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 Knock Knock (1)
***
운전대를 잡고 있는 강서현의 표정은 살짝 굳어있었다. 굳어있는 얼굴처럼 강서현의 마음에도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자책이라는 이름의 어둠이었다.
생각이 짧았어. 어리석었고 이기적이었어.
강서현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런 상황을 원한 것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어버렸다.
아니, ‘어쩌다 보니’라는 단어는 비겁한 핑계였다. 그녀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오로지 그녀의 잘못이었다.
그가 친구들과 여행을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마음속에서 익숙지 않은 감정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딱히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는 모호한 감정, 꼭 분류하자면 ‘서운함’이라는 쪽에 가까운 그런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이 아닌 그에게 그런 마음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웃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면서 도와주겠다고, 숙소를 구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괜찮다고 했다. 고맙지만 친구들에게 자신에 대해서 설명해주기가 어렵다고 했고, 그런 그의 말이 모호했던 감정을 확실하게 ‘서운함’의 형태로 변모시키고 있었다.
그때 그가 말했다.
-‘아는 사람이 구해줬어’ 그렇게 말한다고 믿을 놈들도 아니고, 설사 믿는다고 해도…. 그냥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서운함’으로 변모하려던 그 감정이 눈 녹듯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
-제가 싫어요. 괜히 서현 씨에게 일 생기는 거. 우리끼리 가는 거라면 몰라도.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해버린 그 말.
-그럼 우리도 여행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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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동그랗게 뜬 눈이 귀여웠다. 놀란 얼굴이 좋았다. 시간을 낼 수 있는지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그의 마음이 기뻤다.
조금 더 그 표정을 보고 싶었다. 조금 더 그를 놀라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괌을 떠올렸다.
시간이 있으면 괌을 찾았다. 특별히 괌을 좋아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곳에 엄마가 있었으니까, 그곳이 엄마에게, 그리고 가족에게 특별한 장소였으니까.
엄마가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엄마는 괌에 있는 시간보다 한국에 체류 시간이 더 많았다. 얼마 전에도 서울에서 만나 저녁을 같이 먹기도 했다.
하지만 괌에서의 엄마는 조금 특별했다. 그곳이 엄마에게 특별한 장소였기에, 그렇기에, 괌에서의 엄마는 조금 더 행복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 엄마의 행복한 얼굴을 보는 것이 좋았다.
그에게 행복한 엄마를 보여주고 싶었다. 한식 요리연구가 신소현 선생님이 아닌, 강서현의 엄마를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엄마에게도 그를 보여주고 싶었다. 동그랗게 뜬 눈, 놀란 얼굴을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제가 정해도 될까요?
깊이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때 기분에, 당시 행복감에, 즉흥적으로 했던 결정이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
몰래 여권을 받으러 그의 고향 집을 찾아간 그 날.
“으이구. 이 녀석아. 귀찮게 뭘 이렇게까지.”
차 한 잔을 내어주신 어르신께서는 답답한 녀석이라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런 어르신의 눈빛이 싫지 않았다.
책망하시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렸을 적, 할아버지 품에 안겨서 전해 들었던 어르신은 무서운 분이셨다. 언제나 화가 나 있으셨고, 언제나 그 끝에는 무서운 벌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나 뵌 어르신은 자상한 말투와 인자한 미소를 가지고 계셨다.
마치 손녀를 대하는 것처럼.
“다녀와도 될까요?”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이렇게 편하게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할아버지나 오빠처럼, 무겁고 딱딱한 격식체를 사용해야 했지만, 이렇게 단둘이 있을 때는 마치 할아버지에게 말을 하듯, 그렇게 편하게 말할 수 있었다.
“허락을 맡으러 온 것도 아니지 않느냐. 강 회장은 뭐라고 하더냐.”
“아직 말씀 안 드렸어요.”
“쯧쯧. 손녀라면 아주 깜빡 죽는 친구인데, 나중에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이래서 품 안에 있을 때만 자식이라더니.”
그런 어르신의 말을 듣는데, 자꾸 미소가 지어졌다.
“일단 어르신의 허락부터 받아야 할 것 같아서요. 나중에 말씀드려야죠.”
“소현이는?”
“엄마는 아세요.”
어르신이 고개를 끄덕이신다. 마치, 그래야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강 회장에게는 제일 먼저 물어봤다고 해라. 섭섭해할 테니.”
“넵.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이야기가 끝났다. 하지만 어르신은 말없이 계속 바라보고 계신다.
알고 있다. 어떤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지.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잘 알고 있어요.”
목소리에 살짝 감정이 묻어난다. 괜찮은 척하고 싶었는데, 그 이야기가 나오자 자연스럽게 마음이 묻어난다.
어르신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다. 그저 깊은 눈으로 한참을 바라보시다,
“그 녀석 방 책상 밑에 가면 상자가 하나 있을 거다. 그 안에 있으니 찾아가도록 하고.”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 눈빛과 말씀 뒤에 어떤 마음이 숨어 있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잠시만 기다려보거라.”
어르신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카운터로 가서 잠시 이곳저곳을 뒤적이더니, 봉투 하나를 꺼내셨다.
“가져가거라.”
용돈이 담긴 봉투를 잠시 바라보다가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용돈을 받을 나이는 지났지만, 설사 그런 나이였다고 해도, /용돈(추가)/이 부족하지 않은 그녀였지만, 사양하지 않고, 어르신이 주는 봉투를, 마음을 받아 들었다.
“…위스키 사다 드릴까요?”
“됐다. 쓸데없는 데 돈 쓰지 말고. 여권이나 후딱 찾아서 올라가거라.”
“네.”
“소현이에게도 안부 전해주고.”
“알겠습니다.”
***
어르신의 허락도 받았다. 여권도 확보했다. 항공권도 예약했다. 모든 준비가 마무리되었다.
단 하나, 한수에게 엄마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 말고는.
알려줘야 했다. 알려주는 게 맞았다.
하지만 궁금해하는 한수의 표정이, 물어볼까 말까 고민하는 한수의 표정이 귀여워서, 그 얼굴을 조금 더 보고 싶어서, 조금씩 미루고 미루다 결국 그날이 되고 말았다.
예상대로 그 얼굴을 보여주었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가방에서 자신의 여권이 나왔을 때, 여행지를 알게 되었을 때.
그날처럼, 여행을 가자는 말을 들었던 그 날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눈을, 그 귀여운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 얼굴을 보면서, 나중에. 나중에 이야기해 줘야겠다. 한수에게는 미안하지만, 조금 혼날 수도 있겠지만, 엄마에게도 저 귀여운 얼굴을 보여주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
하지만 엄마를 만났을 때, 그때 보여준 그의 얼굴은 예상과는 달랐다.
놀란 것은 분명하지만, 그 놀람에는 당혹감이 섞여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서야 제정신이 들었다.
왜 기분 나빠할 것이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
당연히 그런 생각을 했었어야 했는데, 엄마를 만난다는 것은 갑자기 공항에 가게 된다거나, 비행기에 타게 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인데.
그때야 자신이 얼마나 생각이 짧았는지, 어리석었는지, 이기적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한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바라보고 싶은 것만 바라보고 있었다. 여행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마력으로 핑계를 대기에는 너무나 큰 잘못을 저질러버렸다.
거기까지 생각한 강서현의 눈에, 저 멀리 집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강서현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일단 사과해야지. 사과한다고 해서, 용서받는다고 해서 생각이 짧았고, 어리석었고, 이기적이었다는 사실이 없어지는 건 아니겠지만.
강서현은 그렇게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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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주차하고, 멜론 세 개가 담긴 묵직한 봉투를 집어 든 강서현은 문을 열기 전 문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어 각오를 다진 후,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나 거실로 들어온 강서현의 눈에 보인 모습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한수와 엄마가 소파에 나란히 앉아 태블릿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서현이 다섯 살 때예요. 어린이집 가야 하는데 이날 옷이 마음에 안 든다고 뾰루퉁해져 있는데, 저 얼굴이 너무 귀여워서 재빨리 사진을 찍었죠.”
엄마가 한수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한수는 ‘오오’ 하는 표정으로 태블릿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거지?
“그리고 이 사진은 어린이집 재롱잔치 할 때…. 어머. 서현이 돌아왔니?”
뒤늦게 딸을 발견한 엄마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며 딸을 반겼다.
“어…. 응. 이거.”
강서현이 손에 들고 있던 봉투, 멜론이 세 개나 남겨있는 봉투를 들어 보였다.
“고마워. 우리 딸. 고생했어요. 무거웠지?”
엄마가 서현이에게 다가오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목소리.
“서현 씨, 수고하셨어요. 어머니. 그거 제가 들게요. 주방에 가져다 놓으면 되겠죠?”
한수가 뒤따라 일어서며 그렇게 말했다.
“그래 줄래요? 고마워요. 테이블 위에 놔주면 돼요.”
엄마는 그렇게 말하고는 주방 쪽으로 몸을 돌렸다.
놀란 표정으로 현관 앞에 서 있는 강서현에게 다가온 한수는.
“어? 이거 무겁네요. 역시 같이 갈 걸 그랬나 봐요.”
강서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그 자리에 계속 멍하니 서서, 멜론이 담긴 봉투를 들고 주방으로 가는 한수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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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이 준비해주신 침실은 2층 복도 가장 오른쪽에 있는 침실이었다.
2면에 커다란 창문이 나 있고, 양 창문 모두에서 바다를 감상할 수 있는, 이 저택에서 가장 좋은 전망을 가졌다는 이 침실이 내일모레까지 내가 머물 공간이었다.
나는 창가에 서서 바다와 하늘이 만들어내는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 거실에서 수평선은 바라볼 때는 뭔가 마음이 좀 그랬는데, 마음이 풀려서 그런가, 무언가 조금 감동스럽다는 생각까지 든다.
이래서 마음이 참 중요한 거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진짜 맞는 말이라니까.
아니지. 지금 한가롭게 풍경이나 감상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빨리 옷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해야지.
서현 씨 어머님은 저녁 먹을 때까지 아직 시간이 있으니 잠시 가까운 곳이라도 둘러보고 오라고 하셨다. 서현 씨하고 단둘이서 말이지.
솔직히 어머님은 저녁 준비하시라고 하고, 우리끼리 나가서 노는 게 좀 죄송스럽기도 하고 해서 괜찮다고 도와드리겠다고 말씀드렸는데, 괜히 옆에서 알짱거리면 준비하는 데 더 귀찮다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정이 만들어진 거지.
일단 씻자. 씻고 생각하자.
가장 좋은 침실이라서 그런지, 게스트룸인데도 방 안에 욕실이 따로 붙어 있다. 역시 바닷가 고급저택.
이런 집은 얼마나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일단 서현 씨가 싸준 캐리어를 풀었다.
역시 우리 서현 씨. 깔끔하게 접힌 옷들이 캐리어 안에 차곡차곡 쌓여있다. 그리고 그 옷들 중에는 수영복하고, 2박 3일 동안 갈아입을 속옷도 있었다.
흠. 역시 속옷은 좀 부끄러운데.
기본적으로 성수동에서 빨래는 가사를 도와주시는 이모님께서 /도와주시고는(해주시곤)/ 하는데, 가끔 나나 서현 씨가 빨래를 할 때도 있다.
근데 내가 빨래를 할 때 보면 거의 다 내 옷이었다.
뭐 사실 서현 씨 옷을 내가 빠는 것은 좀 부담스럽기는 하다. 아무래도 여자 옷이 더 비싸고 섬세하니까 내 옷처럼 그냥 세탁기에 다 때려 넣고, 세제랑 섬유유연제 넣고 돌리면 안 되지 않을까?
그렇다고 서현 씨 옷이 아주 없는 건 아닌데, 확실히 서현 씨 속옷을 본 적은 없다.
아니 뭐, 내가 변태도 아니고. 막 서현 씨 속옷을 직접 손빨래하고 싶다, 그런 마음은 추호도 없다. 진짜로. 할아버지에게 맹세코!
근데, 나는 그냥 속옷이든 뭐든 빨래통에 던져놓으니까, 서현 씨가 빨래를 할 때 내 속옷도 같이 들어간다는 거지.
좀 뭐랄까. 신경 안 쓴다면 거짓말인데, 그렇다고 쫌스럽게 내 팬티는 내가 빨겠어! 그러면서 혼자서 조물조물 손빨래하고 싶지도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아무튼 빨래도 그렇고, 이번에 짐 쌀 때도 그렇고, 서현 씨는 내 속옷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걸까?
왜 저번에 나 아팠을 때도, 그때 할아버지에게 능력 뺏기고 몸살 걸려서 골골거렸을 때도, 서현 씨가 내 속옷 챙겨 줬잖아. 속옷만 챙겨줬나?
씻겨준다고까지 했지.
서현 씨는 나를 전혀 남자로 안 보는 걸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옷을 벗었다.
똑똑.
겉옷을 다 벗고 딱 팬티만 남았을 때,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
본능적으로 그렇게 대답을 해버린 나는 순간적으로 내가 팬티만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깨달았지만, 너무 당황한 나머지 어쩌지도 못하고 열리는 문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한수 씨, 잠깐 괜찮…!”
열린 문으로 들어오던 서현 씨가 내 모습을 보고는 굳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