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208화 (208/271)

208 : Knock Knock (5)

***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들어온 장면은 익숙하지 않은 천장이었다.

나는 누워있는 그 상태 그대로 천장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그랬지. 나 어제 괌에 왔지? 서현 씨 어머님 집에서 잠들었었지?

2층 복도 맨 오른쪽 침실, 양쪽으로 창이 나 있고, 각각의 창문 너머로 태평양을 감상할 수 있는, 이 저택에서 가장 좋은 손님용 객실에서 잠이 들었다.

나는 누워있는 그 상태 그대로 몸만 살짝 돌렸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며칠 동안은 질리지 않을 것 같은, 눈도 마음도 시원해지는 느낌이 드는 푸른 바다와 맑은 하늘이 창문 너머로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며 어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아침 일찍 일어나 공항 가서 비행기 타고, 어머님 만나고, 불과 몇 시간 전에 한국에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게 머스탱 타고 괌 남쪽 해안도로를 드라이브했지. 서현 씨랑 마음속 이야기를 하고, 집에 돌아와 어머님이 해주신 집밥 먹고, 거의 자정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

와. 진짜 고작 24시간인데,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구나. 내 인생에서 가장 다이내믹한 하루였을 거야.

하도 여러 번 놀라서 정신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오래 기억될 날이 되겠지. 즐거웠지. 즐거웠었다.

특히 어젯밤 차를 마시며 거의 자정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기억은 오래 남아 있을 것 같다.

사실 좀 어색하지 않을까? 그런 걱정을 하긴 했었다. 뵙는 건 횟수로는 두 번째이지만 실질적으로 처음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서현 씨 어머님이셨으니까.

하지만 걱정했던 것보다 대화는 자연스러웠고, 즐거웠다. 나는 이모가 안 계시지만, 이모가 있었다면 서현 씨 어머님 같은 느낌이었을까?

아무튼 다행이다. ‘조금 불편하니까 저는 그냥 호텔에서 자겠습니다.’ 같은 미친 소리 안 해서.

그랬었으면 호텔 방에서 쓸쓸히 울다가 잠들었겠지. 점수도 왕창 깎이고.

나는 그림 같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즐거웠던 어제 대화를 계속해서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

바다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아주 잠깐 했다고 느꼈는데, 어느새 30분이 훌쩍 넘어 있었다.

오션뷰 객실이 비싼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라니까.

마음 같아서는 이 여유를 조금 더 즐기고 싶었지만, 슬슬 일어나야만 했다. 오늘 일정을 소화하려면 준비를 해야 하니까.

어제는 진짜 아무것도 모른 상태에서 끌려다니고, 놀라고 한다고 정신이 없었는데, 오늘은 그럴 일이 없다.

왜냐하면 오늘 일정을 전부 다 알고 있거든. 미리 들었거든.

일단 9시에 아침밥을 먹는다. 오늘 아침밥은 서현 씨가 준비하기로 했다.

서현 씨는 대단한 거 안 할 거라고, 그냥 평소에 엄마 집 오면 만들어 먹는 가벼운 아침 식사 만들 거라고 했지. 나도 그게 좋다. 괜히 힘주고 그러면 부담스럽지.

아침을 먹은 다음에는?

어머님과 함께 쇼핑을 간다.

당연히 나는 몰랐는데, 괌이 쇼핑 천국이란다. 특히 옷이나 신발 종류.

일단 종류도 많고, 같은 브랜드 제품이라고 해도 한국보다 훨씬 싸고. 그래서 쇼핑이라는 목적 하나만을 가지고 괌에 오는 사람도 꽤 있다고 하네?

물론 난 쇼핑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명품? 1도 관심 없다.

사실 이건 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탓인데, 내가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는 항상 그러셨다. 눈에 보이는 외면보다 보이지 않는 내실이 더 중요한 법이라고.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지보다, 얼마나 많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그렇게 말이지.

물론 그렇다고 ‘내실이 중요하니 거적때기나 입도록 하여라.’ 뭐 그렇게 방치하신 건 아니고, 옷은 불편하지 않고 다른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면 된다는 것이 할아버지의 가치관이었다.

그런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지, 나는 외적으로 예민할 법한 청소년기에도 옷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특히 명품이라는 옷들. 나는 진짜 모르겠던데?

비슷한 디자인에 비슷한 재질인데, 거기에 로고 하나 더 붙어있다고 가격이 막 열 배, 스무 배 차이 나는 것은 내 기준으로는 이해가 안 간다.

아, 신발은 좀 신경 쓰기는 한다. 물론 내가 신경 쓴다는 부분이 어떤 로고가 붙어 있느냐라든가, 로고가 얼마나 대따시만 하게 붙어 있느냐라든가, 리셀가가 얼마라든가 그런 부분은 아니다.

얼마나 발을 편하게 해주는가 하는 착화감, 얼마나 운동 능력을 높여주는가 하는 기능성이 제일 중요하지. 그래서 신발 살 때는 꼭 신어보고 산다는 의미에서 신경 쓴다는 의미지. 옷은 막 입어도, 신발은 편한 거 신어야 한다.

아무튼, 나는 옷이나 신발 쇼핑에 그다지 관심이 없지만, 오늘 쇼핑은 가야 한다.

왜냐하면, 어머님께서 쇼핑을 가자고 먼저 제안하셨으니까. 가서 막 패션에 관심 있는 척, 쇼핑이 즐거워 죽겠다는 척, 그런 거 하면 되겠지.

장모님 모시고 쇼핑 가는 연습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리 힘들 것도 없다.

그렇게 쇼핑이 끝나면? 점심을 먹어야지.

오늘의 점심 메뉴는 괌 전통식이다.

미국 자치령의 현지식이라고 햄버거, 피자같은 거 생각하면 오산이다.

괌 원주민은 차모로족(族)이고, 괌의 공식 모토인 ‘Tano I' Man Chamorro’가 차모로어(語)로 ‘차모로인의 땅’이라는 의미란다.

즉 괌 전통식은 차모로인의 전통음식인데, 한국인 입맛에도 잘 맞는다고 어머님께서 말씀해주셨다.

음. 기대되는군. 친구 놈들에게 잘난 척할 거리가 하나 더 생겼어. 야. 니들은 차모로 음식 먹어봤냐? 차모로가 뭐냐고? 이런 무식한 인간을 봤나! 그렇게 말이지.

점심을 먹고는? 돌고래를 보러 간다.

정확히 말하면 돌고래를 보러 가는 건 아니고, 요트 타고 근처 바다에 나가서 스노클링을 하는데, 운 좋으면 돌고래 녀석들이 찾아와서 같이 놀고 간다네.

오우. 돌고래라니. 실제로 만나 봤으면 좋겠다.

야. 니들 돌고래 봤어? 수족관에서 멀찌감치 보는 거 말고, 돌고래 그 짜식들하고 같이 하이 파이브 하면서 놀아봤어?

그렇게 자랑질할 수 있도록.

자, 일단 일어나자. 일어나서 씻자. 오늘 하루를 충실하게 보내려면 일단 씻어야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옷을 훌렁훌렁 벗어젖혔다).

빤스까지 다 벗어버린 그 순간, 갑자기 이유 모를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불길한 기운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설마 기시감인가? 데자뷰?

그리고 곧바로 들려오는 노크 소리.

바보같이 ‘네.’ 하고 대답할 뻔했다.

안 된다. 절대로! 지금 빤스도 안 입고 있는데!

곧이어 문 뒤에서 들려오는 서현 씨 목소리.

-일어나셨어요? 들어가도 될까요?

“아니요! 잠시만요! 10초! 아니 1분만요!”

나는 그렇게 소리치고 바닥에 던져놓은 빤쓰를 재빨리 집어 들었다.

***

인류는 실수를 통해서 교훈을 얻고, 그 교훈을 바탕으로 문명을 쌓았다.

그리고 나는 교훈을 통해서 내 정조를 지켜낼 수 있었다.

서현 씨가 어제처럼 그냥 들어왔다면? 오늘은 빤쓰까지 벗고 있었는데 어제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면?

아우.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랬다면 얼굴을 들고 살 수가 없지. 없어. 못 산다.

생각해보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이다. 어제 그 사고가 있었기에, 오늘 더 큰 사고를 막을 수 있었던 거지. 사람은 이래서 끝없이 반성하고 배워야 한다.

그리고 오늘 얻은 교훈 또 하나!

쇼핑을 가자는 권유를 받으면 심사숙고해라. 쇼핑의 목적이 무엇인지 잘 파악하고 결정해라!

어제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갑자기 쇼핑을 가자고 하신 말씀이 말이지.

일단 어머님은 여기에 거주하고 계시잖아. 여행객이 아니라 거주민이시잖아. 그러니까 단기 여행객들처럼 쇼핑 가겠다고 조바심 내실 이유가 없으실 거다. 아무 때나 가고 싶으시면 가실 수 있으니까.

그런데, 내가 온 타이밍에 쇼핑을 가자고 하신다? 그게 좀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었다.

남자가 왔으니 짐을 들어달라고 그러시는 거겠지. 어머님께 힘을 좀 보여드려야 되겠군! 그렇게 대충 결론 내고, 얼렁뚱땅 넘어갔는데….

착각이었다. 오산이었다. 아주 큰 오산이었다.

“한수 씨, 이것도 한번 입어 봐요.”

서현 씨가 어디선가 셔츠 몇 벌을 들고 온다.

“타이는 이게 예쁜 것 같은데?”

어머님은 타이를 골라 오신다.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의 여행객들이 사랑한다는 초대형 쇼핑몰, 그 쇼핑몰 안에 입점해 있는 남성복 매장. 수트부터 유니섹스 캐주얼까지 남성복 매장이란 매장은 지금 다 둘러보고 있다.

아니, 옷에서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시계 매장, 가방 매장, 구두 매장, 운동화 매장, 스포츠용품점까지 남자가 들어가 볼 수 있는 곳은 다 들어가 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매장에 들어가면 한 대여섯 벌 정도 입어 보고, 그중에 서너 벌이 계산대에 올라간다.

결국 지금까지 살면서 할아버지가 사 주고, 내가 산 옷의 합보다 더 많은 옷이 오늘 내 옷장에 추가되었고, 추가될 예정이었다.

“이것도 한번 입어 봐요.”

“엄마. 이건 어때요?”

“어머. 너무 예쁘다. 한번 입어 봐요.”

이렇게 말이지.

아니, 이게 돈이 얼마야? 지금까지 구입한 옷만 해도 내 한 달 알바비, 알바비가 뭐야? 내가 받은 장학금은 진작에 뛰어넘었을 것 같은데?

역시 어머님도 재벌가 사람이었다. 말로만 듣던 ‘여기부터 저기까지 다 주세요.’는 아니었어도, 지르시는 데 거침이 없으시다.

***

쇼핑몰 한쪽에 자리 잡은 카페.

나, 어머님 그리고 서현 씨 세 사람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아니,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어머님과 서현 씨는 다음에 어느 매장을 가자느니, 아까 그 옷을 다시 입혀 보자느니, 딱 이거다 싶은 가방이 안 보여 아쉬우시다느니, 시계는 확실히 아까 그게 예쁜 것 같다느니. 그런 무서운 말씀을 나누고 계신다.

맞다. 다 내 옷, 내 가방, 내 시계 이야기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수많은 쇼핑백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거. 쇼핑몰 쪽에서 알아서 어머님 집으로 전부 다 배송해놓는단다.

아니, 거기까지는 그렇다 치고, 그럼 그 많은 옷을 한국에 어떻게 들고 가지?

내 캐리어 하나에는 죽어도 안 들어갈 것 같은데?

“많이 힘들죠?”

멍한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어머님이 물어보신다.

“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근데 어쩌죠? 조금만 더 돌아보고 싶은데.”

“괜찮습니다!”

망했어. 커피가 아니라 에너지드링크를 시켰어야 했어. 빨간 황소! 날개를 달아다오!

이건 퀘스트다. 귀찮다고 패스해도 되는 서브 퀘스트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꼭 진행해야 하는 필수 퀘스트다. 버텨내야 한다.

***

다행히도 2차 퀘스트는 1차만큼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물론 2차 퀘스트 과정에서 수트가 한 벌, 셔츠가 두 개, 운동화와 구두 각각 한 켤레, 그리고 손목시계가 두 개 추가되었지만, 그래도 1차 퀘스트보다는 빨리 끝났다.

그렇게 2차 퀘스트까지 끝내고, 괌에서 현지인만 안다는 차모로 전통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초테라는 열매즙으로 밥을 짓는다는 레드라이스, 차모로족 축제 때 절대 빠져서는 안 된다는 호트논바부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통돼지구이 등등 처음 보는 음식이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맛있었다.

어머님 말씀처럼 차모로 전통음식이 한국인 입맛에 잘 맞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오전에 너무 강행군을 했기 때문에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점심도 든든하게 챙겨 먹고, 다음 일정을 뛰기 위해 우리는 쇼핑몰에서 그리 멀지 않은 부둣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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