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 서현이의 라임오렌지나무 (1)
***
몸이 파묻혀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푹신한 소파에 앉아 반쯤 멍한 눈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시선 끝에는 한국에서는 건축법상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커다란 거실 통창. 통창 너머의 에메랄드빛 바다와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르른 하늘이 만들어낸 수평선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그런 그림 같은 풍경 아니, 인간이 그려내는 그림으로는 절대로 표현해낼 수 없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이 창문 너머로 펼쳐져 있었지만, 그 아름다운 대자연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복잡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괌 국제공항에서 자동차로 20분 정도 떨어진 파고만(Pago Bay) 고급주택단지. 그 단지 안에서도 가장 바다와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2층짜리 고급저택의 거실 소파.
지금 내가 앉아 있는 곳이다.
나는 주방에 있는 서현 씨와 어머님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끝없이 이어진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면서 30분 동안 나에게 일어난 일들을 다시 되돌려 보았다.
입국장에서 우리를 맞이해주신 분은 저번에 성북동 할아버지 집에서 뵈었던 한식 요리연구가 신소현 선생님, 아니 서현 씨 어머님이셨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서현이 엄마입니다.”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며 그렇게 인사해주시는 서현 씨 어머님의 모습에 나는 순간적으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예의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연장자이고 서현 씨 어머님이라는 입장을 봐도, 내가 그렇게 멍청하게 있었으면 안 되는 거였다.
하지만 그런 논리적 계산을 하기에는 나는 너무 당황했고, 예의에 어긋나게 한 박자 늦게서야 어머님께 인사를 드릴 수 있었다.
어찌저찌 정신을 다잡고 인사는 드렸지만, 여전히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고, 한번 쿵 하고 멈추었던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인사를 드린 후, 서현 씨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어머님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 것을 옆에서 지켜봤다. 그리고 어머님이 직접 운전하시는 차를 타고, 열대 휴양지의 이국적인 풍경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다.
나는 바다를 바라보던 시선을 움직여 주방 쪽을 바라보았다.
안쪽이 보이지는 않지만, 주스라도 만드시는지 믹서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 사이사이로 서현 씨와 어머님이 나누는 대화도 어렴풋이 섞여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계속 일어난 하루였다.
하지만 서현 씨 어머님을 뵙게 된 순간, 인천공항, 갑자기 나타난 내 여권, 괌으로 가는 항공권, 비즈니스 클래스 같은 것들은 모두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내가 또 놀랄 일이 남아있을까?
지금 마음 같아서는 5분 있다가 우주선을 타고 국제우주정거장(ISS)에 가야 한다고 해도 ‘그렇군요.’ 하고 수긍할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주방에서 서현 씨와 어머님이 모습을 드러내셨다.
“저희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어머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며 맛있어 보이는 색깔의 열대과일 주스가 담긴 컵을 내 앞에 내려놓으셨다.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시하고, 주스를 들어 올려 한 모금 마셨다.
그랬는데 보기와는 달리 시다. 엄청 시다. 인공적인 감미료는 하나도 들어있지 않은지 실수로 식초를 잘못 넣으신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의 강한 신맛이 입 안을 자극했다.
하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어머님과 서현 씨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극한의 인내심으로 시다는 내색은 하지 않고, 한 모금을 더 마셨다.
“산미가 좀 강하죠? 피로 회복에 신맛이 도움이 되기에, 조금 진하게 만들어봤는데, 괜찮으신가요?”
어머님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작게 웃으시더니 그렇게 말씀하신다.
“네. 맛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어머님께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를 표했다.
피로 회복은 모르겠지만, 확실히 정신은 번쩍 든다.
“과일을 좀 내어오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다시 주방 쪽으로 가셨고, 서현 씨는 내 옆에 그대로 남아주었다.
“괜찮으세요?”
옆에 앉은 서현 씨가 물어본다.
“네. 괜찮아요.”
내 대답을 들은 서현 씨는 잠시 동안 말없이 내 눈을 바라보다가,
“…진짜 괜찮으세요?”
그렇게 다시 물어본다.
나는 그런 서현 씨를 보고 작게 웃고는,
“…아니요.”
그렇게 대답했다.
그런 내 대답에 서현 씨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안해요.”
그렇게 사과한다.
서현 씨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나는 괜찮다는 말 대신 서현 씨의 눈을 바라보았다.
설명을 들을 자격이 있지 않으냐는 시선으로.
***
어머님께서 주방에서 과일을 준비하시는 동안, 나는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님께서는 특별한 일이 없으시면 이곳에서 지내신다고 했다. 물론 어머님도 하시는 일이 있으시니까, 한국에서 머무는 시간이 더 많기는 하지만, 대략 1년에 3분의 1 정도의 시간은 이곳에서 보내신다고 했다.
그렇기에 서현 씨나 서현 씨 오빠인 강우현, 그분도 시간이 있으면 이곳에 쉬러 온다고 했다. 작년 여름에도 지난겨울에도 서현 씨는 이곳에서 어머님과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회장님도 자주는 아니어도 1년에 한 번씩은 다녀가신다고.
하지만 나를 만난 다음 한 번도 이곳에 오지 못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 이유 중 하나임이 분명한 나는 그저 묵묵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도 알고는 있었다. 처음 같은 집에서 지내자는 결정을 하게 되었을 때, 서로의 생활에 영향을 주지는 말자고 그렇게 약속을 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서현 씨가 나를 위해 여러 가지를 희생하고 있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는 있었다.
서현 씨가 나를 위해서 많은 것을 양보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오늘 어머님을 뵈었을 때 놀랐고 또 당황했던 것이지, 서현 씨에게 화가 났다거나 기분이 상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 여행 이야기가 나왔을 때, 한수 씨를 여기로 모셔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끝까지… 비밀로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말씀드리려 했는데, 말씀드려야 했는데, 그랬는데….”
서현 씨가 거기까지 말을 했을 때, 주방에서 서현 씨 어머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현아.”
깜짝 놀란 우리 두 사람의 고개는 자연스럽게 주방 쪽으로 향했다.
“어머. 죄송해요. 제가 서현이를 잠시만 빌려도 될까요?”
주방에서 모습을 드러낸 서현 씨 어머님이 나를 보며 그렇게 말씀하신다.
“네? 아. 네. 저는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서현아, 미안한데 마트 좀 다녀와 줄 수 있을까? 분명 어제 장을 봐왔는데, 깜빡하고 멜론만 빼놓고 온 것 같아. 미안한데 잠깐 다녀올 수 있겠니?”
“응? 지금?”
“대학교 앞에 슈퍼마트 알지? 전화해놓을 테니까. 지금 다녀와 줄래?”
어머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며 전화기를 집어 드신다.
서현 씨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저는 괜찮아요. 다녀오세요. 아니, 저도 같이 갈까요?”
내가 서현 씨에게 말했다.
“아니에요. 귀한 손님이신데 그럴 수는 없죠. 그리 멀지도 않아요. 부탁할게, 우리 딸. 거기 사장님이 챙겨줄 텐데, 혹시 모르니 허니듀 멜론인지 꼭 확인해줘.”
하지만 서현 씨 어머님께서 상황을 그렇게 정리하신다.
“응. 알았어. 갔다 올게요.”
서현 씨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깝다고는 해도 걸어갈 거리는 아닌지, 자동차 열쇠를 챙긴 서현 씨는 나를 한번 돌아보고는 입 모양으로 ‘미안해요.’ 그렇게 말해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집 안에는 나와 서현 씨 어머님만이 남게 되었다.
***
문이 닫히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는 이내 점차 멀어져갔다.
자동차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어색한 침묵과 공기가 거실을 메워가기 시작했다.
뭐라도 말을 걸어드려야 하나? 그렇게 고민하던 그 순간.
“제가 잠깐 앉아도 될까요?”
어머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네? 네, 앉으세요.”
내 집도 아닌데,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그런 말을 해버렸다.
서현 씨 어머님께서는 작게 미소 지으시고는 내 맞은편에 앉으셨다.
그리고는 잠시 동안 말없이 날 바라보신다.
그렇게 어색한 아니, 나 혼자만 어색한 시간이 10여 초 정도 흐른 뒤에,
“일단 사과 먼저 드릴게요. 죄송합니다.”
어머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며 고개를 숙이신다.
어떤 부분에 대해서 사과하시는 건지 전혀 감을 잡을 수는 없었지만, 일단 나도 ‘아닙니다.’ 같은 말을 하면서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들자 서현 씨 어머님께서 옅은 미소를 보여주시고는,
“서현이가 여기에 누굴 데려온 것은 처음이에요.”
그렇게 말씀하신다.
이 상황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확실히 서현 씨는 어머님을 닮았구나. 특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뭔가 안심이 될 것만 같은 미소가 어머님을 닮았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곳은 서현이에게,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는 특별한 장소랍니다.”
서현 씨 어머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시작하셨다.
***
나는 말없이 어머님이 해주시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얼마 전, 그러니까 처음 우리가 여행을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던 그 날, 어머님은 서현 씨의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나와 함께 가겠다고, 괜찮겠냐고.
그 이야기에 어머님께서도 조금 놀라셨다고 하셨다. 갑작스러운 방문도 그렇지만, 서현 씨가 이곳에 누군가를 데리고 오겠다는 말을 한 적은 처음이었으니까.
“서현이 오빠도 그렇지만, 서현이도 친구가 그리 많지는 않았어요. 아무래도 상황이 다른 아이들하고는 조금 달랐으니까요.”
친구라는 관계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져야 한다. 숨은 의도 없이, 그저 순수한 우정을 기반으로 구축되어야 하는 관계가 친구 관계이다. 어른들도 물론 그렇겠지만, 특히 어린아이들 사이에서의 친구 관계는 더욱 그러해야 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서현 씨에게는 그런 순수한 친구가 그리 많지 않았다고 어머님께서는 말씀해주셨다.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그저 서로 같이 놀고 싶을 뿐인데, 재벌가,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거대한 재벌가의 귀한 손녀였던 서현 씨에게 다가오는 친구들의 뒤에는 어른들의 더러운 욕망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았을 테니까.
“서현이는 또래 아이들보다 조금 더 똑똑한 아이였어요. 그리고 어른들이 숨긴 생각을 빨리 눈치채는 아이였고요. 그렇기에 서현이는 다른 또래 아이들보다 조금 더 외로운 아이일 수밖에 없었어요. 서현이의 잘못이 아닌데, 서현이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엄마 입장에서 그런 서현이를 보는 건 슬픈 일이었어요.”
그런 말씀을 하시는 어머님의 표정에는 옅은 슬픔이 묻어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에 대한 엄마의 사랑은 다르지 않을 테니까. 재벌가라고 해서 다르지 않을 테니까.
“대신 서현이에게는 다른 애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친구가 있었어요.”
어머님이 말씀하신다.
“특별한 친구요?”
“네. 상상 속의 친구.”
나는 순간적으로 어머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상상 속의 친구?
“혹시 밍기뉴 같은, 그런 상상 속의 친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의 주인공 제제는 새로 이사한 집 마당에 심어져 있는 라임 오렌지나무에게 밍기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친구가 된다. 이후 밍기뉴는 제제의 말 상대이자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준다.
“어머. 읽어봤어요?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어머님이 놀란 눈으로 그렇게 말씀하신다.
그럼요. 저 책방 손자입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어머님에게 점수 1점 딴 거라고 봐도 되겠지?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네. 밍기뉴 같은 친구, 서현이에게 다가와 말을 걸어주고, 장난을 쳐주던 그런 친구가 있었어요. 하지만 제제의 밍기뉴하고는 달랐어요. 서현이의 상상 속 친구는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어머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
“누구였는데요?”
내 질문에 어머님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며 웃고만 계신다.
설마?
“…저요?”
“네. 작은 어르신이 서현이의 가장 친한 친구였어요.”
그렇게 말씀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