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203화 (203/271)

203 : 서현이의 라임오렌지나무 (2)

더 이상 놀랄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잘못된 생각이었다.

수치화할 수는 없지만, 공항에서 어머님을 뵈었을 때보다 지금이 조금 더 놀란 상태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놀란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로, 어머님께서 해주셨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강 회장님은 손녀딸을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하셨다. 손녀딸을 사랑하지 않는 할아버지가 어디 있겠냐마는, 또 손녀라면 정말 말 그대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예쁘고 사랑스러웠겠지만, 강 회장님에게 서현 씨는 유독 아픈 손가락이었단다.

다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아빠를 잃어버린, 남은 인생 동안 아빠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그런 손녀였기에, 회장님은 유독 서현 씨를 아끼고 예뻐해 주셨단다.

강 회장님은 아직 꼬마였던 서현 씨를 무릎에 앉혀놓고 옛날이야기를 해주시는 것을 좋아하셨단다. 꼬마 서현 씨도 할아버지가 옛날이야기 해준다고 하면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내팽개치고, 할아버지 품에 안겨들었단다.

“옆에서 보면 신기할 정도였어요. 엉엉 울다가도, 할아버지가 ‘옛날이야기 해줄까?’ 그러면 울음을 뚝 그치고 할아버지에게 달려가곤 했었으니까요.”

어머님은 그 모습이 마치 눈에 선한 듯, 행복한 미소를 띠며 계속 말씀하신다.

“그런데 서현이는 다른 또래 아이들과는 다르게 공주님 이야기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어요. 할아버지만 만나면 어르신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곤 했었어요. 아버님도, 그런 서현이가 예쁘고, 또 워낙 좋아하니까, 어르신 이야기를 계속 해주셨어요.”

“우리…할아버지요?”

“네. 사실 저는 옆에서 들으면서 서현이가 아직 어린 애긴데, 저런 이야기를 해줘도 될까 싶은 걱정이 들기는 했지만, 할아버지 품에 안겨서 두 주먹을 꼭 쥐고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이야기를 듣는 서현이를 보면 뭐라고 하기도 그렇고, 또 그 모습이 또 귀엽기도 하고 그래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어르신 이야기 중에서 서현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서현이와 같은 나이 또래의 말썽꾸러기 작은 어르신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제 이야기요?”

“네.”

“어떤 이야기를….”

“말썽부리다가 어르신에게 혼난 이야기들이요. 지붕에서 뛰어내렸다가 발목 부러진 이야기 같은.”

어머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고 쿡쿡 웃으신다.

“아….”

어렸을 때, 친구들이랑 K캅스 보다가 내가 최종일이다, 아니다 내가 최종일 할 거야. 그러면서 투닥거리다 가장 용감한 사람이 최종일 하는 거다! 그러면서 지붕에서 뛰어내렸었더랬다.

어머님 말씀처럼 발목이 부러지지는 않았지. 한 이틀 쩔뚝거리고 말았는데…. 아프기는 할아버지에게 꿀밤 맞은 게 백배는 더 아팠었더랬지.

아니,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내 어릴 적 이야기를 서현 씨가 알고 있었다고?

“서현이에게 어르신의 이야기는 진짜로 동화 속 옛날이야기처럼, 전설처럼 받아들여졌겠지만, 비슷한 나이에 열심히 말썽부리는 작은 어르신의 이야기는 생생한 친구 이야기처럼 받아들여졌던 것 같아요. 마치 이웃집 말썽꾸러기처럼 말이죠. 서현이는 작은 어르신 이야기를 들으며 웃고 즐거워했고. 그러다가 어느새 얼굴도 보지 못한 작은 어르신이 서현이에게 친구가 되어주셨던 거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구나. 나에 대해서 알고 있었구나.

“물론 서현이가 크고 어릴 때처럼 할아버지 품에 안겨 이야기를 듣지는 않았지만, 작은 어르신의 이야기는 계속 전해 들었어요. 서현이가 미국에서 공부한 것은 알고 계시죠?”

“…네.”

“힘들었을 거예요. 물론 경제적으로 어려움은 없었겠지만, 그렇다고 유학 생활이 마냥 편하고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을 테니까요. 사실 서현이는 그런 이야기를 잘 하지는 않아요. 엄마에게는 좀 터놓고 어리광도 부리고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런 성격이 아니니까요. 그래도 엄마니까 서현이 얼굴을 보면 알죠. 우리 딸 힘들구나. 우리 딸. 외롭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물질적으로는 걱정 없는 유학 생활이었다고 해도, 질풍노도 사춘기 시기에 외국에서의 생활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나도 한국에서 일을 했으니까 자주 만나러 가지는 못했어요. 그래도 가끔 시간을 내서 서현이를 만나거나, 서현이가 방학 때 들어와서 가족들이 모여서 밥을 먹거나 하면, 아버님이 작은 어르신의 소식을 슬쩍슬쩍 전해주셨어요. 사랑하는 손녀를 웃음 짓게 만드는 확실한 카드였으니까요.”

갑자기 좀 부끄럽다. 서현 씨가 유학생일 때면, 나는 한참 고향에서 사고치고 다닐 때였는데. 시베리안 한수키였을 때였는데.

“처음에 서현이가 작은 어르신을 모신다고 했을 때, 저는 반대했었어요,”

“네? 아. 네.”

당연한 말씀이다. 엄마 입장에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게 당연하지.

“미안해요.”

“아닙니다. 그러시는 게 당연하죠. 제가 죄송합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서현 씨 어머님은 그런 날 보며 다시 작게 웃고는 계속 말씀을 이어가셨다.

“저뿐만이 아니었어요. 아버님도 안 된다고, 절대 안 된다고 그렇게 반대하셨는데, 서현이가 고집을 부렸어요. 서현이는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그렇게 고집을 부린 적이 없었는데, 우리 모두 너무 놀랐었어요. 그리고 그때 서현이 오빠가 한번 맡겨보자고 말했어요.”

“오빠…라면 강우현 팀장님께서.”

“만나본 적 있죠? 우리 아들?”

“네.”

“어땠어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게 생겼죠?”

“네? 아니요.”

나는 그렇게 일단 부정했다.

내가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여기서 ‘정말 그렇던데요?’ 같은 말을 할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지.

“내 아들이지만, 우현이는 어릴 때부터 대견했어요. 가끔 보면 너무 애어른 같아서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죠. 그런 우현이가 한번 맡겨보자고 이야기를 했을 때, 솔직히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서현이가 계속 고집을 부리고, 우현이도 그런 말을 하니까 어쩔 수가 없었죠. 두 사람이 한집에 머물게 되고 계속 걱정을 하던 와중에, 서현이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이야기?

“어떤….”

“스케치북.”

스케치북? 서현 씨가 들고 있던 스케치북.

어머님의 말씀에 얼굴이 확 붉어진다.

아니, 우리 서현 씨 어머니께 그런 이야기까지 하셨다고?

“작은 어르신.”

“네?”

“질문 하나 드려도 될까요? 서현이 엄마로서.”

“…네.”

“우리 서현이. 소중하게 생각해주고 계신가요?”

그렇게 묻는 어머님의 눈이 내 눈을 바라보고 있다.

할아버지를 모시는 사주(四柱) 중 하나인 강씨 가문의 일원으로서가 아닌, 딸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어머니의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서현 씨는… 저에게 감사하고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에게뿐만 아니라 서현 씨 주변의 다른 분들에게도, 회장님이나 강우현 팀장님이나 그리고 어머님에게도 소중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서현 씨 어머님의 눈동자를 마주 바라보며 천천히, 그러나 확실한 어조로.

“어머님 앞에서 부끄러운 행동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드렸다.

내 대답에 어머님이 다시 미소를 지어주신다.

“고마워요. 그렇게 우리 서현이를 소중히 대해주셔서.”

어머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창밖을 슬쩍 바라보시더니.

“이제 슬슬 서현이가 올 때가 된 것 같으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이것부터 말씀드릴게요. 말씀드렸다시피 이곳은 우리 가족에게 있어서 특별한 장소랍니다. 그리고 작은 어르신은 서현이가 이곳에 데려온 첫 번째 친구이고요.”

첫 번째 친구. 그 말이 어쩐지 마음속에 콕 하고 박혀온다.

“서현이가 처음 작은 어르신을 이곳에 모셔오고 싶다고 말하면서 그런 걱정을 했었어요. 혹시나 작은 어르신께서 부담스러워하시거나 싫어하시면 어쩌나 하는 그런 걱정. 내 딸이지만 우리 서현이는 이성적인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즉흥적으로 무언가를 결정하거나, 상대방의 동의 없이 이렇게 일을 진행하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아, 한 번 있네요. 작은 어르신 모시겠다고 했을 때.”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작은 어르신이 죄송하실 건 아니죠. 서현이가 죄송해야죠. 아무튼, 서현이가 그랬어요. 작은 어르신에게 말씀을 드려야 하는데 못 드리겠다고.”

“…왜요?”

“궁금해하는 작은 어르신의 얼굴이 너무 재미있고 귀여워서 그리고 놀라게 해주고 싶어서, 말을 못 하겠다고.”

다시 얼굴 온도가 확 올라간다.

아니, 이 아가씨가!

어머님께 그런 말까지 했단 말이야? 아우. 진짜 사람 부끄럽게.

“죄송하다고, 그리고 고맙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네?”

“우리 서현이가 그렇게 장난기 가득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래서 엄마인 저도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작은 어르신을 곤란하게 만드는데 손을 보탰어요. 지금도 그래요. 사실 서현이가 작은 어르신께 제대로 사과드리는 것이 맞는데, 엄마 입장에서는 작은 어르신께서 서현이를 안 좋게 생각할까 봐 제가 나서게 되었어요. 이 부분도 사과드리고 싶어요. 많이 놀라시고 불쾌하셨겠지만, 나쁜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감안해 마음을 푸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머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며 다시 고개 숙이신다.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어머님께서는 서현 씨를 일부러 내보내신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솔직히…. 놀라기는 했습니다. 전혀 예상 못 한 상황이었으니까 놀라기는 했지만, 기분이 상했다던가 그런 건 전혀 없었습니다. 서현 씨가 어떠한 마음이었는지 전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 그리고 혹시라도 제가 어머님께 실례가 되는 모습을 보였다면, 놀라고 당황해서 그랬던 것이니 용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어머님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도 다시 머리 숙여 어머님께 감사를 표했다.

“말이 나온 김에, 그러면 머무시는 것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어머님이 그렇게 물어보신다.

“…네?”

“작은 어르신이 머무실 침실을 준비해놓기는 했는데, 혹시 여기서 머무시는 것이 불편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호텔도 예약을 해놓았거든요.”

어머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고 내 대답을 기다리신다.

자, 여기서 내가 할 대답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네? 네. 듣겠습니다.”

“어머님이 말씀하신 대로, 제가 이곳에 놀러 온 첫 번째 서현 씨 친구니까 그… 저기, 작은 어르신 말고 한수라고 불러주시면…. 사흘 동안 신세를 져야 하는데 그렇게 불러주시는 게 더 편할 것 같아서요.”

내 말에 어머님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으시더니 다시 미소 지어주신다.

확실히 서현 씨는 어머님을 닮았다.

“고마워요.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편하게 지내주셨으면 좋겠어요.”

“네.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슬슬 서현이가 올 때가 되었네요. 우리 지금 이야기는 비밀로 해도 될까요?”

“네. 절대로 누설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어머님과 나 사이에 작은 비밀 하나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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