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 Knock Knock (8)
유주원 교수님?
우리 유 선생님?
“…우리 유 선생님이요?”
“네. 한국대 대학원에 진학하셨어요.”
어머님 우리 선배님이셨구나.
사실 엄밀히 말하면 학부와 대학원은 좀 다른 개념이기는 하다.
그래서 개중에는 우리 학교 대학원에서 학위를 받았다고 해도, 학부를 다른 학교에서 나왔으면 선배 아니라고 생각하는 놈들도 있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이 순혈주의 파시스트 같은 바보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잠깐만. 그러면 어머님께서 우리 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셨고, 그래서 유 선생님을 만났고. 그런데 어떻게 아버님을 만나게 되신 거지?
“유주원 교수님, 당시는 대학원 최고참 선배셨는데, 엄마를 좋게 보셨대요. 공부 열심히 하고, 착하고, 성실하고. 그래서 자기가 알고 지내는 동생 하고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셨대요.”
“알고 지낸다는 동생분이….”
“우리 아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 선생님도 사주(四柱) 중 하나이고, 서현 씨 아버님은 강 회장님 아들이고. 그러면 그 전부터 친분이 있었다?
잠깐만. 거기까지는 그림이 그려지는데, 근데, 설마 유 선생님이 아버님과 어머님 사이에 그 배경도 알고 계셨던 것일까?
“교수님께서는 모르셨었대요. 두 사람이 이미 한 번 만났던 사이였다는 걸, 그리고 그 한 번의 만남이 서로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는 걸.”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서현 씨가 말해준다.
다시 한 번 더 ‘운명’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교수님은 고민하셨대요. 두 사람 다 정말 자기가 아끼는 사람들이고, 서로 정말 잘 맞을 것 같은데, 후배도 그렇고 알고 지내는 동생도 ‘좋은 사람 있으니까 한번 만나보지 않겠냐’고 말해봤자 들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서. 그래서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가 작전을 꾸미셨대요.”
***
신소현은 조금 긴장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대학원 선배에게 별일 없으면 저녁이나 같이 하자는 권유를 받았다.
자신에게 관심 어린 눈빛을 보이는 다른 선배들의 권유였다면, 별다른 고민 없이 거절했겠지만, 학문적으로도, 인격적으로도 존경하는 선배의 권유였다.
그리고 어쩐지 거절하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도 받았다. 어떤 논리적 이유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느낌이었다.
그런 느낌으로 권유를 받아들였고 선배와 함께 신촌에 있는, 분위기가 좋은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자리에 앉고 나서야 존경하는 그 선배로부터 당혹스러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약속이 있었는데, 다른 후배와 같이 저녁을 먹기로 먼저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깜빡했다고. 혹시 괜찮으면 같이 만나도 괜찮겠냐고.
괜찮지 않았다. 당연히 불편했다. 하지만.
-많이 불편하면 그쪽에 양해를 구하도록 할게. 다음에 보자고. 미안하다고.
그렇게 말하는 선배에게 차마 불편하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미안하다고 오늘은 자리를 비켜달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면, 속으로는 조금은 속상했겠지만, 괜찮다고 말 할 수 있었을 텐데, 차라리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리를 비켜줄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상대방에게 양해를 구하겠다는 선배의 말에, 신소현은 괜찮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밥만 먹는 거니까.
전화를 걸어 상대방에게 양해를 구하는 선배를 바라보면서 신소현은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해주었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불편하고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기에, 조금은 긴장된 얼굴로 앉아 불편한 손님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잘한 선택이었는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고민이 후회라는 감정으로 바뀌려는 찰나,
“어! 이쪽이야.”
선배가 손을 들어 누군가를 반겼다.
밥만 먹는 거니까.
신소현은 그렇게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이야기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굴을 확인하고, 웃는 얼굴로 인사하고, 불청객이 되었음을 사과해야지.
그렇게 마음을 먹고, 막 식당 안으로 들어오는 누군가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방금 전 세웠던 계획을 잊어버린 채, 놀란 얼굴로 다가오는 사람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놀란 얼굴로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은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5년 만에 보는 그 사람이, 그리고 신소현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도 못한 채 서로의 얼굴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
“상상이 안 돼요.”
내가 말했다.
“어떤 부분이요?”
서현 씨가 물었다.
“유 선생님이 그런 계획을 꾸미셨다는 부분이요.”
항상 선비 같으신 우리 유 선생님이 그런 서프라이즈를 꾸몄다는 것이 상상이 안 간다.
선생님도 젊으셨을 때는 재미있는 분이셨구나.
“그러게요. 저도 엄마에게 처음 이야기 들었을 때, 제가 아는 그 유주원 교수님 맞냐고 다시 물어봤었어요.”
서현 씨도 웃으며 그렇게 말한다.
“아무튼, 그래서요? 그다음에 어떻게 되었는데요?”
“엄마는 그때 처음으로 운명이라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셨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전해 듣는 나조차도 몇 번이나 ‘운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던가.
“아버님도요?”
“엄마에게 전해 듣기로, 아빠는 레스토랑에 들어오기 전까지 조금 기분이 상해있는 상황이었었대요. 중앙그룹 오너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최대한 감추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는 사람은 알고 있었고, 그런 식으로 억지로 만남을 만들려는 시도가 처음은 아니었었대요. 약속이 겹쳤다, 미안하다. 그런 식으로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도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직감적으로 소개 자리라는 것을 알았대요. 더군다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래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유주원 교수님께서 그러셨으니까, 조금 더 기분이 상했었대요. 다른 사람 같았으면 알겠다고 하고 그냥 돌아갔을 텐데, 진짜 유주원 교수님이라서 한번 꾹 참고 그 자리에 오셨는데, 엄마를 보는 순간 그런 생각들이 거짓말같이 다 날아가 버렸대요.”
“진짜… 운명이었네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참 고마운 운명이다.
그 고마운 운명 덕분에 나도 이렇게 서현 씨를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러면 두 분은 그 이후 바로 교제에 들어가신 건가요?”
“바로 그렇게 되지는 않았었대요. 우리 오빠 보셔서 아시겠지만, 강씨 성 가진 남자들은 마음을 표현하는 데 재능이 없는 것 같아요. 아빠도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엄마는 답답했대요. 분명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도 과감하게 다가오지를 않아서 답답했대요.”
이야기를 듣는데 등골이 간질간질하다. 확실히 나는 이런 연애가 내 스타일이다.
할아버지 닮아서 나도 꼰대라 그런가, 조금만 마음에 있으면 그냥 바로 사귀자고 하고, 쉽게 만나고, 쉽게 사랑에 빠지고, 그런 로맨스는 나에게는 너무 가볍게 느껴진다.
“엄마에게는 아빠가 처음 마음에 들어온 사람이었는데, 첫사랑이었는데, 아빠가 마음을 보여주지 않으니 답답하고, 안절부절못하고,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않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가오는데, 답답해 죽는 줄 알았다고 했어요.”
“하지만 결국에는 이어지셨고.”
“네. 그래서 제가 여기 있고요.”
서현 씨가 그렇게 말하며 예쁘게 웃는다. 나도 그런 서현 씨를 바라보면서 같이 웃어주었다.
“두 분이 처음 만난 장소군요. 이곳이.”
내가 말했다.
그래서 특별한 장소로구나.
“네. 그리고 신혼 여행지이기도 하고요.”
“아, 그래요?”
서로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장소로 신혼여행이라. 아버님도 참 로맨티시스트셨구나.
“그리고….”
그렇게 말한 서현 씨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진다.
“아빠가 잠들어 계신 곳이기도 하고요.”
***
“현지에서 화장을 했으면 한다.”
강민철 회장은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며느리에게 그렇게 말을 꺼냈다.
유럽 출장 중 발생한 불의의 교통사고, 말 그대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교통사고는 아들을 잃은 아비와 남편을 잃은 아내에게 절대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강민철 회장은 슬픔에 휘둘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한 아들의 아비이면서 동시에 그룹의 총수이기도 한 강 회장에게는 해야만 하는 결정이 있었다.
시신을 어떻게 운구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이었다.
국제항공운송협회(IATA) 규약에 따라 항공기로 운송하는 모든 시신은 방부 처리가 필수적이었다. 그 말은 당연히 더 많은 비용과 절차, 시간이 소요된다는 의미였다.
강 회장에게 있어서 비용은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절차와 시간이 소요되었다.
중앙그룹은 해외에서 사망한 직원의 시신 운구에 관련한 매뉴얼을 가지고 있었다. 유족이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한다는 것이 그 매뉴얼의 주요 내용이었다. 즉, 유족이 원하면 얼마의 비용이 들어가든 상관없이 시신을 앰버밍(방부 처리)해서 국내로 운구했다.
사고로 목숨을 잃은 것은 아들만이 아니었다. 아들과 함께 출장을 갔던 또 다른 직원이 있었다.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남편이었고, 아버지였던 또 다른 직원도 가족의 품으로 데려와야 했다. 그리고 유족은 화장을 선택했다.
마지막으로 아들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비록 차갑게 식어버렸다 하더라도, 마지막으로 그 얼굴을 바라보고, 쓰다듬어 보고 싶었다.
“현지에서 화장을 했으면 한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허공을 향해있던 며느리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시아버지를 바라보는 며느리의 공허한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 눈물이 무엇을 말하는지, 강 회장은 잘 알고 있었다.
보고 싶다고, 마지막으로 한 번만 보고 싶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버님 뜻대로….”
***
“…저는 그때 세 살밖에 안 되었을 때라, 그다지 기억이 많지 않아요. 그저, 엄마가 저를 안고 많이 울었고, 그런 엄마 품에서 저도 같이 울었다는 기억 정도밖에는요. 그렇게 유골로 돌아온 아빠는 가족묘에 안장되었어요, 하지만 이곳에도 계세요. 엄마가 그걸 원했고, 할아버지가 허락해 주셨어요. 할아버지가 1년에 한 번은 이곳에 온다고 했죠? 그날이 그날이에요. 아빠가 이곳에 잠든 날.”
나는 말없이 서현 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렸다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담담하게 말하는 서현 씨의 얼굴에 짙은 슬픔이 보였다, 그 얼굴에서 어머님의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이 오버랩되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아버지를 보지 못하는 딸의 마음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내의 마음도.
“그래서 이곳이 우리 가족에게 있어서 특별한 장소예요. 엄마, 오빠, 나, 그리고 아빠. 완벽한 가족이 될 수 있는 곳이니까요.”
서현 씨는 그렇게 말하고 작게 웃는다.
나는 그런 서현 씨를 잠시 바라보다가 팔을 뻗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렇게 감싼 머리를 천천히 내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최대한 포근하게, 내 마음을 담아 그녀를 품에 안았다.
서현 씨는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내 품에 안긴다.
그녀의 온기가, 그녀의 마음이 내 몸 안으로 천천히 스며든다.
“고마워요.”
그 온기를 느끼며 내가 말했다.
“어머님이 그러셨어요. 내가 이곳에 온 첫 번째 서현 씨 친구라고.”
서현 씨는 말없이 내 품 안에 안겨있다.
“내가 여기에 오게 된 첫 번째 서현 씨 친구라서, 서현 씨 가족에게 특별한 장소인 이곳에 초대받은 첫 번째 사람이라서, 그래서 너무 고맙고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를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얼마나 고마운 마음인지, 얼마나 감사한 마음인지, 목소리로, 내 떨림으로 그리고 영혼으로 그녀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거짓말이었어요.”
내 품 안에서 서현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천천히 팔을 풀었다.
조심스럽게, 놀라지 않게, 그녀가 당황하지 않게, 그렇게 그녀를 안고 있던 팔을 천천히 풀어주었다.
팔을 풀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그렇게 머리를 기댄 채로 고개만 돌려 내 눈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반짝반짝 빛나는, 하늘의 별을 품은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거짓말이었어요.”
그녀가 다시 말했다.
“…뭐가요?”
내가 물었다.
“발소리.”
그녀가 말했다.
“발소리.”
내가 말했다.
“한수 씨의 발소리. 내 방에서 들리지 않았어요.”
그녀가 말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요.”
내가 말했다.
“…뭐가요?”
그녀가 묻는다.
“발소리가 들릴 정도로 힘차게 걸었어야 했는데.”
내가 말했다.
내 눈을 바라보는 서현 씨의 눈이 웃음 짓는다.
그 눈을 바라보는 내 눈도 웃음 짓는다.
그렇게 웃음 짓던 서현 씨의 눈이 감긴다.
그리고 그 눈이, 그 얼굴이, 서현 씨의 부드럽고 촉촉한 입술이 나에게로 다가왔다.
내 입술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