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206화 (206/271)

206 : Knock Knock (3)

***

서현 씨가 말했다. 마음이 급했다고.

그 말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지 못한 상황에서 서현 씨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사과한다고 제가 한수 씨에게 한 잘못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제대로 사과드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한 서현 씨의 고개가 천천히 움직인다.

바다를 향하던 그녀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한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아니, 사실 변명일 뿐이지만, 저는 그저 제가 바라보고 싶은 그림만을 보고 있었어요.”

그런 서현 씨의 말에 나는 아무런 말 없이 그저 서현 씨의 눈동자만을 바라보았다.

“어리석었고, 이기적이었어요. 한수 씨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어요. 한수 씨를 위해서라고 생각하면서, 정작 한수 씨의 마음을 제대로 알려 하지 않았어요. 그저 마음이 급하다는 핑계로 제가 보고 싶어 하는 그림이 그려질 거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렇게 말하는 서현 씨의 눈동자에 짙은 슬픔과 미안함이 담겨 있다.

“…미안해요.”

그 말과 함께 서현 씨가 고개를 푹 숙인다.

나는 잠시 동안 그런 서현 씨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손 위에 살포시 올렸다.

내 손길을 느낀 서현 씨가 고개를 살짝 든다.

나는 그런 서현 씨의 눈을 바라보면서.

“서현 씨의 잘못이 아니에요.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요. 꼭 따져야 한다면 발단은 나였다고 하는 게 맞겠죠.”

그렇게 말해주었다.

서현 씨를 위로하기 위한 빈말이 아니었다. 내 솔직한 마음이었다.

물론 꼭 따지자면 알몸을 보여버린 내가 피해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고가 일어난 계기는 내가 만든 거나 다름이 없다고 할 수도 있지.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 그때 ‘네!’ 하고 대답하지 말았어야 했다.

지금 빤스만 입고 있다고, 아니, 빤스 이야길 할 게 아니라,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어야 했다.

근데 바다에 취해서, 전망에 빠져서 정신줄을 놓고 있다가 무조건반사로 그냥 ‘네!’ 해버린 거다.

물론, 서현 씨가 ‘들어가도 될까요? 수건 가져왔는데.’ 같은 말을 해줬으면 나도 정신을 차렸을 테고 상황이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있지만, 그렇다고 서현 씨를 탓할 수는 없는 것이, 노크를 했을 때 ‘네!’라고 대답하면 들어와도 된다는 암묵적 사인으로 받아들이는 게 상식이니까.

아니, 지금은 그런 이야기 할 때가 아니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지.

우리 서현 씨, 엄청 놀랬나 보다. 저렇게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일단 서현 씨부터 달래고 보자. 그게 중요하지!

“모르겠어요. 그냥. 무조건반사 같은 그런 거였어요. 아마도, 저도 핑계를 대자면, 일단 환경이 바뀌어서 그런 것도 있고, 그리고 사실 서현 씨도 아시겠지만, 제가 오늘 좀 여러 번 놀랬잖아요? 평소 같았으면, 그렇게 바로 ‘네!’ 하지는 않았을 텐데. 오늘은 저도 모르게…. 서현 씨 많이 놀라셨죠? 저도 알고 있어요. 서현 씨가 일부러 그런 거 아니라는 거. 근데 저도 일부러 그 상태로 있었던 것은 아니….”

나는 말을 천천히 멈추었다. 나를 바라보는 서현 씨의 눈이 엄청 커져 있었으니까.

조금 전, 미안함과 슬픔이 가득 들어차 있던 그 눈동자는 어디로 가고, ‘너 지금 너 무슨 소리 하고 있는 거니?’ 같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몇 초 동안 그런 눈으로 날 바라보던 서현 씨가 물어본다.

“…네? 그게 무슨…?”

“…아까, 그 사고… 속옷 차림….”

“네?”

“…그 이야기 아니었어요?”

***

그 이야기 아니었다. 빤쓰 노출 사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와 상의하지 않고 어머님을 만나게 했던 것에 대한 사과였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아까 전 있었던 그 사고에 대한 사과인 줄만 알았다.

아, 부끄럽네. 되게 고차원적인 이야기 하는 자리에서 나 혼자 음담패설 한 기분이다.

아니, 이건 좀 억울한 게, 그렇게 오해할 수밖에 없다고.

드라이브하면서 서현 씨가 어딘가 평소와는 좀 다르고, 어색해하는 게 못 볼 걸 본 정신적 충격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서현 씨가 ‘…제 마음이 너무 급했어요.’ 그렇게 시작해버리니까, 아. 마음이 급해서 문을 벌컥 열어버렸다는 의미이구나. 그렇게 받아들인 거지.

“…놀라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에,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제 욕심에 한수 씨를 배려하지 못했어요. 다시 한번 사과드릴게요.”

그렇게 사과하는 서현 씨도 조금은 진정이 됐는지, 나를 바라보는 두 눈에 조금 전 슬픈 감정은 좀 빠져있다.

진지한 이야기 하다가, 중간에 음담패설 나와 분위기 이상해진 상태에서 다시 분위기 잡으려고 하면 그게 잡히나? 안 잡히지. 뭐 그런 상황이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바꿨으니…. 결과적으로 잘된 건가?

“아니에요. 사과하실 것 없어요.”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서현 씨, 은근 소심쟁이였네. 아니, 별것도 아닌데, 그런 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어?

“솔직히. 좀 놀라기는 했어요. 어머님을 뵙게 되었을 때. 그게 뭐 공항에 간다거나, 서현 씨 가방에서 내 여권이 나온다거나, 갑자기 비행기를 탄다거나 하는 그런 놀람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놀람이기는 했는데, 그래서 조금 더 당황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 제가 기분이 나빴다든가 그런 건 하나도 없었어요. 진짜로.”

“….”

서현 씨는 말없이 내 눈을 바라보고 있다. 그 눈이 ‘진짜요?’ 그렇게 묻고 있다.

참나. 우리 서현 씨 어리광쟁이였군요. 더 확신을 드리도록 할까요?

“아까 어머님에게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저는 이해할 수 있었어요. 서현 씨가 왜 이곳을 떠올렸는지, 그리고 왜 비밀로 했는지. 서현 씨의 마음을 전부 다 이해한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 마음이 고맙죠. 어머님을 만나게 해주신 건 더욱 고맙고.”

“…네?”

“가족을, 더군다나 엄마를 소개한다는 건 정말 친한 사람이 아니면 하기 좀 그렇잖아요. 또 그만큼 제가 서현 씨 어머님께 소개시켜 드리기 부끄럽지 않다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는 거니까. 그런 부분에서 고맙죠.”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서현 씨의 얼굴에 처음으로 옅은 미소가 맺혔다.

“난 또 무슨 말인가 했네. 그런 이야기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어요. 난 당연히 아까 그 민망한 사고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잠깐. 서현 씨는 아까 그거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나는 진짜 놀라고, 민망하고, 부끄럽고 그랬는데.”

진짜 서현 씨 나를 무슨 남동생처럼 생각하고 있는 거 아냐? 내가 서현 씨에게는 전혀 남자로 안 보여서 신경도 안 쓰고 있는 거 아냐?

아니, 아까 막 다다다 뛰어가 놓고서 말야.

“아니. 저기. 그게….”

갑자기 말을 더듬는 서현 씨의 얼굴이 빨개진다.

“솔직히 내가 잘못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따지면 내가 피해자인데, 나만 어색해하고, 나만 민망하고, 나만 걱정하고 있었네요. 아, 진짜 속상하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 죄송해요. 제 잘못이었어요.”

서현 씨가 그렇게 말하며 조금 더 얼굴을 붉힌다.

나는 그런 서현 씨를 보며 작게 웃었다.

이런 서현 씨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정말 드물거든.

우리 서현 씨야 항상 완벽하지. 내 앞에서 빈틈을 거의 보이지를 않는다. 빈틈이 뭐야? 감정을 표출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그때, 내가 다쳐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말고는 없었지?

그런 완벽한 서현 씨가 미안해하고, 부끄러워한다.

그리고 그런 서현 씨가 어딘가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연상이기도 하지만, 평소의 서현 씨는 누나 같고 너무 완벽해서, 남자로서의 당당함이 좀 아쉬울 때가 있었는데, 우리 서현 씨의 이런 모습을 보니 그 남자 게이지도 조금 차오르는 것 같다.

***

여행을 오기 전, 그러니까, 내가 괌으로 오게 될 거라든가, 어머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던 그때, 서현 씨가 힌트라고 해주었던 말이 있다.

-저번에 했던 약속.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기억을 뒤집어 봐도 서현 씨의 힌트가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모르겠더란 말이지.

그게 괌에 도착하고 나서도, 어머님을 만나고 나서도 서현 씨가 말했던 그 ‘약속’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없었는데….

이제야 그 ‘약속’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네.

그 약속은 바로 어머님께서 해주시는 집밥을 얻어먹으러 가겠다는 ‘약속’이었다.

-안 그래도, 엄마가 한수 씨에게 저녁 대접을 해드리고 싶다고 했거든요. 무거운 식사 말고, 가벼운 집밥.

얼마 전에, 그러니까 성북동에서 처음으로 그 4주라는 양반들을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서현 씨가 그렇게 말했었더랬다.

내 대답은?

당연히 좋다고 했지. 그럼 그 상황에서 ‘아니, 어머님은 좀 부담스러운데요.’ 같은 말을 할 수 있겠냐고.

아무튼, 그렇게 이야기하고 얼렁뚱땅 넘어갔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이었던 거다.

“딱히 대단한 걸 준비하지는 않았어요. 그냥 평소에 먹는 집밥을 해주고 싶었거든요.”

그런 어머님 말씀처럼, 저녁밥은 진짜 특별하지 않았다.

아니, 특별하지 않은데 특별했다.

잡곡밥과 황태콩나물국, 두부가 들어간 된장찌개. 메인 반찬으로는 큼지막한 무가 들어간 고등어조림, 그리고 시금치나물과 오징어진미채 같은 밑반찬들.

여기까지만 보면 그냥 일반적인 집밥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거기에 카레가 더해져 있었다.

사실 카레라는 음식은 단독적으로는 참 괜찮은 메뉴인데, 다른 음식들, 앞서 말한 국이나 찌개, 밑반찬 같은 음식과는 조화를 이루기 쉽지 않은 음식이다. 아니, 진짜 생각해보면 김치 말고 다른 음식과 곁들여 먹는 게 쉽게 떠오르지 않는데.

카레에 비벼서 된장찌개랑 먹는다? 카레라이스에 고등어조림을 올려 먹는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밥상 뒤집어질 소리지.

하지만 나는 식탁 위에 올려진 카레를 보면서,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요상한 기분을 느꼈다.

식탁 위 카레는 감자나 고기 베이스의 일반적인 카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청양고추와 물만두가 들어간, 어릴 적 할아버지가 만들어주던 바로 그 특제 카레였다.

“최대한 비슷하게 흉내를 내보려고 했는데, 잘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이야기만 듣고 만들어 본 거라 자신은 없어요. 그래도 한번 들어봐요. 어떤지.”

어머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며 카레를 떠주신다.

나는 어머님께 감사하다는 의미로 고개를 살짝 숙인 후, 숟가락으로 카레를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매콤한 카레 향과 부드러운 물만두의 식감이 입 안에서 느껴졌다.

내가 서현 씨에게 만들어주었던 카레에도 물만두가 들어 있었지만, 그 물만두는 튀긴 물만두였다.

할아버지의 오리지널 버전에는 그냥 물만두가 들어간다고, 지나가는 말투로 그렇게 말했었는데, 서현 씨는 그 말을 기억하고 있다가 어머님께 말씀드렸나 보다.

물론 할아버지가 만들어준 카레와 완전히 똑같을 수는 없었다. 할아버지가 만든 카레가 훨씬 더 매웠다. 아마도 한식 요리연구가 선생님이신 서현 씨 어머님께서 용납하시지 않을 정도로 매울 것이다.

재료도 여러 가지 채소가 좀 더 풍부하게 들어간 것 같고. 아무튼 미묘하게 조금 달랐다.

하지만 나는 어머님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똑같아요. 할아버지가 만들어준 카레하고요.”

어머님은 어떤 생각으로 카레를 만드셨을까?

어머님이 만들어주고 싶으셨던 음식은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 집밥이라는, 말 그대로 집에서 가족이랑 먹었던 음식을 만들어주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

그런 어머님의 마음을 생각한다묜, 조금 더 맵고 덜 맵다든가, 재료가 조금 다르다든가, 그런 사소한 차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마음 담겨 있다면, 그 자체로 ‘집밥’이었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