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 : Knock Knock (2)
***
강서현은 양팔에 샤워용 큰 수건 두 개를 들고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손님용 침실에 수건을 가져다주라는 엄마의 부탁 때문이었다.
-미리 놔두기는 했는데, 혹시 모르니 두 개 정도 더 가져다드리는 게 어떨까?
강서현은 알겠다고 했고, 수건을 챙겨서 손님용 침실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에는 물음표가 떠 있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마트를 다녀오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그런 의문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엄마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살짝 웃기만 할 뿐,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수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아니, 물어보기는커녕 일단 그에게 제대로 사과부터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따가는 물어볼 수 있을까?
강서현의 머릿속에 그런 의문이 떠올랐다.
그와 단둘이 있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엄마는 저녁 준비를 하는 동안 그와 근처를 돌아보고 오라고 했다.
특별히 무언가를 보여주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해안도로를 따라 섬을 도는 가벼운 드라이브,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 한 잔. 그런 가벼운 외출이었다.
그때 제대로 사과하고, 물어볼 기회가 있을지도.
강서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한수에게 배정된 손님용 침실 문 앞에 섰다. 그리고 작게 숨을 한번 들이쉬고는 문을 노크했다.
“네.”
문 너머에서 한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서현은 문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열었다.
“한수 씨, 잠깐 괜찮…!”
강서현의 말이 순간 멈추었다. 멈춘 것은 말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동작도, 생각도, 모두 멈춰버렸다.
속옷 한 장만을 걸친 그가 오늘 하루 중 가장 커다란 눈으로 강서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
서현 씨는 굳어버렸다.
소리를 지른다거나, 눈을 질끈 감는다거나 하는 일체의 반응 없이, 마치, 메두사의 저주에 의해 석상이 되어버린 것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굳어버린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서현 씨가 다른 액션을 취했다면, 나도 어떻게 리액션을 취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서현 씨가 석상(石像)처럼 굳어버리자 나도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아무런 말 없이, 아무런 동작 없이, 그렇게 몇 초 동안 서로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서현 씨였다.
“…수건을 가져다드리라고 해서요.”
서현 씨는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돌리고 팔을 내민다.
“…아. 네.”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팔을 뻗어 수건을 받아 든다.
“…죄송합니다.”
서현 씨는 그렇게 말하고 재빨리 몸을 돌려 방 밖으로 나간다.
문이 닫히고, 닫힌 문 너머로 다다다 달려가는 소리가 멀어져간다.
나는 수건을 든 채로 멍하니 서서 멀어져 가는 발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갑자기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엄마. 우리 나갔다 올게요.”
서현 씨가 주방 쪽을 향해 말한다.
“다녀오겠습니다.”
나도 주방 쪽을 향해 그렇게 말하자, 앞치마를 두른 어머님이 모습을 보이신다.
“그래요. 운전 조심하고. 몇 시쯤 들어올 예정이야?”
앞에는 나에게, 뒤에는 서현 씨에게 하신 말씀이다.
“대충 6시 반에서 7시?”
“알았어. 도착 전에 전화해 주고.”
“응. 뭐 사 올까?”
“아니. 괜찮아.”
어머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고 다시 주방으로 몸을 돌리신다.
보이지는 않지만, 주방에서는 뭔가 엄청난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이 풀풀 풍긴다.
아무튼, 그렇게 어머님께 외출 보고를 마친 우리는 현관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왔다.
마당에는 커다란 SUV가 한 대 주차되어 있다. 조금 전 공항에서 우리를 픽업한 대형 SUV다.
하지만 서현 씨는 SUV를 무시하고, 마당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차고 쪽으로 나를 이끈다.
차고에는 전면 그릴에 달리는 말 한 마리가 각인되어 있는 문 두 개짜리 빨간색 오픈카, 정확히 머스탱 컨버터블이 서 있었다.
“여기요.”
서현 씨가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자동차 키를 건네준다. 자동차 키 뒷면에도 질주하는 말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SUV는 어머님이 평상시에 주로 사용하시는 자동차고, 머스탱은 서현 씨 오라버니, 그러니까 강우현 팀장님께서 괌에 올 때 이용하는 차량이라고 한다.
그 냥반…. 항상 무거운 얼굴로 목소리 잔뜩 깔고 이야기하는 모습만 봐서, 되게 딱딱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은근 로망을 아는 양반이셨군.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왜 서현 씨 오빠의 머스탱 열쇠를 받아 들었느냐 하면, 내가 운전을 해야 하거든.
서현 씨는 피곤하다고 했다. 운전하고 싶지 않으니 나에게 운전을 부탁한다고 했다.
나도 안다. 진짜 피곤해서 나에게 운전을 부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도 알지. 바보도 아니고 말야.
놀게 해주려는 것이다.
열대 남국의 시원하게 뻗은 해안도로에서 5천CC V8엔진의 파워 넘치는 미국산 스포츠카를 가지고 놀게 해주려는 것이다.
나도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괌에서는 한국운전면허증이 통한단다. 렌트카를 빌리거나, 차를 운전하기 위해서 따로 국제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아 올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뭐, 주모를 불러 국뽕 한 사발 주문하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만큼 한국 사람들이 괌에 많이 온다는 이야기겠지.
아무튼, 나는 국내 면허증이 있으니까 법률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 서현 씨의 설명이었다.
그렇다고 아싸! 머스탱이다! 그러면서 넙죽 키를 받아 들 수는 없는 것이, 내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니까.
비싼 고급 스포츠카라는 사실은 둘째 치고, 일단 서현 씨 오빠의 차인데 ‘들키지만 않으면 괜찮겠지?’ 할 수는 없는 거잖아. 차 좋아하는 사람들은 ‘마누라와 자동차는 빌려주는 거 아니야!’라고도 한다는데.
하지만 어머님께서 등을 밀어주셨다.
-괜찮아요. 내 이름으로 등록되어있으니 내 차예요. 내가 허락할게요. 보험도 다 들어놨으니 마음 편하게 운전해도 괜찮아요.
어머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해주시니 계속 거절하는 것도 그렇고, 또 뭔가 겁쟁이 같기도 하고. 기왕 이렇게 된 거, 열대 남국의 해안도로도 한번 달려보자는 생각으로 차 키를 받아 들게 된 것이다.
‘일단정지’ 표지가 있으면 그곳이 어디든, 차가 있든 없든 무조건 3초 정도 멈추고 가는 것만 신경 쓰면, 나머지는 한국이랑 똑같다고 생각해도 된단다. 심하게 과속하거나 신호를 위반하거나, 술 먹고 운전하면 법적 책임을 진다는 이야기다. 미국 감옥에서 미국 콩밥 먹는다는 말이지.
아무튼, 서현 씨의 부탁도 있고, 어머님이 등을 밀어주신 것도 있고, 거기에 약간에 호기심을 담아서 말 그려진 자동차 키를 받아 들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운전석에 앉아서 시동을 걸었다.
엔진 스타트 버튼을 누르자, 마치 지가 진짜 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5,000cc의 육중한 엔진이 푸루르륵 거린다.
나는 차 욕심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차를 가진다고 해도 미국 차는 특유의 투박한 디자인도, 쓸데없이 높은 배기량도 내 스타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타보니…. 개좋네.
자동차 회사에서 시승 서비스를 왜 운영하는지 알겠다.
나태주 선생님 시 처럼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직접 몰아봐야 지르고 싶어지는 거다.
***
따지면 단순한 드라이브였다.
해안도로를 따라 시계 방향으로 괌 남부지역을 반 바퀴 도는, 그런 단순한 드라이브였다.
그런 것치고는 생각보다 좋았다.
오후임에도 여전히 강렬하게 온 세상을 비추는 태양, 태평양을 머금은 시원한 바닷바람, 한적한 해안도로와 이국적인 풍경, 그리고 거칠지만 싫지 않은 머스탱 특유의 진동이 생각보다 조화 있는 그림을 만들어냈다.
단 하나, 옆좌석에 앉아 있는 서현 씨만 빼면.
서현 씨와 함께라서 불편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서현 씨가 이 그림에 안 어울린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냥 지금 서현 씨와 나의 상황이 조금, 아주 조금 어색하다는 거다. 조금 전 침실에서 있었던 사고 때문에 말이지.
물론 나도, 서현 씨도 그런 내색을 하지는 않는다.
“강이라고 하기엔 너무 좁기는 하지만, 저 강 이름이 타나고 강이에요. 강을 따라 하이킹하기가 좋아요. 크로스컨트리 마라톤 연습 장소로도 유명하다고 하더라고요.”라든가.
“저기 바위 보이시죠? 꼭 곰이 서 있는 모습 같아서, 저 만(灣)의 이름이 베어룩배이(Bear Look Bay)예요.”라든가.
“여기가 팔락비치예요. 괌 최남단 비치인데, 우리나라 해수욕장이랑은 좀 다르죠? 도심이랑 좀 떨어져 있어서 해가 지면 좀 위험하다고, 밤에는 가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같은 가이드를 해주었다.
겉으로 보기에 근처 명소를 설명해주거나, 목마르지 않냐며 생수병을 따주는 모습을 보면 평소와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런 서현 씨의 말과 행동에서 어딘가 좀 다른 느낌을 받았다.
모르겠다. 내가 아까 전 그 사건을 너무 의식하고 있어서 그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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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로운 속도로 해안도로를 따라 반 바퀴 조금 안 되게 이동한 우리가 처음으로 멈춘 장소는 메리조 부두공원(Merizo Pier Park)이었다.
메리조 부두는 괌 남쪽에 자리한 스노클링 명소인 코코스 아일랜드(Coco’s Island)를 연결하는 페리선이 정박하는 장소라고 서현 씨가 말해주었다.
우리는 바다가 잘 보이는 카페에 앉아 더위를 식혀줄 수 있는 차가운 음료를 홀짝이며,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해수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말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물론 우리가 만나고 초반에는 좀 어색하고, 대화가 끊기고, 그렇기는 했었지만, 그건 만난 지 얼마 안 된 때라 그랬던 거고, 최근에는 어색하다고 느끼거나, 그런 상황에서 탈피하기 위해 억지로 말을 걸거나 대화 주제를 만들어서 꺼내지는 않았다.
우리 대화는 자연스러웠고 즐거웠다. 대화가 끊겼다고 해도 어색함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어색함 속에서 말없이 바다만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음. 안 되겠네. 여행까지 왔는데, 분위기가 이래서는 안 되겠지. 뭐라고 말을 걸어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서현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마음이 너무 급했어요.”
나는 서현 씨를 바라보았다.
서현 씨의 눈은 여전히 바다를 향해 있었다.
바다를 바라보는 그 눈동자가 작게 떨리고 있었다.
***
강서현은 시선은 정면을 향해 있었다.
그런 그녀의 시선 끝에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다가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하늘을 마치 거울처럼 비추는 아름다운 바다가 있었다.
보여주고 싶었다. 이 바다를, 이 하늘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이 아름다움을, 이 여유로움을.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그를 위해서.
그를 위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녀 자신을 위해서였다.
한번 그렇게 마음을 정하자
외면하고 싶었다.
그가 웃음 짓고, 엄마와 이야기하고, 차 키를 받아 들고, 약간 흥분된 눈빛으로 차를 몰아가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속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죄책감을 외면하고 싶다는 유혹을 느꼈다.
괜찮지 않을까? 그의 기분이 풀렸다면, 이대로 그냥 모른 척, 아무 일 없는 척 넘어가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유혹을 느꼈다. 동시에 지금껏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혐오감을 느꼈다.
제대로 반성하지 않는 스스로에 대한, 도망치려 하는 그녀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었다.
이 매듭은 그녀가 지은 매듭이었다. 느슨해졌다 하더라도, 매듭은 매듭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매듭을 풀어내야 했다.
풀어내자.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제 마음이 너무 급했어요.”
힘주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