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 나무 잡고 퉤퉤퉤 (1)
“주문 확인 도와드리겠습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란데 사이즈에 샷 추가, 아이스 카페라떼 디카페인으로 그란데, 얼음 많이. 카푸치노 시나몬은 빼고 우유 거품 따뜻하게. 흑당밀크티 코코넛 펄에 당도 30%, 얼음은 보통보다 조금 적게. 맞으신가요?”
카운터 앞에 지연이가 포스기를 꾸욱꾸욱 누르며, 저 긴 주문을 한 번의 버벅거림도 없이 자연스럽게 반복한다.
일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저런 복잡한 주문을 자연스럽게 처리하는 걸 보면 확실히 지연이가 똘똘하기는 똘똘하다.
나도 꽤 일머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지연이만큼 빠른 시간에 적응했다고 자신 있게 말 못 하겠다.
아무튼, 저렇게 성장한 지연이를 보면 선배로서, 사수로서 대견하고 기쁘고 그래야 하는데, 사실 나는 지금 아무런 생각이 없다.
내가 지연이에게 유독 엄격하거나 특별히 미워해서 그런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냥 단순히 반쯤 정신이 나가 있는 상태라는 이야기다.
“오빠.”
“….”
“오빠?”
“…어. 응?”
“오빠 무슨 일 있어요?”
지연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아니. 아무 일 없는데.”
내가 그렇게 말했지만, 지연이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아, 주문?”
“…네.”
“미안. 금방 만들게.”
나는 그렇게 말하고 주문서를 확인했다. 거기에는 조금 전 지연이가 말했던 복잡한 주문이 빼곡하게 담겨 있다.
“…괜찮아요?”
“응? 어. 괜찮아. 미안. 잠깐…. 아니야. 괜찮아.”
나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사실 괜찮지 않았다.
***
서현 씨의 촉촉하고 부드러운 입술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니, 사실 정확히 모르겠다. 그때 내 의식은 순간적으로 날아가 버렸고, 입술의 촉감만을 제외하고, 모든 감각이 전부 다 멈춰버렸으니까.
천천히 입술을 떼어낸 서현 씨는 잘 자라는 인사를 남기고 떠나갔다.
잘 자라고?
살면서 그렇게 무책임한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잠 못 자게 해놓고, 잘 자라는 인사라니.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된 채로, 창가 너머로 여명이 비추어 올 때까지, 그렇게 밤을 지새워야 했다.
그다음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머님께 약속드렸던 것처럼 아침을 준비했었던 것 같고, 오전에는 서현 씨와 어머님과 근처 공원을 산책했던 것 같다.
어떻게 공항에 왔는지, 어떻게 비행기를 탔는지, 그리고 어떻게 집에 왔는지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히 기억나는 것은 서현 씨가 평소의 서현 씨였다는 것이다.
평소와 같은 얼굴, 평소와 같은 표정,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나를 대했다는 것이다.
집에 돌아와 간단한 음식으로 요기를 때우고, 각자의 침실로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서현 씨는 그날 밤의 그 일이 없었다는 듯 평소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날 밤의 그 짧은 입맞춤, 그리고 그 이후 보여준 서현 씨의 모습.
혼란스러웠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질문이 끝도 없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 반쯤 정신이 나가 있는 것이다.
의식의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되지 않는다. 조금만 정신을 차리면,
“오빠!”
날카롭게 고막을 파고드는 지연이의 목소리에 의식이 재빨리 현재로 돌아온다.
“어?”
“잠깐만요.”
지연이는 그렇게 말하고 힘주어 날 밀어낸다.
갑자기 왜 그러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지연이가 힘차게 돌아가는 블렌더 스위치를 눌러 끈다.
블렌더? 블렌더가 왜 돌아가고 있지?
“오빠, 괜찮아요?”
지연이가 나에게 묻는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지연이를 바라보았다.
내 시선 끝에는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지연이의 눈동자가 있었다.
“…미안. 나 세수 좀 하고 올게.”
내가 그렇게 말했고, 지연이는 걱정스러운 시선을 나에게 고정한 채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가장 차가운 물을 얼굴에 몇 번 끼얹고 나니 그제서야 조금 정신이 든다.
그러고 나서야 조금 전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그림이 그려졌다.
아까 주문서에 뭐가 있었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블렌더를 사용할 주문은 없었던 것 같다. 그랬는데 나는 무의식적으로 블렌더를 가동한 거다. 안에 아무것도 넣지 않고서.
그 모습을 보고 지연이가 나에게 달려온 것이다.
물론 뚜껑이나 방음 커버와 같은 안전장치가 갖춰져 있지만, 칼날이 돌아가는 블렌더는 위험한 물건임에는 틀림이 없다.
큰일 날 뻔했네.
나는 거울 속 내 모습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거울 속 내가 한심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심한 표정으로, 지금 고민하는 것은 수학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수학 공부를 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원리의 개념이해나 공식의 암기가 아니라고 했다. 물론 개념도 공식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납득할 때까지 고민하고, 파고드는 마음가짐이라고 했다.
분명히 배웠던 개념이고 풀었던 문제인데 풀리지 않는다면, 바로 답을 찾아보지 말라고 했다. 풀이 과정 어디에서 오류가 일어났는지, 어떤 개념이 잘못 적용되었는지를 끝까지 고민하고 파고들어야 다음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고.
특정 답이 정해진 수학은 그럴 수 있었다. 그래야 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수학이 아니었다. 공식이나 개념원리라는 것도 없었고, 무엇보다 정해진 풀이 방식도, 답도 없었다.
“일단… 정신 차리자.”
거울 속 내가 그렇게 중얼거린다.
일단 지금은 일하는 거에 집중하자.
***
화장실에서 나오자 지연이가 나를 바라본다. 그 시선에 걱정이 한가득이다.
당장 쪼로로 다가와 괜찮은지 묻고 싶은데, 주문 중인 손님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네? 아. 네. 죄송합니다. 소이라떼 말씀이시죠?”
역시 주문 잘못 알아들었다.
나는 그런 지연이를 보고 작게 웃었다.
미안하네. 저 녀석에게.
지연이를 봐서라도 다시 한번 정신 차리자,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정신줄 놓은 사이에 주문서가 한가득이네.
그래. 누가 그랬다. 머리를 쉬게 하고 싶을 때는 몸을 피곤하게 만드는 게 최고라고.
머리 좀 쉬게 하자.
그렇게 생각하고 음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최소한의 동작과 최대한의 효율로 한 번에 3가지 음료를 만들고 있는데, 지연이가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다가온다.
“주문서? 거기 붙여줘.”
내가 그렇게 말했지만, 지연이는 여전히 날 바라보고 있다.
“왜?”
“괜찮아요?”
“아니. 안 괜찮아요. 지금 개 바빠요. 물론 내 잘못이라는 걸 아니까, 무책임하게 불평할 생각은 없고요. 지연 씨에게도 좀 미안하고 그래요.”
내가 그렇게 개드립을 치자, 지연이는 평소의 내 모습이라고 생각했는지 작게 웃는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눈빛이다.
“진짜 괜찮아. 정말로. 레알.”
내가 그렇게 말하자.
“오빠, 잠시만요.”
지연이가 그렇게 말하고 한 걸음 다가온다.
어머. 얘 보게. 얘 뭐 하려고 그래?
내가 거부하고 어쩌고 자시고 할 틈도 없이 지연이의 손이 내 이마에 닿는다.
그렇게 지연이의 손이 닿으니까, 나도 모르게 몸이 굳어버린다. 부동자세가 되어버린다.
“흐음.”
내 이마에서 손을 떼어낸 지연이가 그렇게 알 수 없는 소리를 낸다.
“뭐야? 깜짝 놀랬잖아. 깜박이를 켜고 들어와야지! 괜찮다니까?”
“…열 있는 거 아니에요?”
지연이가 그렇게 말한다.
열? 그런 느낌은 없는데?
나는 혹시나 싶어 내 이마를 짚어보았다.
…열은커녕, 방금 찬물로 세수하고 와서 차갑기만 하구만.
“열 없어요. 지연이 손이 차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전 괜찮습니다. 조금 있다가 설명해 줄게. 저기 손님 오셨다.”
내 말에 지연이는 뒤를 돌아보고는 손님 맞이 인사를 하고도 카운터로 뛰어가지 않는다.
나를 한 번 돌아보고, 진짜 괜찮겠냐는 눈빛을 한 번 주고, 블렌더도 슬쩍 한 번 보고, 다시 날 보고.
“내가 주문받을까? 지연 씨가 음료 만드실래요?”
그런 말을 듣고 나서야 카운터로 향한다.
참나. 저 녀석.
참 착해.
***
그래도 내가 여기서 알바 한 시간이 얼마고, 처리한 진상 손님이 얼만데, 거짓말 쪼오금 보태서 얇은 책 한 권 크기로 쌓인 주문서를 처리하는 데 20분이 안 걸렸다. 리소토도 하나 포함되어 있었는데 말이지.
아무튼 그렇게 주문서를 처리하고, 조금 짬이 나자 지연이에게 변명을 할 여유를 찾게 되었다.
사실 이번 주에 우리 여행 가잖아? 그 이야기 서현 씨에게 했다가 갑자기 서현 씨랑 둘이서 여행 가게 되었거든. 그게 지난주 금요일이었는데, 서현 씨가 자기가 다 알아서 준비하겠다고 해서 그냥 알겠다고 맡겨뒀는데, 알고 보니 괌이었네? 서현 씨가 우리 고향 집에 가서 내 여권도 챙겨오고, 비행기도 몰래 예약하고, 그것도 비즈니스로. 그랬네?
그렇게 얼레벌레 괌으로 갔는데, 거기 서현 씨 어머님이 계셨네? 그래서 머스탱 타고 해안도로 드라이브도 하고, 어머님이 차려주신 행복한 집밥 먹고, 옷도 한 트럭 쇼핑하고, 70억짜리 요트 타고 태평양 가서 돌고래 보고 스노클링하고, 미국 영화에서 보던 바비큐 파티까지 하고, 와 이번 여행 진짜 끝내준다고 했는데, 그날 밤에 서현 씨가 키스를 해주네?
그것 때문에 그날 밤잠 한숨도 못 자고, 지금까지 정신 못 차리고 있었던 거라고는 죽어도 말 못 하지.
“…친척 어르신이요?”
“어. 뭐… 그런 범주의?”
예전에 친척(어르신과 다름없는)분께서 밥 한번 먹으러 오라고 하셨는데, 지난 주말에 갑자기 뵙게 되었다. 뭐 그랬는데 거리가 좀 있어서 다녀오니 피곤하다. 그래서 정신 못 차렸다. 뭐 대충 그런 식으로 설명해 주었다.
사실 따지면 거짓말은 없어. 오해할 소지는 많은데, 거짓말은 안 했다.
“많이 힘들었나 봐요. 여독이 오래가는 걸 보니.”
“아. 하하. 뭐. 아니야. 미안해. 이제는 정신 차렸어.”
“진짜 괜찮아요? 아픈 거 아니에요?”
“아니야. 괜찮아. 진짜로.”
나는 그렇게 말하고 지연이 손을 잡아 직접 내 이마에 가져갔다.
그나저나. 이 녀석 손 부드럽네.
“흐음.”
지연이는 내 이마를 짚어보면서 또 그런 할아버지 같은 소리를 내더니.
“…잠깐만요.”
그렇게 말하고는 갑자기 얼굴을 들이민다.
뭐! 뭐야! 이 녀석! 갑… 갑자기! 이렇게 거침없이 스킨십을….
아니지, 스킨십이라는 단어는 사실 영어에는 없는 단어다. 피크타임을 의미하는 골든타임이나 항공사 승무원을 의미하는 캐빈 어텐던트처럼 일본에서 만들어진 재플리쉬다. 정확한 영어식 표현은 피지컬 컨택트라고 하는 게 맞다. 물리적 접촉.
아무튼,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아니, 내 입술이 아무리 촉촉하고 도톰해서 탐스럽다고 해도 이렇게 상대방의 동의도 없이 피지컬 컨택트를 시도하면 안 되는 건데? 서로의 마음도 확인하고, 그리고 서로가 이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 그리고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멍청한 생각을 하는 사이에….
지연이의 이마가 내 이마에 살포시 닿는다.
그러고는.
“흐음. 진짜 열이 없는 것 같기도 한데…. 잠시만요 조금 따뜻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말을 한다.
당연하지! 지.지.지.지금 이 상황에서 얼굴에 피가 몰리지 않을 수가 있겠냐?
“…진짜 괜찮아요?”
이마를 떼어낸 지연이가 그렇게 물어본다.
안 괜찮아!
괜찮아졌었는데 너 때문에 안 괜찮아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