worked with us every Thursday? She’s this man’s wife.(목요일에 우리랑 같이 일하는 여성분 혹시 보셨어요? 그 여자가 부인이에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두 사람은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안하다, 실례했다.’ 그렇게 말하고 카페를 나간다.

그 뒷모습을 보는데 내가 다 안타까워. 아우씨.

아무튼, 그 사람들이 나가자 형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아니, 그냥 Sorry, I have a girlfriend. 하면 되지. 아니, 그건 너무 촌스럽나? I’m in a relationship. 하든가 하면 되지. 뭔 쓸데없이 I’m so grateful for your asking은 뭐야. 지금 공문 써? 귀사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야?”

내가 그렇게 말하자 형이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힌다.

역시 영어는 실전 영어야. 서바이벌 잉글리쉬라니까?

그냥 되는대로 나오는 게 최고야. ‘get’이랑 ‘have’랑 ‘take’만 있으면 웬만한 말은 다 할 수 있다니깐.

“…근데 그건 무슨 소리야?”

형이 묻는다.

“응? 뭐가?”

“아니, 뭐 결혼은 그렇다 치고, 목요일에 같이 있던 여자라면… 점장 누나뿐이잖아.”

“싫어?”

“아니, 싫다는 건 아니고….”

“싫은 거 아니면 넘어가. 해결됐잖아? 그냥 넘어갑시다.”

내가 그렇게 이야기하고 바리스타존 쪽으로 몸을 돌리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다시 형을 바라보았다.

“근데, 고백했어?”

그리고 그렇게 물었다.

“…아니.”

“안 할 거야?”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는다.

안 하겠다는 이야기는 아닌 거네.

그래. 질러야지. 질러버려야지. 남자가 말이야. 까일 때 까이더라도 말이지

“이제 자격도 생겼잖아.”

내가 말했다.

저번에 형이 그랬거든.

-고백도 자격이 있어야 하는 거지.

근데 이제 인턴 계약도 했고. 그럼 뭐, 먹고살 걱정 없다까지는 아니어도 나름 미래 비전이라는 것도 그릴 수 있으니까, 고백할 자격이 있는 거 아닌가?

근데, 이 둔한 인간은 무슨 생각인지 그냥 이러고 있네.

형은 말없이 그냥 웃는다.

으이구. 이 답답한 양반아.

나도 몰라. 이제 안 도와줘!

***

오후 10시 반. 폐점 30분 전.

평소 같았으면, 마감하면서 어서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지만.자꾸 출입문 쪽을 힐끔힐끔 바라보게 된다.

또 누가 올까 봐.

오늘은 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근데 자꾸 눈치를 보게 된다.

최근 들어 이 시간에 예상 못한 사람들이 자꾸 모습을 드러냈거든.

일단 친구 놈들. 그래도 그놈들은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하다. 그리고 점장 누나. 뭐 누나도 예상 가능하고.

근데 고마음은 진짜 예상 못 했지.

영화 배우 고마음이 그 시간에 우리 카페에 올 줄 누가 알았겠어? 그것도 고마음이 출연한 영화를 보고 얼마 지나지도 않은 시점에서.

사실 짧은 시간에 고마음하고 몇 번이나 마주쳐서 혹시 뭔가 있나? 그런 생각을 잠깐 하기는 했는데, 이건 인정해야 한다. 나도 사람인지라 그런 생각 할 수도 있지.

아무튼 그런 생각을 잠깐 했었는데, 그 이후 아무 일도 없었다. 뭐, 그런 거지. 당연한 이야기지.

고마음은 정말 손님이니까 뭐,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지연이 오빠는 진짜 예상 못 했지.

아무튼, 폐점 30분 전, 마법의 시간. 오늘은 제발 그냥 넘어가자.

나 내일 여행 가야 한단 말이야. 아침 일찍 집합이란 말이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지만 어김없이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다.

“안녕~”

점장 누나가 그렇게 반갑게 인사하면서 문을 열고 들어온다.

***

어김없이 치킨집에 앉아 있다. 여기 쿠폰 찍었으면 치킨 두세 마리 정도는 공짜로 먹었을 거야.

아니, 난 내일 아침 일찍 움직여야 한다고, 둘이서 먹으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체포당하는 범죄자인 양 양팔을 붙들린 채 끌려왔다.

아, 진짜… 뭐 싫다는 건 아니고.

아무튼 자리에 앉은 나는 조금 전 있었던 일을 점장 누나에게 일러바쳤다.

병진이 형이 손님에게 추파 던졌다고.

“어머. 그 손님들?”

점장 누나도 그 손님들을 알고 있었나 보다.

“네.”

“그래서? 만나기로 했어?”

“아니요.”

병진이 형이 그렇게 말한다. 물론 내가 결혼했다느니, 누나가 와이프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안 하고.

나도 입 다물고 있다. 점장 누나 화나면 무섭거든.

“한번 만나보지. 꼭 사귀는 거 아니라도 친구로 만나도 괜찮은데. 영어 공부도 하고, 그리고 외국어 배울 때 외국인 애인 만나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했어.”

점장 누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렇게 말한다.

가만히 보면 참 저 누나도 못됐어. 병진이 형이 자기 좋아하는 거 모르지 않을 텐데.

병진이 형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뭐라고 중얼중얼하더니, 갑자기 맥주잔을 집어 들고 벌컥벌컥 마신다.

저거 위험 신호인데?

아니나 다를까.

“누나.”

“응?”

“내가 누나 좋아하는 거 알죠?”

그렇게 사고를 친다.

아이고, 이 답답한 양반아. 술 원샷 때리고 홧김에 하는 고백이 깨톡 고백과 더불어 ‘여자들이 싫어하는 고백 방법 베스트 3 중 1, 2위라고!

나는 재빨리 누나의 눈치를 살폈다.

누나는 특별한 말 없이 그저 웃는 얼굴로 병진이 형을 바라보고 있다.

“제가 혹시 고백했으면… 인턴 계약하기 전에 고백했으면, 누나는 받아줬을까요?”

병진이 형이 그렇게 묻는다.

이건 아닌데… 싶기는 하지만, 병진이 형이 무슨 마음으로 그런 질문을 한 건지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복잡한 마음이었겠지. 스스로에 대한 부족함이랄까? 뭐 여러 가지가 형의 마음을 가로막고 있었을 것이다. 인턴 계약을 했다고 해서,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 중 하나를 넘었다고 해서, 이제 자격이 생겼으니 고백해야지. 병진이 형은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고 결정할 사람은 아니다.

말하고 싶은 것이다.

정직원 계약하기 전의 병진이 형도, 지금의 병진이 형도 같은 사람이라고.

묻고 싶은 것이다.

그때 받아줬었겠냐고. 지금 받아주겠냐고.

“…아니.”

누나의 대답이다.

대답을 들은 병진이 형의 고개가 위아래로 작게 움직인다.

그 움직임이 어딘가 처연하다.

그런 병진이 형을 잠깐 바라보다가 내가 누나를 바라보았다.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하는 시선으로.

병진이 형은 물어보지 못할 테니까.

누나는 내 질문에 작게 웃고는 다시 병진이 형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리 같이 일한 지 얼마나 되었지? 시간으로 만 2년 넘었지?”

병진이 형이 끄덕한다.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같이 일하다 보니까,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 우리 병진이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꼭 카페 쪽 아니더라도 무슨 일을 하든 잘할 거라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

병진이 형은 눈앞에 잔만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조금 욕심이 나더라고. 데려오고 싶다는 그런 욕심. 그러면 고백을 받으면 안 되거든.”

응? 이게 무슨 말이야?

병진이 형도 예상치 못한 전개에 고개를 들어 누나를 바라본다.

“고백했을 때 낼름 받아들이면 인턴 제안을 못 하잖아. 남자친구라서 추천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텐데. 우리 회사 아무래도 외국계니까 되게 리버럴한 부분이 있잖아? 불륜만 아니면 뭐 회사에서 연애를 하든 직원들 개인 사생활이라고 크게 상관은 안 하는데. 근데 또 HR 부분에서는 칼이니까. 남자친구를 추천한다? 오히려 감점 요소거든. 그러니까 그때는 고백했어도 안 받아줬을 거야.”

누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맥주잔을 들어 올린다.

맥주를 마시는 누나를 나와 병진이 형은 벙찐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뭐야? 지금 이게, 무슨 말이야?

그때 안 받아줬을 거라고? 이유가 그런 거라고?

그러면? 지금은 받아줄 수도 있다. 뭐 이런 식으로 해석될 소지가 많은데?

나는 곁눈질로 병진이 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테이블 밑으로 점장 누나 모르게 발로 툭 찼다.

지금 그렇게 벙찐 얼굴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얼른 진행시켜!

“그러면, 지금, 제가 고백하면….”

“어머. 지금 고백 그렇게 하는 거야?”

누나의 말에 병진이 형이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표정과 말투였는지 그제서야 알아차렸다는 듯, 눈 질끈 감고 고개를 좌우로 두어 번 젓는다.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바꾸고는, 누나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누나. 저 누나 좋아해요. 이성으로서, 오래전부터 좋아했어요.”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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