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 나무 잡고 퉤퉤퉤 (2)
손님 중에서 가장 고마운 손님이 누구냐고 물어보신다면, 나는 컵을 직접 카운터로 가져다주시는 손님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컵 회수대가 있으니까 거기에만 놔줘도 참 고맙지. 요즘은 많이 줄었지만, 다방 온 걸로 착각했는지 그냥 그 자리에 컵 놔두고 가는 개념 없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그렇다고 치울 수도 없는 게, 손놈, 아니 손님께서 다 처드시고 가신 건지, 아니면 잠시 담배를 피우러 가신 건지, 똥 누러 가신 건지 확신이 안 들 때가 있다.
차라리 노트북이나 가방 같은 거 놓고 갔으면, 아 손님께서 배가 고프셨구나. 그래서 독서실도 아닌데 자기 자리 찜해놓은 것처럼 저렇게 지 짐을 두고 개념 없이 밥을 처드시러 가셨구나, 하고 판단할 여지도 있지만, 짐도 없이 그냥 컵만 딸랑 놓여 있으면 고민이 된다.
치워도 될까? 그렇게.
보통은 그냥 치우면 되는데, 진짜 가끔씩 아직 자기 커피 다 안 마셨는데 치워버렸다고, 새 커피 내놓으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진짜다. 진상의 세계는 진짜 깊고 무궁무진하다.
아무튼, 그런 진상들이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닌데, 짜증은 나니까 자꾸 사람이 눈치를 보고 위축되게 된다.
진상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고, 아무튼, 그러니 컵 회수대에만 가져다주셔도 참 고마운 손님이신데, 친히 카운터까지 컵을 가져다주신다?
아오. 그런 분은 가시는 걸음걸음마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을 뿌려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아무튼, 그런 고마운 손님들인데…. 손님들인데….
왜 오늘따라 이렇게 분위기가 사납냐?
컵을 가져다주시는 건 고마운데, 매우 분노가 가득한 눈으로 날 노려보고 가신다.
아니, 왜 그러시지? 내가 음료 늦게 만들어드려서 그런가? 그렇게 늦지도 않았는데…. 조금 늦기는 했지만, 저렇게 분노의 가득 찬 시선을 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왜 그럴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런 고민을 하다 보니, 공통점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눈으로 분노를 뿜어내고 있는 손님들은 대부분 남자다. 그것도 젊은 남자 손님. 물론 안 젊은 남자 손님도 있고.
그리고 또 공통점 하나.
일단 분노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 후, 애잔한 눈빛으로 지연이를 한 번 더 바라본다.
역시 아까 그거 때문인가? 이마가 맞닿은 거, 그거 때문인가?
카운터 뒤에서 그랬다고는 하지만, 거기가 밀폐된 공간도 아니고, 손님들이 보려고 한다면 다 보이는 그런 개방된 공간이기는 하다.
아니, 근데, 무슨 카운터가 무대도 아니고 사람들이 그걸 다 본 건가? 왜 다들 분노의 눈빛을 쏘고 가는 건데?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뭐 이해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우리 지연이가 워낙 예뻐야지. 그냥 예쁜 것도 아니고, 진짜 예쁘잖아. 저 녀석이 여기서 알바 시작하고 매출이 급증했다는 것이 수치로도 나타난다고 하니까. 본사에 들어가 있는 점장 누나의 전언에 따르면 이유 없이 매출이 증가하니까 본사에서도 무슨 일인가 궁금해했다고도 하고.
흠. 그런 건가. 그런 것인가…. 그런 거겠지?
아니, 내가 지연이랑 카운터 뒤에서 꽁냥꽁냥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뭐랄까, 친한 사람들끼리 건강과 안부를 주고받는 인사를 나눈 것뿐인데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려고 하다가, 손님들에게 생글생글 웃는 지연이를 보니 뭐 또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저 녀석이 워낙 예뻐야지.
사실 그것 때문에 처음에 점장 누나도 걱정을 했었단다. 누나나 카페 입장으로서 좋기는 한데, 이상한 사람 때문에 지연이가 마음고생을 할까 봐서.
점장 누나도 그랬단다. 점장 누나가 처음 알바로 카페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이상한 사람들이 몇 접근을 해왔었다고.
대놓고 전화번호를 물어보거나 하는 경우는 차라리 괜찮다고 했다. 그래도 상식선에서 행동하는 거니까.
정중히 거절하거나, 남자친구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 죄송하다고 하고 물러났단다.
그래. 그 정도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
문제는 상식이라는 선을 넘어서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전화번호를 물어본다거나, 자기 명함을 준다거나 그런 적극적인 액션을 취하지는 않는데, 누나가 웃어주고 말 걸어주고 그러면 그걸 자기를 좋아한다고 착각을 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다.
그나마도 착각하는 데에서 끝나면 다행인데, 그런 착각이 무럭무럭 자라서 망상이 되고, 혼자서 연애를 해버리는 상황까지 가버리면 이상한 사람을 넘어 위험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거다.
내가 여기 카페에서 알바 하기 전 있었던 일인데, 경찰까지 출동할 정도로 심각한 경우가 있었다고 했다.
그런 끔찍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누나도 지연이에 대해서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는 거겠지. 나에게도 몇 번씩 물어보고는 했다. 이상한 사람 안 보이냐고.
나도 그런 걱정을 좀 하기는 했다. 축제 때도 그랬고, 학기 초에도 그런 비슷한 일이 있기도 했었고….
그치만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 그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지연이에게 물어봐도 다들 친절하다고만 하지, 특별한 액션을 취한 사람은 아직까지 없었다고 했다.
아, 그런 인간들은 있었지. 연예인 할 생각 없냐고.
하지만 HS엔터테인먼트 소속인 우리 지연이가 소속사가 있다고 말하면 다들 ‘그럼 그렇지. 이 정도로 원석(原石)이 소속사가 없을 리가 없지.’ 같은 표정을 하고는 다들 쉽게 물러났단 말이지.
뭐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놓고 있거나 그런 건 아닌데, 우리 지연이가 그냥 예쁜 게 아니고, 껄떡거리기 어려울 정도로 예쁘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아무튼, 그런 관점에서 따지면 날 노려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 그게 다 우리 지연이가 예쁘다는 반증 아닐까?
***
그래도 열심히 몸을 움직였더니, 조금 정신을 차릴 수 있는 것 같다.
물론, 알바가 끝나고 다시 집에 가서 서현 씨를 보게 되면 또 머리가 복잡해지고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겠지.
수학이 아니라서 특정 값으로 떨어지는 정답은 없겠지만, 논술형 문제에도 분명 평가 기준은 있다.
분명 정답은 있을 거다.
서현 씨가 무슨 마음으로 나에게 키스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지.
그 문제는 일단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나는 몸을 움직이는 데 집중했다.
그래서 마감을 할 때, 업무 분장도 좀 바꿨다.
저번 주까지는 포스기 마감과 시재, 카운터와 바리스타존을 내가 담당하고, 홀과 화장실 청소를 지연이에게 맡겼다.
근데 오늘은 내가 홀과 화장실을 청소하고 지연이에게 카운터와 바리스타존을 맡기기로 했다.
물론 포스기 마감과 시재는 아직 지연이에게는 무리라서, 청소 끝나면 지연이랑 같이 하기로 하고.
확실히 몸을 움직이는 게 복잡한 머리 정리하는 데는 최고다. 청소, 특히 물청소는 무언가 복잡한 마음속까지 씻겨 내려주는 것 같은 그런 청량함이 있다.
병진이 형은 내가 전생에 머슴이라서 그런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지만, 청소할 때마다 이렇게 기분이 풀리는 걸 보면, 진짜 전생에 마당을 예술적으로 쓸어놓고 흐뭇해하던 꽃미남 조선 쌍놈 아니었을까?
그리고 신기한 게 매장 청소는 좋은데, 내 방 청소는 또 귀찮단 말이지.
아무튼, 홀에 이어서 그렇게 화장실까지 깔끔하게 청소해놓고, 포스기 마감하려고 다시 매장 안으로 들어서는데….
어라?
폐점 시간이 가까워서 텅 비어있어야 할 매장에 손님이 있네?
아니, 아직 폐점은 아니니까, 포장 손님이 있을 수도 있다. 있을 수도 있는데….
손님을 대하는 지연이의 표정이 평소의 지연이와는 다르다.
놀랐다? 아니, 당황했다는 표현이나 곤란해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에 반해 손님은 웃고 있다.
일단 손님은 남자 한 명이다. 면바지에 티셔츠. 특별히 꾸몄다거나 하는 느낌 없는 무난한 복장이다.
근데 문제는 좀 생겼다. 멀리서 봐도 키도 크고 비율도 좋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얼굴도 좀 잘생긴 것 같다.
그렇다고 뭐 흔히 재수 없게 잘생긴 그런 건 아니고, 뭔가 좀 자연스럽게 미남인? 잘생겼는데 호감도 주는 그런 인상의 남자 손님이다.
남자는 웃고 있고, 지연이는 곤란해한다? 폐점이 가까워 다른 손님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이 시간에?
뻔하다. 그거다. 아까 말했던 이상한 놈.
진짜 말이 씨가 된다고, 아까 전에 잠깐 그 이상한 생각 했다고 바로 나타나는 것도 신기하다.
나무 잡고 퉤퉤퉤 할 걸 그랬어. 이젠 생각도 마음대로 못 하겠네.
나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곧바로 카운터로 다가갔다.
그리고 아까 전, 지연이가 블렌더 앞에서 날 밀어냈던 것처럼, 나도 몸으로 지연이를 살짝, 가볍게, 밀어내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가까이서 보니까 개 잘생겼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잘생긴 프린스까지는 아니어도, 잘생기긴 잘생겼다. 아니, 프린스하고는 결이 좀 다르다. 꼭 분류를 하자면 프린스와 서현 씨 오라버니인 강우현 팀장님의 중간 정도쯤 위치한 잘생김이다.
아무튼 서비스업의 숙명이랄까? 아니, 프랜차이즈의 슬픈 현실이랄까?
일단 진상도 손님은 손님이다. 그러니까 ‘당신 뭐야? 뭔데?’ 그렇게 처음부터 다짜고짜 막 나갈 수는 없다.
그래서 상대방이 빌미를 줄 때까지는 일단 손님으로 상대해야 한다.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근데 나도 사람인지라, 자연스럽게 범죄와의 전쟁 허 사장 나이트클럽의 김판호 전무 톤이 나온다.
포장이면 후딱 포장해서 꺼지라고.
근데 대답이 없다.
뭐야? 쫄았어? 여자 혼자 있는 줄 알고 껄떡거리려고 했는데 갑자기 내가 나오니 쫄았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상대방을 보니.
웃고 있다. 전혀 당황한 기색도 없이, 자연스럽게 웃는 얼굴로 날 보고 있다.
보통 남자가 나오면 쫄거나, 아니면 당황하거나 하는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네?
그렇구나. 그냥 진상 손님이 아니셨구나.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진상 오브 진상. 슈퍼 진상이구나.
하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는다.
형이 돈이 없다 그래서 쪼까내고, 말도 안 되는 주문한다 그래서 쪼까내고, 어떤 진상은 얼굴이 기분이 나빠 그래서 쪼까내고, 그렇게 형한테 쫓겨난 진상이 4열 종대 앉아 번호로 연병장 두 바퀴다. 지금 형이 피곤하거든, 마감 시간이잖냐. 그냥 조용히 포장해서 가라.
“뭐 필요한 거 있으십니까?”
내가 다시 물었다.
뭐라고 말 좀 해봐. 왜 가오 잡고 싶어? 그럼 가오 잡아보든가. 여기 CCTV 있거든? 지금 녹화 중이거든?
그랬는데, 상대방에게서 들려오는 말은 전혀 예상 못한 멘트였다.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잘생긴 진상 오브 진상이 그렇게 말한다.
응?
이야기 많이 들었다고?
이 상황에서는 나도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다.
“네?”
그렇게 되물었다.
하지만 잘생긴 진상은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움직여 지연이를 바라보고는.
“맞지? 학교 선배라고 했던 그 친구?”
그렇게 물어본다.
응?
그리고 들려오는 지연이 목소리.
“응.”
응?
‘응’이라고? 지금 지연이가 ‘응’이라고 대답한 거야?
“이렇게 만나게 되네요. 반갑습니다. 유지훈입니다.”
잘생긴 진상이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민다.
유지훈? 유?
그리고 옆에서 들려오는 지연이의 나지막한 말소리.
“…오빠예요.”
오빠?
미국에서 공부한다는 지연이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