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 Knock Knock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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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타고 바다에 나가서 돌고래도 보고 스노클링 하자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 머릿속에서 뿅 하고 떠오른 배의 이미지는 어선이었다.
왜 낚시 예능 보면 나오는 그런 배 있잖아. 조그맣고, 좁고, 사람들 막 멀미하고 선체에 ‘만선 5호’ 그런 이름이 커다랗게 쓰여 있는 그런 전형적인 어선.
당연히 아니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만선 5호는 어머님이나 서현 씨에게는 어울리지 않잖아?
그리고 당연히 아니었다.
우리가 타고 갈 배는 에스페란토어로 ‘La Princino de Gvamo’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요트였다. 영어로는 ‘The Princess of Guam’, ‘괌의 공주님’이라는 의미라고.
공주님이라는 이름답게, 올림픽에서 볼 수 있는, 커다란 돛이 달린 심플한 요트가 아니고, 50피트짜리. 그러니까 컨테이너보다 더 긴, 상당한 크기의 요트였다.
크기만 큰 것도 아니었다. 안에 침실만 4개에 욕실, 화장실, 각종 조리 시설까지 없는 게 없다.
솔직히 좀 놀랐다. 아니 많이 놀랐다.
돌고래 보고, 스노클링 하려고 이렇게 큰 배를 타고 나간다고? 서현 씨, 어머님, 그리고 나 이렇게 딸랑 셋인데?
설마, 이 배도 중앙그룹의 소유는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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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imum 30knot(최대 30노트).”
선장님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씀하신다. 이 배의 최고 속력이 30노트라는 이야기다.
30노트면 시속으로 60km쯤 되는 건데, 사실 육상 기준으로 그렇게 빠르다고 할 수는 없는 속도지만, 바다 위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실제로 지금 요트가 바다 위를 달려가는 속도는 20노트, 시속 40km 정도인데, 체감상 100km가 넘는 것 같다. 체감 속도가 완전히 다른 감각이다.
선장님은 신났는지, 자기 요트에 대해 이것저것 자랑을 한다.
미국 10대 요트 조선소로 이름 높은 호라이즌 요트에서 건조했고, 건조 비용만 식스 밀리언이 들어갔단다.
6백만 달러면 한국 돈으로 얼마지? 대충 12 곱하면 70억. 70억이라고? 이 배 한 척에? 엄청 호화롭다고 생각은 했지만, 배 한 척에 아파트 몇 채 값이 들어갔다고?
선장님 부자셨네. 이런 배를 한두 척도 아니고 몇 척씩이나 가지고 계신다니. 선장님은 요트를 렌트하거나, 크루징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을 하고 계신단다. 괌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요트 운영사 사장님이시라고.
아, 이 배는 중앙그룹 소유는 아니었다. 아무리 중앙그룹이 전 세계를 상대로 사업을 벌이는 글로벌 자이언트라고 해도, 1년에 몇 번이나 탄다고 괌에 초호화 럭셔리 요트를 살 정도로 생각이 없지는 않겠지.
서현 씨 어머님께서 선장님에게 말해 하루 빌리신 거다.
여기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머님이랑 선장님이랑 이웃사촌이시란다. 옆에 옆집이 선장님 집이고, 선장님 와이프분이랑 어머님이랑 테니스 친구시기도 하고.
가끔 테니스 치고 불러다 저녁도 같이 먹고, 음식도 주고받으면서 그렇게 친하게 지내는 사이인데, 내가 온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어머님이 직접 선장님께 부탁을 하셨다는 거다. 그래서 선장님이 자기가 가장 아끼는 이 공주님을 직접 끌고 나오신 거고.
나는 요트가 처음이기도 하고, 선장님께서도 이 배를 너무 자랑스러워하시는 것 같기도 해서 이것저것 계속 질문을 했는데, 선장님은 신나셨다. 이 배가 얼마나 훌륭한 배인지 얼마나 아름다운 배인지, 돌고래가 자주 나타난다는 스팟에 도착할 때까지 날 잡고 놔주지를 않으셨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 바다를 달렸을 즈음.
“You are a lucky boy. It’s the day.”
갑자기 선장님이 하던 얘기를 멈추더니 그렇게 말했다. 니 억수로 운 좋네. 오늘이 그 날이다. 그런다.
선장님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니,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한 무리의 돌고래 떼가 있었다.
출항할 때 선장님이 그러셨다. 요즘 돌핀워칭 나가도 성공률이 50% 미만이라고.
예전에는 배만 뜨면 돌고래들이 달려와서 같이 놀아주고는 했는데, 요즘에는 녀석들도 심드렁한지 잘 안 놀아준다고 했다.
그랬는데 지금 저 멀리서 스무 마리가량의 돌고래들이 우리 쪽을 향해 열심히 달려오고 있었다.
선장님이 천천히 속도를 줄이자, 돌고래 녀석들이 금세 요트 주변을 둘러쌓고, 배 주위를 빙빙 돌면서 점프를 뛰거나 배를 보인다.
오. 귀엽네. 태어나서 이렇게 돌고래를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다. 근데 실제로 보니 저 녀석들 진짜 개귀엽다.
지구상에 있는 생물 중에서 돌고래가 인간 다음으로 똑똑하다고 하던데, 그래서 지들끼리 초음파로 이야기도 주고받는다고 하던데. 그 말이 진짜인지 엔진을 끄니 끼룩 끼익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저 녀석들 무슨 이야기 하고 있는 걸까? ‘저 자식 봐라. 신기하단다 ㅋㅋㅋ. 재주 좀 보여줄까?’ 그런 이야기 하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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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돌고래하고 스노클링 한다고 해서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다.
돌고래 녀석들하고 뒹굴어볼 수 있겠구나, 그 매끈매끈한 등도 만져보고 지느러미랑 하이 파이브도 하고, 녀석들이 허락해 준다면 등에 매달려서 빠른 속도로 해수면을 갈라보는 그런 기대 말이지.
근데 돌고래하고 스노클링 하는 게 아니고, 돌고래 보고 스노클링 하는 거였다.
우리는 배 위에서 돌고래 녀석들 재롱떠는 거 한 20~30분 보다가 물고기 몇 개 던져 주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돌고래 그 짜식들도 개쿨한 게, 우리 간다고 엔진에 시동을 거니까 녀석들도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듯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가 버렸다.
그래서 그런지, 진짜 현지인들만 안다는 스노클링 명당에 와 있지만 조금은 김이 빠진 상황이었다.
물론 바다 예쁘고, 영화에서만 보던 열대어들을 보는 건 귀중한 경험이겠지만, 이 정도로는 아쉽다. ‘태평양에서 돌고래 등에 올라 타본 SSUL.txt’ 정도는 되어야 술자리 가서 말이라도 꺼내 보지. 잘난 척해 보지.
그런 마음에 좀 아쉽다고 했더니, 선장님 말씀하시길, 돌고래랑 같이 스노클링 하다가 인생의 마지막 물놀이가 될 수도 있다고 하시네.
돌고래가 인간에게 우호적인 건 맞단다. 무서워하지도 않고 먹이로 보는 것도 아니고, 호기심의 대상으로 여기니까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와서 친근하게 구는 건 맞는데, 너튜브에서 보는 것처럼 막 하이 파이브하고 등에 올라타고 그러는 건 인간에게 길들여진 돌고래나 가능한 거지 야생 돌고래에게 기대하면 안 된단다.
특히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돌고래가 순한 동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생각 외로 흉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단다. 돌고래 떼가 나타나면 상어도 피해 간다고. 그 귀여운 돌고래의 주둥아리에 들이받히면 그냥 장파열 된단다. 아니, 장파열로 끝나면 다행이지, 그 녀석들이 장난친다고 사람을 끌고 물속으로 들어가 버리면 시신도 못 찾을 수 있다네?
선장님 말 들으니 갑자기 그 녀석들이 무섭게 느껴진다.
놀아달라고 달려드는 동네 꼬맹인 줄 알았더니, 삥 뜯으러 오는 무서운 형들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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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현은 선미에 앉아 선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한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선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한수는 ‘장난친다고 바다 깊숙이 끌려갈 수도 있다’는 말에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강서현은 그 표정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귀여움, 그것이 한수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어릴 적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작은 어르신은 언제나 말썽부리다 어르신에게 혼나고, 꿀밤이라도 맞으면 엉엉 울다가도, 또 어느새 또 다른 말썽을 부리는 개구쟁이였었다.
한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강서현은 또래 유치원 친구들의 남동생 이미지를 떠올렸었다.
항상 장난치고 말도 안 듣고 말썽부리지만, 누나가 부르면 쪼르르 달려와 안기는 그런 귀여운 남동생. 그 이미지가 한수에게 투영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청소년이 되어도, 성인이 되어서도, 상상 속의 한수는 언제나 귀여운 남동생의 모습이었다. 그런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실제로 그가 두 살이 어렸지만,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학교를 나온 그녀에게 한두 해 정도의 차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남동생 같았다.
그러한 이미지는 같은 집에 살게 되고 나서도 한동안은 바뀌질 않았다.
처음 만나게 되었을 때, 처음 같은 집에 살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처음 아침을 맞이했을 때, 처음 그에게 밥을 차려주었을 때.
그는 놀란 눈을 보여주었고, 부끄러워했으며, 기뻐하는 기색을 감추려 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귀여웠다. 그가 웃고, 좋아하고, 기뻐하는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랬다. 과도한 제스처로 돌고래가 얼마나 무서운 생물인지를 설명하는 선장님의 말에 맞장구치면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그의 얼굴이, 그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달랐다. 미묘하게 달랐다.
예전에 느꼈던 귀여움과 지금 그녀가 느끼는 귀여움은 비슷하지만 달랐다.
남동생 이미지에서 느껴지는 귀여움이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달라져 있었다.
아니, 달라진 것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사실을 최근에서야 인지하게 되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가 더 이상 남동생이 아닌….
강서현의 눈동자는 여전히 한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기억 속의 여러 페이지를 더듬고 있었다.
병원에서 선배의 아버님을 만났던 그 날. 신력으로 아버님의 병을 낫게 해드리고, 미안한 얼굴로 고모부에게 병원비를 부탁하던 그 날.
그가 병원에 실려 갔던 그 날. 긴급 수술을 받고, 마취제에 취해 잠들어 있던 그의 얼굴을 무기력한 심정으로 바라만 봐야 했던 그 날.
천만 원을 빌려 달라던 그 날. 자기를 폭행한 소년을 구하기 위해 아니, 소년뿐만 아니라 그 주변인 모두에게까지 도움을 주려고 했던 그 날.
친구에게 어머님을 만나게 해주었던 그 날. 열심히 산 친구에게 칭찬받게 해주고 싶다며, 일반인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던 그 날.
그리고 어제. 미안해하는 그녀에게 전혀 아무렇지 않다고, 오히려 고맙다고 말해주던 어제.
강서현은 한수와 함께했던 나날들을 떠올렸지만, 언제부터 그를 바라보는 눈이, 그를 대하는 마음이 바뀌었는지, 어느 시점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천천히 마치 석양에 의해 푸른빛을 잃어버리고 붉은색으로 빛나는 서쪽 하늘처럼, 그녀의 마음도 서서히, 그러나 완전히 물들어버렸다는 사실만을 알아냈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렇게 물든 시선으로, 그 마음으로 한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 우리 딸?”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엄마가 자상한 말투로 그렇게 물어보았다.
강서현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응.”
엄마는 그렇게 대답하는 딸의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안 괜찮네. 우리 서현이.”
딸의 눈을 보면서 엄마가 말했다.
“…응.”
마음속 깊은 곳을 바라봐주는 엄마의 눈동자를 보며 딸이 말했다.
엄마는 그런 딸을 잠시 동안 바라보다가 두 팔을 뻗어 천천히 안아주었다.
그리고 세상에서 하나뿐인, 가장 사랑하는 딸에게,
“…알고 있잖아. 작은 어르신과는 이어질 수 없다는 사실.”
그렇게 속삭여 주었다.
강서현은 자신을 꼬옥 안아주는 엄마의 품 안에서.
“…응.”
나지막이 그렇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