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 You make me wanna be a better man. (1)
“괌?”
노트북을 펴놓고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던 승환이의 손가락이 멈춘다.
승환이와 나는 지금 강남역 인근의 카페에 앉아 있다. 이번에 창회 고향 근처로 가는 여행 준비를 하기 위해서.
여행 준비라고 해도 특별히 뭐 대단한 걸 하는 건 아니고, 엑셀 창 띄워놓고 준비해야 되는 물품이 뭔지, 예산이 얼만지 같은 걸 대충 맞춰보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지. 모든 일의 시작은 예산 책정이고, 마무리는 결산이라고 했다.
사업 규모를 가늠해보고 적정한 예산안은 수립해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효용을 뽑아내고, 남은 돈으로 비자금을 조성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작업인데.
비자금을 조성한다고 해서, 나랑 승환이가 그 돈을 쓱싹 하겠다는 건 아니고, 우리가 또 계획이 있다. 용처가 있다는 말이지.
아무튼, 그렇게 계산기를 때려보다가 잠시 쉬는 시간에 지난 주말에 서현 씨랑 괌에 다녀왔다고 자랑을 했다.
이게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이기는 한데… 솔직히 좀 자랑하고 싶었다.
첫 해외여행, 첫 비즈니스 클래스, 첫 태평양 바다, 그리고 서현 씨와 떠난 둘만의 여행.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랑 못 한다. 그 자랑을 하려면 서현 씨와 나와의 미묘한 관계뿐만 아니라 그 작은 어르신 어쩌구를 설명해줘야 하니까.
하지만 우리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대충 알고는 있는 승환이에게는 자랑질 좀 할 수 있지.
“괌을 갔다고? 서현 씨하고 단둘이?”
승환이가 다시 되묻는다.
자, 어디 상상의 나래를 한번 펼쳐보도록 하여라. 신혼 여행지로 유명한 그곳에, 나와 서현 씨 단둘이 여행을 갔다면 과연 어떤 일이 있었을지. 마음껏 상상하고 부러워하도록 해라!
나는 그런 의미가 담뿍 담긴 표정으로 승환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단.둘.이.서.”
하지만 박승환은 그런 내 표정을 보고 피식 웃고는.
“별일 없었구먼.”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키보드를 두드린다.
어? 이게 아닌데? 이 자식 어떻게 알았지?
“벼, 별일 있었는지 없었는지 니, 니가 어떻게 알아?”
내가 그렇게 되묻자, 박승환은 어린아이에게 훈계하고 싶어 하는 표정으로 가볍게 한숨 한 번 내쉬더니 노트북을 탁 하고 덮는다.
“너 작년 여름에 지수랑 여행 갔었지?”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어? …어.”
“그때 우리한테 이야기 안 했지?”
“…어.”
“왜 안 했는데?”
“….”
왜 안 했냐고?
자랑할 거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뭐랄까, 나는 할아버지 밑에서 교육받은 유교탈레반 전사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어디 남녀가 유별한데, 일곱 살이 넘어서도 같은 자리에 앉아있단 말이냐!’ 같은 미친 소리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호감을 느끼고, 애정을 가지는 것은 다분히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
그 같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서로 사랑하는 두 남녀가 정신적인 교감을 넘어 육체적인 교감으로까지 발전하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뭐랄까? 그 두 사람만의 깊고 은밀한 이야기는 오로지 두 사람만의 추억과 비밀이 되어야 한다.
까놓고 말해서, Sex라는 행위. 그건 즐겁고 행복한 연인만의 행위여야 한다. 자랑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놈들이 있다. 자기 여자친구랑 잤다고 자랑하는 놈들. 즐겁고 행복해야 할 두 사람만의 비밀을 무슨 훈장이라도 딴 듯이 떠벌리고 다니는 놈들.
그런 놈들은 맞아야 한다. 진짜 이러다 죽겠다 싶을 때까지 처맞아봐야, 자랑하고 싶다는 그 유치하고 잔인한 생각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큰 수치심을 주고 아픔까지 될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될 테니까.
그래서 나는 지수와의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 특히 우리 두 사람만의 은밀한 이야기는 절대로 친구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런 관점에서 작년에 지수랑 여행 갔었던 이야기도 친구들에게 하지 않았던 거다.
지수에게는 그 녀석들이 친구였고, 그 녀석들에게도 지수는 친구였다.
지수가 친구들 앞에서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고, 친구들이 지수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랬다. 이야기 안 했다.
친구 녀석들도 알고 있었던 거다. 지수와 내가 작년에 여행을 다녀왔다는 사실을. 하지만 묻지 않았다. 유치하게 ‘어디까지 갔어?’ 같은 처맞을 질문을 하지도 않았고.
“서현 씨랑 두 사람이 신혼 여행지로 유명한 괌으로 여행을 갔다. 그랬는데, 거기서 천인공노할 일이 일어났다? 그런 걸 자랑할 놈은 아니지, 너는.”
승환이가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저으면서 그렇게 말한다.
“아니, 애초에 두 사람이 여행을 갔다는 이야기도 안 꺼냈겠지. 쓸데없이 오해받게 하고 싶지는 않았을 테니까. 근데, 여행을 갔다는 이야기를 니가 먼저 꺼냈다? 마치 오해하라는 듯? ‘두 사람만’을 강조하면서? 왜 그랬을까? 당당하니까. 아무런 일도 없었고, 그래서 당당하다 이거지. 그렇게 함정을 파놓고, 내가 혹시라도 이상한 이야기를 하면, ‘사실은 이거다!’ 그러면서 숨겨놓은 진실을 꺼내 놓고, 나를 아주 음란마귀 취급하려는 더러운 속셈이 숨어있다, 이거지. 아닌가?”
나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그저 승환이 녀석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랬다. 이 자식은 무서운 놈이었지.
요즘 가끔식 똥뽈을 차고 다녀서 까먹고 있었는데, 이 자식 박승환이었지?
“…젠장.”
나는 두 손을 들었다.
“그래서 숨겨진 진실은?”
승환이가 물어본다.
“…어머님이 계시더라.”
“서현 씨 어머님?”
“어. 1년에 3분의 1 정도는 거기에서 지내신대.”
“그러면 숙소가 어머님 집?”
“어.”
“아우, 좋았겠는데. 아주 편하고 행복했겠는데?”
“…그래 임마. 졸라 편했지.”
그제서야 승환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와. 부럽네. 해외여행도 가고, 비즈니스 클래스도 타고, 서현 씨 어머님 집에서 불편함에 잠도 뒤척여보고. 그게 제일 부럽다.”
“…젠장.”
이 알 수 없는 패배감은 도대체 무엇이냐.
“한번 읊어봐.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형이 다 들어줄게.”
승환이는 그렇게 말하며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젠장. 재미없어.
뭐, 어차피 이야기 나온 김에 나는 조금이라도 부러워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2박 3일 동안 있었던 일들을 시간순으로 짧게 이야기해 주었다.
머스탱 타고 해안도로 드라이브 한 거, 어머님이 카레 만들어 주신 거, 쇼핑 갔다가 옷 잔뜩 선물 받은 거, 요트 타고 나가서 돌고래 보고, 스노클링하고, 밤에 바비큐 파티한 거.
대신 그런 건 뺐다. 서현 씨가 미안해한 거라든가, 가족 이야기라든가, 그날 밤 키스해 준 거라든가.
사실 키스 이야기는 살짝 고민했었다.
자랑하고 싶은 건 아니고, 도대체 서현 씨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질 않으니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랄까?
그리고 사실 물어볼 사람이 승환이밖에 없다. 서현 씨와 내 관계를 아는 사람 중에서 승환이 말고 누구에게 물어봐?
할아버지? 강 회장님? 서현 씨 오라버니인 강우현 팀장?
죽겠다는 말이지. 죽여달라는 이야기지.
그렇다고 서현 씨와의 그 미묘한 관계를 모르는 친구 놈들에게 ‘이건 내 이야기 아니고, 내 친구 이야긴데….’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없잖아.
명동 한가운데에서 ‘저는 간음을 했습니다!’ 하고 대중을 상대로 고백성사하는 것과 마찬가지지.
아무튼, 살짝 고민하기는 했는데 그냥 말 안 했다.
승환이가 여기저기 소문을 낼까 봐 걱정한 것은 아니다.
저 녀석이 워낙 허튼소리를 하고 다니고, 이상한 짓을 하고 다니니 입이 가벼운 놈이라는 인상이 있는데, 그래도 똥과 된장은 구분할 줄 아는 녀석이다.
…구분할 줄 알겠지?
***
목요일, 창회 고향 근처로 친구들과 떠나는 여행 전날.
준비는 모두 끝났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할 준비는 모두 끝났다. 예산 짜고, 회비 걷고 하는 거.
윗사람으로서 할 일은 모두 끝냈으니, 이제 아랫것들이 먹을 거 구입하고, 차 빌리고 하는 잡일의 관리 감독을 맡으면 된다.
알아서들 잘할 테니, 사실 관리 감독할 것도 없다.
아마 지금쯤 찬희하고 중훈이, 유라, 지연이, 민주 이렇게 다섯 명이서 마트를 털고 있을 것이다. 리스트도 뽑아줬으니, 참고해서 잘 사 오겠지.
찬희하고 중훈이 이 두 녀석만 보냈으면 아마 엉망진창이 되었을 거다. 대형마트 고도의 상술에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면서 문맹이 되었을 거다. 리스트도 못 보고, 가격표도 못 보겠지.
하지만 꼼꼼한 유라도 있고 지연이랑 민주도 따라갔으니, 그 두 녀석은 카트나 끌고 짐이나 들게 시켰겠지.
승환이는 차 빌리러 갔다. 생각했던 것처럼 ‘삼촌’이라고 부른다는 정현식 이사님이 도와주신 것 같다. 다른 애들한테는 이야기 안 했는데, 렌트비가 빠졌다. 보험까지 빵빵하게 넣어주셨다니 든든하네.
자꾸 이렇게 어른들 도움받으면 안 되는데, 버릇 나빠지는데….
뭐 버릇 나빠지는 건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이번에는 도움 좀 받자.
단순히 차 빌려오는 것으로 승환이 임무가 끝나는 건 아니고, 우리가 조성한 비자금으로 어른들에게 진상할 홍삼선물세트 구입도 승환이가 하기로 했다.
나는 홍삼이 그렇게 비싼 줄 몰랐네.
할아버님하고 고모님 세 분, 그리고 혹시 모르니 한 개 더. 그렇게 다섯 세트를 사기로 했다. 할아버님은 제일 비싼 거 그리고 고모님들은 한 등급 낮은 거. 그렇게 해도 50만 원이다.
솔직히 비싸다는 생각이 든다. 홍삼 원가는 그렇게까지 비싼 건 아니라고 뉴스에서 본 것 같은데….
베블런 효과라는 용어가 있다. 가격 대비 성능비가 비슷한 상품이 있으면, 그 상품들 중에서 고가인 상품의 매력도가 더 높게 평가되는, 쉽게 말해 비쌀수록 더 잘 팔리는 그런 과시적 소비 형태를 의미하는 용어이다.
홍삼 가격을 들었을 때, 그 용어가 딱 떠올랐다. 그래서 같은 돈이면 훨씬 더 합리적인 소비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냥 홍삼으로 하기로 했다. 기왕 선물할 거 제대로 해야지. 구입 비용은 렌트비 세이브한 거에 나하고 승환이가 조금씩 더 보태서 마련했다.
그리고 창회는 오늘 먼저 내려갔다.
딱히 먼저 내려가서 준비할 것도 없을 것 같은데, 괜히 눈치 보이니까 미리 가서 싸바싸바 하려고 그러는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다들 자기가 맡은 일들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카페에서 알바하고 있지. 오늘 목요일이니까.
뭐, 평소에도 그렇지만, 오늘은 더더욱 의욕이 안 생긴다.
뭐 내가 초딩도 아니고, 내일 여행 간다고 설레서 그런 건 아니고….
점장 누나가 완전히 본사로 들어갔다.
그 전에도 누나는 지점과 본사를 왔다 갔다 하기는 했었다. 그래도 카페에서 일하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았지. 현장이 메인이고, 본사 업무가 서브였었다.
그랬는데 점점 본사에서 일하는 시간이 늘어나더니, 발령을 받고 나서부터는 완전히 본사가 메인, 여기가 서브가 되어버렸지.
그래도 목요일에는 항상 우리 세 사람이 같이 있었는데, 오늘부터 누나는, 아니지, 이제 본사 대리님은 완전히 본사에 자리를 잡았다.
조만간 새로운 점장이 내려온다고 했는데, 그때까지 나랑 병진이 형 둘이서 일을 해야 한다.
뭐 사람이 줄어 내가 할 일이 늘었다고 짜증 내는 건 아니고, 그냥 심적으로 조금 우울하다.
사실 그것뿐만도 아니다. 병진이 형도 이곳을 떠난다.
정식으로 인턴 계약을 맺었으니, 조만간 교육과정에 들어갈 테고, 교육이 끝나면 다른 지점으로 배치받게 될 거다.
뭐랄까, 다 같이 등을 맞대고 싸웠던 전우들이 하나둘씩 떠나가는 느낌이다.
그때는 진짜 그만둬야지. 두 사람 없으면 너무 허전할 것 같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카운터에 있는 병진이 형을 바라보는데….
저 인간 지금 뭐 하는 거야?
프로페셔널 알바답지 않게, 당황한 얼굴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뭐야? 왜 저러지?
그렇게 생각하며 주문대 앞에 서 있는 손님을 보니….
외국인이네? 그냥 외국인 아니고 여자 외국인이네? 그것도 겁나 예쁜 금발 머리 여자 외국인이네?
뭐야? 저번에 점장 누나가 병진이 형 영어 공부 열심히 했다고, 그래서 외국인 손님 와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응대 잘했다고 그랬는데, 그거 뻥이었던 건가?
딱 봐도, ‘헉! 외국인이다. 아이 돈 노 잉글리쉬.’ 분위기잖아?
안 되겠네. 외국에서 살다 온 경험이 있는 내가 도와줘야겠구만.
속으로 그런 개드립을 치면서 형에게 다가갔다.
“형. 왜 그래요?”
내가 병진이 형에게 그렇게 묻자, 형이 나를 바라본다.
그 눈빛이 ‘도와줘!’라고 외치고 있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그게 손님께서….”
병진이 형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말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