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207화 (207/271)

207 : Knock Knock (4)

과식했다. 너무 많이 먹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게 다 그 카레 때문이다.

아까도 생각했지만 카레는 굉장히 독립적인 성격의 음식이다. 어떤 음식과도 조화를 이루지 않고 독고다이로 돌아다니며 괜히 시비만 걸고 다닌다는 점에서 〈야인시대〉의 시라소니 형님하고 비슷하다고 할까?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의 메인 반찬 고등어조림이 오야붕 김두환이고, 국, 찌개, 각종 밑반찬들이 우미관 패거리 조직원쯤 되는 거다.

지금 식탁 위는 일제 치하 격동기의 종로통이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내가 그 조직들 모두에게 관심을 줘야 한다는 이야기다.

아싸리 ‘나는 시라소니 형님의 독고다이 정신이 마음에 드니 카레만 먹겠소’라든가, ‘역시 사람은 조직 안에 있어야지. 고등어조림이 오늘의 주인공이오!’ 할 수만은 없다는 거지.

그렇다고 밥 반은 카레에 비비고, 반은 국이랑 찌개랑 고등어조림이랑 먹는 것도 안 된다.

일단 지저분해 보이잖아. 어머님이 차려주신 정성스러운 밥에 대한 예의도 아니란 말이지.

그렇게 결론을 내린 나는 결국 밥을 두 그릇 먹어야만 했다. 한 그릇은 우미관 패거리와. 한 그릇은 시라소니 형님과.

사실 내 나이 때 밥 두 그릇 그렇게 힘든 건 아니다. 힘든 거 아닌데 그건 밥만 두 그릇 먹었을 때의 이야기지, 거기에다가 각종 반찬과 카레 속 물만두까지 더해진다면 누구라도 힘들지. 밥 빨리 먹고 많이 먹는 박찬희도 힘들 거야.

하지만 힘든 내색하지 않고, ‘어머니. 너무 맛있었어요!’를 남발하면서 열심히 먹었다.

그리고 솔직히 맛있기도 했다.

확실히 한식 요리연구가 선생님이시라서 그런지 일반적인 음식인데도, 간이 어딘가 남다르다. 맛에 깊이가 있달까? 몸에도 영혼에도 좋은 음식이랄까?

진짜 요리 하나하나, 반찬 하나하나 음미해가면서 그렇게 저녁을 즐겼다.

식탁 분위기도 즐거웠다.

불편한 두 사람이 친해지는 가장 빠른 방법은 공통적으로 아는 사람을 욕하는 게 가장 좋다지만, 내가 감히 우리 서현 씨를, 그것도 면전에서 험담할 수는 없었다.

대신 어머님이 서현 씨 어릴 때 이야기해 주시는 걸 듣고, 서현 씨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화목하고 행복한 저녁 식탁을 만끽할 수 있었다.

꼬마 서현 씨는 고집쟁이였군요. 나도 어리광쟁이 아기 서현이 보고 싶다.

물론 나도 듣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친구들 이야기를 해드렸지.

서현 씨가 어머님께 내 이야기랑 친구들 이야기를 해줬는지, 어머님도 내 친구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특히 승환이에 대해서는 알고 계셨다.

작년부터 박승환이 사고 친 거 핵심만 모아서 짧게 짧게 말씀드렸는데 어머님이 빵빵 터지셨다. 이미 들었던 서현 씨도 마찬가지로 빵빵 터지고.

그러니까 또 나는 신나고, 그래서 친구들 이야기가 이어지고.

그렇게 맛있는 음식과 좋은 사람들과 즐거운 이야기가 가득한, 오랜만에 집밥다운 집밥을 먹을 수 있던 저녁 시간이었다.

그리고 과식했고.

***

아무리 많이 먹었다고 해도, 후식을 피할 수는 없었다.

우리 집 같았으면, ‘아! 안 먹는다고! 배 터질 것 같다고!’ 그렇게 말이라도 할 수 있었겠지.

아니지. 할아버지가 ‘한수야, 후식 먹어야지?’ 그러면서 과일을 깎아온다?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있어서도 안 되고.

설사 있었다고 해도 ‘아, 안 먹는다고!’ 하면?

바로 할아버지의 스트레이트-하이킥 콤보 날아오겠지.

오우.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아무튼. 어머님께서 후식 먹자고 하시는데, 거부권 없는 나는 얌전히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열려있는 창문으로 태평양이 만들어내는 파도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고, 그 파도 소리 너머로 별이 반짝반짝 빛나는 밤바다가 펼쳐져 있다.

나쁘지 않네. 이렇게 가족끼리 모여 저녁을 먹고, 수다를 떨고, 그런 게 나쁘지 않다는, 아니,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경험이다. 물론 할아버지와 같이 저녁을 먹는 경우는 많았지만, 보통 밥 먹을 때는 나도 할아버지도 말 한마디를 안 하니까.

그런데, 확실히 집 안에 여자들이 있으면 밥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다. 지수도 그랬고 지연이도 그렇다고 하고, 서현 씨도 나랑 단둘이 밥 먹을 때 별것 아니더라도 하루의 소소한 일상을 말해주고는 했고.

역시, 집에는 여자 사람이 있어야 해. 그래야 집 안에 온기도 느껴지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머님이 후식을 내어주셨다.

매실차와 허브티, 그리고 다식(茶食). 그날 성북동에서 맛보았던 그 예술작품 같은 다식이 있었다.

“기억나세요?”

어머님이 물어보신다.

“네. 기억납니다.”

기억 안 날 수가 없지. 처음 봤을 때 감히 내가 손을 대도 될까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마치, 세공된 보석 같다고 생각했었다.

조심스럽게 입 안에 넣었을 때, 살면서 단 한 번도 맛보지 못한 고급스러운 단맛을 느꼈었다.

“드셔보세요.”

어머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고, 나는 조심스럽게 다식을 집어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뭐라고 하셨었지? 흑임자에 뭐 이것저것 넣어서 만드셨다고 하셨던 다식이 입 안에서 부드럽게 풀어진다. 그리고 그때 맛보았던 고급스러운 단맛, 인공적인 감미료로는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깊은 맛이 입 안에서 퍼진다.

“그때도 그랬어요.”

어머님이 말씀하신다.

“조심스럽게, 마치 귀중품을 다루듯, 그렇게 조심스럽게 드셔줬어요. 그래서 고마웠어요.”

어머님이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과일을 가져오겠다며, 주방으로 가셨다.

아, 이거 부끄럽네. 부끄럽다.

“어때요? 우리 엄마 다식?”

둘만 남게 되자 서현 씨가 작은 목소리로 물어본다.

“맛있어요.”

“어떻게 맛있는데요?”

나는 서현 씨를 바라보았다. 마치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 같은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오늘 서현 씨 처음 보는 모습 많이 보네. 서울에서는 이런 캐릭터 아니었는데, 어머님과 같이 계셔서 그런가 오늘은 처음 보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신다.

귀여운 모습을 말이지.

“음. 뭐라고 말씀드려야 제 마음을 정확히 설명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일단 제가 그렇게 요리 쪽에 조예가 없다는 걸 미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일단 그렇게 밑밥을 깔았다.

“저는 콜라가 생각났어요.”

내 말에 서현 씨의 눈이 커진다. 뭐 그렇겠지. 어머님의 훌륭한 예술작품을 자본주의의 똥물인 콜라와 비교했으니.

하지만 들어봐요.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해.

“왜 요즘은 다이어트 음료니, 제로칼로리 음료니 그런 게 많잖아요. 콜라도 제로칼로리가 있고. 몸 걱정하려면 콜라 같은 거 안 먹어야 하는데, 또 콜라는 먹고 싶고 몸은 챙기고 싶고. 그래서 제로칼로리 음료를 고르는데 사실 그게 맛이 미묘하게 다르거든요. 설탕 대신 들어간 감미료 때문에 단맛이 약간 부족하다고 할까? 다른 사람은 모르겠는데, 저는 그렇더라고요.”

서현 씨는 아직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이다.

“어머님 다식을 먹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깊고 고급스러운 단맛이다. 이제 어디 가서 달달한 거 먹어도 예전처럼 맛있다고 생각하지 못하겠구나. 다 제로칼로리 콜라처럼 느껴지겠구나. 그런 생각이요.”

내 말에 서현 씨가 그제서야 미소 짓는다.

조금 무리한 비유이기는 한데, 그래도 직관적으로 ‘거어어어어업나 맛있어요!’ 하는 것보다는 좀 세련되지 않았나 싶은데? 점수 1점 따지 않았나 싶은데?

***

나는 후회했다. 그냥 맛있다고 할걸. 그냥 엄청 맛있다고 할걸.

어머님이 과일을 가지고 돌아오시자, 서현 씨가 어머님께 내가 해준 말을 고대로 전달해버렸고.

“고마워요. 최근에 들어본 평론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평론이었어요.”

어머님에게 그런 말을 듣고야 말았다.

아, 부끄럽다. 진짜, 오늘 중에서 제일 부끄럽다.

아니, 우리 서현 씨 진짜 너무하네. 그걸 또 이야기를 하시고 말야.

“확실히 아들과 딸은 달라요.”

어머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

“네?”

“저도 그렇고, 제 친구들도 이야기하는 거 보면. 어렸을 때는 딸이 손이 더 가는 것 같아요. 걱정도 더 많이 하게 되고. 사실 서현이 오빠는 키우는데 힘 하나도 안 들었어요. 워낙 애어른이라 그게 걱정됐으면 됐지. 반면에 우리 서현이는 어렸을 때부터 고집이 세서 툭 하면 옷이 마음에 안 든다고 어린이집 안 간다고 그러고, 머리 땋은 게 안 예쁘다고 울고….”

“엄마!”

“알았어. 미안해. 그런데, 애들이 크면 확실히 아들보다는 딸이 엄마에게는 친구처럼 느껴져요. 싸우기도 많이 싸우지만, 그래도 마음 터놓고 이런저런 이야기 할 수 있는 가장 친한 친구처럼 되거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도 그렇고, 내 친구들도 그렇고, 집에 가면 뭐 말 한마디를 안 한다. 친구 집에 가서 친구 부모님 만나면, 세상 둘도 없는 효자처럼 재롱도 떨고 그러면서 정작 자기 집에 가서는 말 한마디를 안 하지. 대한민국 남자 종특이다. 남자의 패시브 스킬지.

“서현이가 한수 씨에 대해서 이야기 많이 해줬어요. 그래서 나도 자꾸 편하게 대하게 되네요. 혹시라도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아닙니다. 전혀. 저는 오히려 감사하죠. 어머니께서 편히 대해주시니. …그런데 제 이야기를 많이 들으셨다고요?”

어머님은 대답 없이 빙긋 웃으신다.

이거 갑자기 불안한데? 내가 승환이 씹은 것처럼 서현 씨도 어머님에게 내 험담 하고 그랬던 거 아냐?

내가 서현 씨 앞에서 실수한 게 뭐 있지?

처음 만났을 때 어리버리 깐 것부터 시작해서 한 스무 개 정도가 머릿속을 훅 하고 지나간다.

맞다. 스케치북 이야기도 해줬다고 하셨지? 그 정도면 뭐 거의 이야기 다 하신 거 아냐?

“최근에는 그 이야기 들었어요.”

어머님이 말씀하신다.

“네? 어떤….”

“친구 생일 챙겨준 이야기.”

아…. 창회 이야기.

“저번에 서현이가 갑자기 전화해서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사랑한다고.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다고.”

서현 씨를 보니 얼굴이 홍시처럼 빨갛게 익었다.

“물론 우리 서현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딸이기는 하지만, 서현이도 오빠 닮아서 그런 말 잘 못 하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그런 이야길 하니까, 물론 엄마로서 기쁘긴 기쁜데, 무슨 일이 있었나 걱정부터 되더라고요. 그때 들었어요. 친구분 어머님 만나 뵙고, 차려주신 밥 먹고 왔다고.”

“네.”

그랬지. 창회 어머님 뵙고, 밥을, 김치콩나물국을 먹고 왔었다.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현이 엄마로서, 그리고 같은 엄마로서.”

나는 손을 들어 머리를 긁적였다.

“그 전에 기훈이라는 학생하고 할머니 챙긴 이야기도 들었고, 학교 선배 아버님 이야기도 전해 들었어요. 사실 서현이 엄마 입장에서는 같은 집에서 지낸다는 게 좀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오늘 이렇게 직접 만나서 이야길 해보니, 조금은 안심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머니께 걱정 끼쳐드리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내 말에 어머님이 빙긋 웃으시고는.

“고마워요. 앞으로도 우리 서현이 잘 부탁드려요.”

그렇게 말씀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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