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215화 (215/271)

215 : 화기애매(和氣曖昧) (2)

나는 놀라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어르신, 그러니까 할아버지를 모시는 네 개의 가문을 네 개의 기둥이라는 의미로 사주(四柱)라고 부른다고 했다. 각각의 가문에는 계주(契柱), 인주(印柱), 문주(聞柱), 서주(書柱)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중앙그룹의 강민철 회장님이 계주(契柱), 차기 대선 주자로 떠오른 이현웅 전 경제부총리가 인주(印柱), 그리고 승환이 아버님이신 박기준 변호사님이 문주(聞柱), 그리고 유 선생님이 서주(書柱)라고.

또한 각각의 가문에는 주재목(柱材木)이 있다. 글자 풀이 그대로 기둥의 재료가 될 나무, 즉 후계자를 의미한다.

강 회장님에게는 맏손자인 강우현 그 사람이, 이현웅 아저씨에게는 현직 판사라는 고영건이라는 사람이, 그리고 승환이 아버님에게는 박승환이 주재목이 되는 것이다.

그랬는데, 그날 성북동에서, 유 선생님, 그러니까 서주(書柱)의 주재목만 만나지 못했다.

-작은 어르신께, 죄송한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어르신께는 미리 말씀을 드렸지만, 저희 쪽 주재는 사정이 생겨 참석을 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따로 인사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작은 어르신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유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더랬지.

그때는 워낙 놀라고 정신이 없어서, 특히 힐끔힐끔 날 노려보던 승환이 녀석에게 어떻게 설명해줘야 하는지 고민하느라 깊게 생각 안 하고 넘어갔는데, 나중에 차분하게 생각해보니, 주재목이라는 사람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혈연이라는 공통점 말이다. 계주(契柱)의 주재목은 회장님의 장손자였고, 문주(聞柱)의 주재목은 아들인 승환이였으니까.

그리고 도장을 찍는 기둥이라는 의미의 인주(印柱)도 예전에는 세습이었다는 거다.

아니, 세습일 수밖에 없었지. 왕가(王家)니까. 인주(印柱)는 예전에는 왕실의 역할이었다고 했다. 쉽게 말해 임금님이 할아버지 쫄따구고, 할아버지의 허락이 없이는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는 거지.

하지만, 정치인 역할의 세습은 뭐 조선 시대에나 가능한 이야기고, 선거의 4원칙, 보통선거, 직접선거, 평등선거, 비밀선거에 따라 대통령을 선출하는 현대 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자리를 세습할 수는 없겠지.

여기가 뭐 지역구 대물림하는 일본도 아니고.

그래서 인주(印柱)의 자리는 세습하는 대신, 될성부른 떡잎을 미리 뽑아서 자질을 심사하고 다음 주재목으로 만들어낸다고 한다.

아무튼, 예전에 인주(印柱)의 후계까지 감안한다면, 서주(書柱)의 주재목도 유 선생님과 혈연관계일 가능성이 크다는 계산이 나온다.

거기에 지연이는 오빠가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지, 유 선생님은 사정이 생겨서 참석을 못 했다고 하셨지.

100%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충분히 의심할 만한 상황이기는 했지.

그리고 조금 전, 지연이가 오빠라고 말해주었을 때, 유 선생님의 아드님 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 가설을 떠올렸었고, 그렇기에,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지연이 오빠, 아니, 서주(書柱)의 주재목이 그렇게 말한다.

“…놀랐습니다.”

내가 말했다.

“놀라셨습니까?”

“네. 상상하던 모습과는 달라서요.”

“어떤 상상을 하셨습니까?”

“지연이에게 말씀 많이 들었거든요.”

내 말에 지연이 오빠의 눈빛이 바뀐다.

‘어쭈? 이 녀석 봐라?’ 뭐 그런 눈빛이다.

확실히 이 사람은 다른 주재목들과는 조금 다르다.

뭐, 강우현 그 형님이나 현직 판사님이시라는 고영건 그 사람은 아주 깍듯했었다. 뭐 초면이기도 했고, 작은 어르신과 주재목이라는 그런 관계적 특수성 때문이기도 하고, 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는 말투나 태도는 아주 깍듯했었다.

그렇다고 그게 좋다는 말은 아니다. 솔직히 부담스럽지. 다들 나보다 연장자인데.

그런데, 지연이 오빠는 그 사람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작은 어르신이라고 부르고, 말투도 정중하기는 하지만, 태도가 조금 더 자연스럽달까? 인간적이랄까? 날 바라보는 시선에서 그런 느낌이 든다.

“그리고 조금 전처럼 말씀 편하게 해주시는 게 저는 편할 것 같은데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지연이 오빠는 작게 웃고는

“그래도 될까?”

이렇게 말한다.

그럴 것 같았다. 강우현 그분처럼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작은 어르신에게 반말이라니요.’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네. 그게 자연스럽고 좋을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작게 웃고는.

“…확실히 듣던 대로네.”

그렇게 말한다.

“…누구한테 들으셨는데요?”

“우현이 형.”

역시 그렇구나.

프린스는 아니겠지. 그 사람은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니까.

하지만 강우현 그분이라면 이해가 간다. 같은 사주 가문이고, 주재목이고,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니까.

“…뭐라고 하셨는데요?”

솔직히 궁금하다.

강우현 그 형님하고 나하고 친분은…. 거의 없지?

두 번 만났다. 처음은 나 퇴원할 때.

그리고 그 누구냐? 아, 이름도 까먹었네. 제이슨 임에게 사주받아서 나 폭행했던 그 양반.

장영호! 그래 장영호.

그 인간하고 쇼부 보러 갈 때, 도와주겠다고 중앙의 힘을 이용해라, 뭐 그런 이야기할 때 만났고.

그때도 특별히 뭐 별다른 이야기를 한 건 없는 것 같은데…?

“비밀. 안 알랴줌.”

조금 전, 낮은 목소리로 ‘반갑습니다. 작은 어르신’ 그렇게 인사했던 서주(書柱)의 주재목은 어디로 가고, 지연이 오빠가 돌아오셨네.

그래. 차라리 이게 편하다.

하지만 ‘안 알랴줌’은 좀 그렇다.

그거 별로예요. 아재 같아요.

***

목소리 톤이 낮아지고, 음량이 줄어들면서, 자연스럽게 얼굴도 가까워진다.

지연이 오빠와 나 사이에 브로맨스가 싹트는, 그런 상황은 아니고, 화장실에 간 지연이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까 자연스럽게 눈치를 보고 있는 중이다.

나쁜 일을 모의라도 하는 뜨내기 악당처럼 그러고 있었지만, 막상 내용은 별거 없다.

“그러니까, 지연이는 아직 모른다?”

“네.”

아버님이 유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모르는 척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연이는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줬거든.

입을 맞출 필요가 있으니까.

“그럼 나도 그냥 지연이 오빠?”

“네. 그렇죠.”

“아버지 이야기했으면 상황이 꼬일 뻔했네.”

“그러게요.”

“그러면 문주님 아드님은? 이름이 박승환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 친구는?”

“네. 승환이 맞아요. 그 녀석도 유 선생님에 대해서는 아는데, 지연이가 선생님의 영애라는 건…. 얘기했나? 안 했던 것 같은데요? 그건 아마 모를 거예요.”

“그래? 이야기 안 했어?”

“네.”

“친구라며?”

“네.”

“안 친해?”

“친한 편인데요. 아니요. 친해요.”

“그런데 왜 이야기 안 했는데?”

지연이 오빠가 그렇게 물어본다.

“아니. 그냥….”

“그냥?”

“제가 뭐. 당사자도 아니고. 지연이가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사실 별생각 없었다.

물론 승환이 친한 친구이긴 하지. 솔직히 친하지. 베프 비슷한 거 맞기도 하다. 최근에는 우리 두 사람만의 비밀도 공유하고 있기도 하고.

그렇다고, 야. 너 그거 알아? 이거 너만 알고 있어. 그러면서 주절주절 이야기하는 거….

되게 없어 보이잖아.

할아버지가 그랬다. 남자는 세 가지를 조심하라고.

그거, 그거, 그리고 그거.

“흐흠.”

아무튼, 지연이 오빠는 그런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내 얼굴을 바라본다.

뭐지? 이 반응 뭐야?

“지연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요? 저나, 유 선생님이나. 뭐. 할아버지와 관련된….”

내가 물었다.

“어. 그 녀석은 아무것도 몰라. 엄마도 모르고. 나하고 아버지만.”

그렇구나.

중앙그룹은 꽤 여러 사람 아는 것 같던데, 승환이네도 그 삼촌이라고 하는 정현식 이사님. 그분도 알고 계시는 것 같고.

역시 유 선생님 쪽은 학문 담당이라 그런가? 뭔가 좀…. 단출하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개인적인 질문을 해도 될까?”

개인적인 질문?

뭔가 싸한데….

“네. 뭐.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사귀는 건 아니지?”

“네? 저요?”

“어. 작은 어르신, 설마 우리 지연이하고….”

“아니요.”

나는 재빨리 고개를 가로저었다.

빠르게 좌우로 움직이는 내 머릿속에 탄두에 칼집이 나 있는 9mm 할로우 포인트 탄환이 떠올랐으니까.

즉각적이고 분명하게 대답을 했지만, 저 양반은 날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아니, 진짠데, 사귀는 건 아닌데,

아직은….

아니 아니, 뭐 나중에 사귄다거나, 사귈 거라거나 그런 건 아니고, 물론 지연이가 참 좋은 후배를 넘어 좋은 사람이고, 나를 좋아해주고, 나도 그게 과분하다는 것을 알기는 아는데….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머릿속에 불현듯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나에게 하는 질문이.

‘아직은’이라고?

***

만약 몇 달 전에, 지연이가 고백하기 이전에, 아니, 고백을 받고 나서도 이런 질문을 받았다면 나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아니라고,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확답했을 것이다.

물론 지연이가 부족하다거나, 내 스타일이 아니라거나 그런 건 아니다.

지연이 참 좋은 녀석이지. 예쁜 건 둘째 치고, 사람으로서도 참 좋은 녀석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자로 호감을 느낀다거나, 사귀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함께 있으면 즐겁고, 행복한 좋은 후배, 좋은 친구, 좋은 사람. 그런 느낌이었지.

그리고 사실 내 마음은 서현 씨를 향해 있었다고 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할 것이다.

물론 서현 씨에 대한 마음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거나, 꼭 사귀고 싶다거나 그런 마음까지는 아니다.

그냥, 지수랑 그렇게 헤어진 후, 처음으로 어떤 의미를 가진 여자 사람이 서현 씨였으니까,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이었으니까.

단순히 수치로 계산한다면, 이성으로서 서현 씨에게 조금 더 점수를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랬는데….

내 마음속 한구석에서 어느샌가 지연이가 확실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지연이가 언제 이렇게까지 커져 있었지?

무의식적으로 ‘아직은’이라는 단서를 붙일 정도로….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지연이 오빠의 목소리가 내 의식을 표면 위로 끌고 올라온다.

“뭐, 여동생 연애 문제에까지 간섭하는 개념 없는 오빠 소리를 듣고 싶은 것은 아닌데…. 아무래도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어서. 특히 너는, 아니, 작은 어르신은. 이해할 수 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할 수 있다.

주재목이고, 작은 어르신이라는 특수관계를 떠나서, 오빠다. 당연히 이해할 수 있지.

아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음에 이어질 말을 듣기 전까지는.

“주제넘은 말이라는 건 알아. 어른들이 알게 되면 경을 치시겠지. 하지만 지연이의 오빠 입장에서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지. 용납되지 않는 미래이니까 더더욱.”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지연이 오빠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 속에 포함된 ‘용납되지 않는 미래’라는 구절을 이해할 수가 없었으니까.

“지금 그 말씀이….”

그렇게 물어보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왔다.”

지연이 오빠의 그 말과 동시에 지연이가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

월요일에는 항상 그와 함께 집으로 갔었다. 그가 항상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랬는데, 오늘은 택시 옆자리에 그 대신 오빠가 앉아 있었다.

물론 싫다는 것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보는 오빠였는데, 싫을 리가 없었다. 반갑고 행복했다.

반갑고 행복하다는 감정이 그녀의 마음 대부분을 차지하고는 있지만, 그런 감정 뒤에 뭐라 설명하기 힘든 감정도 남아 있었다.

아니,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

아쉬움. 그런 이름이 붙어있는 감정이었다.

그의 빈자리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좋아해?”

오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갑작스러운 질문에 유지연은 놀란 눈으로 오빠를 바라보았다.

오빠는 미소가 담긴 눈으로 유지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동생을 아끼고 걱정하는 오빠의 눈이었다.

“좋아하냐고. 그 친구.”

유지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발끝을 바라보았다.

알고 있었다. 그 동작이 대답이 된다는 것을.

“괜찮은 사람 같더라.”

오빠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인기 많지? 그 친구.”

“…응.”

“여자 친구는?”

“….”

유지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발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발끝을 바라보며 한 사람을 떠올렸다.

강서현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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