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 Tano I' Man Chamorro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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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금요일. 서현 씨와, 그것도 단둘이서 가는 첫 번째 여행 날이 밝았다.
그 말은? 그동안 서현 씨가 꽁꽁 감춰왔던 진실이 밝혀지는 날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진실 앞에서 나는 놀란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인천공항 출국장에 서 있으니까.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거냐 하면… 일단 어젯밤 이야기부터 해보자.
궁금함 반, 설렘 반으로 알바를 하는 둥 마는 둥 그렇게 보내고 와서 집에 왔는데, 거실에 캐리어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큰 거 하나, 작은 거 하나.
서현 씨가 짐을 싸면서 내 짐도 미리 싸놓은 거다. 큰 캐리어가 서현 씨 거, 작은 캐리어에는 내가 입을 옷.
기껏해야 2박 3일인데 캐리어까지 필요할까? 속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뭐 여자들은 이것저것 필요한 게 많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일단은 그냥 납득하고 넘어갔다. 캐리어를 봤지만, 비행기를 타게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늦어도 아침 6시 반에는 집에서 나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출발이 좀 이르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뭐 잘못 걸리면 고속도로에서 몇 시간을 그냥 허비해야 할 수도 있는 휴가철이니까 미리미리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기는 하겠다며, 그렇게 넘어갔다.
하지만 오늘 새벽. 서현 씨가 운전하는 차가 뻥 뚫린 강변북로를 따라 서쪽으로 달려갈 때, 단지 서쪽으로 나아가는 데에서 끝나지 않고, 공항고속도로로 접어들었을 때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설마, 우리 공항으로 가는 건 아니죠?”
“비밀이에요.”
내 질문에 서현 씨는 그렇게 대답하고 빙긋 웃기만 했다.
나는 서현 씨의 말과 미소에서 우리가 지금 공항으로 가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고, 그런 확신이 드는 순간 내 머릿속에서 한 가지 경고 신호가 크게 울렸다.
왜냐하면, 나 여권이 없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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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무리 시골에서 흙 파먹고 살던 촌놈이라고 해도, 해외 나갈 때 여권이 필요하다는 것과 비행기 탈 때 신발 안 벗어도 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제주도 가는 것도 아니고, 해외 나가서 입국 심사받을 때, 주민등록증 내밀면서 ‘나는 대한민국 정부에 보호를 받는 대한민국 국민이오!’ 해봤자, ‘응, 꺼져.’ 소리 듣게 될 거다. 아니, 애초에 비행기를 못 타겠지.
정확히 말하면 ‘지금’ 없는 거다. 발급은 받았다. 작년 여름에 지수가 가족여행 때문에 여권을 재발급 받을 때, 나도 따라간 김에 만들어버렸거든.
뭐, 그때는 돈 모아서 같이 해외여행 가자는 꿈과 희망에 부풀어 있었더랬지.
아니,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아직 도장 한 번 안 찍힌 순수한 여권이 있지만, 지금 없다는 거다. 성수동 집에 있으면 어떻게든 빨리 갔다 오면 되겠지만, 그것도 불가능하다.
내 여권 지금 고향에, 할아버지 집 내 방에 있거든.
지수랑 깨지고, 그 녀석이랑 추억이 담긴 물건 중에서 버릴 건 버리고, 버리지 못하는 건 다 고향 집에 가져다 놓았다.
정리하면 나는 ‘지금’ 여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고향 집에 들러 여권을 가지고 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비행기를 탈 수 없다.
우리 똑똑한 서현 씨가 설마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리가 없을 텐데…. 분명히 여권 없이는 출국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기다리셨죠? 갈까요?”
발렛 주차를 맡기고 온 서현 씨가 나에게 다가오며 말한다.
“네? 어디로요?”
“체크인하러요. 왜 그러세요? 무슨 문제 있으세요?”
서현 씨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당연히 문제가 있죠!
“네.”
“어떤 문제요?”
“저 여권이 없는데요?”
“어머, 그래요? 큰일이네. 여권 없으면 어떻게 하죠?”
서현 씨가 그렇게 말한다. 그런데 말과는 달리 얼굴에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여전하다.
뭐지? 왜 저렇게 평온하지?
“음. 일단 카운터 가서 부탁해볼까요? 여권 놓고 왔는데, 다음에 보여줄 테니까 오늘은 일단 어떻게 안 되겠냐고, 절대 남들에게 이야기 안 할 테니까. 몰래 태워달라고.”
서현 씨는 초등학생을 안심시키는 담임선생님 같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다.
아니! 이 언니야! 그게 말이 되냐고요! ‘어머, 버스카드 충전을 깜빡했네.’ 그러면, 기사님이 ‘학생, 괜찮아. 다음에는 두 번 찍고 타라고 껄껄껄.’ 하는 정이 살아있는 시내버스도 아니고, 비행기에 몰래 태워달라면 태워주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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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체크하겠습니다. 괌 국제공항까지 가는 한국항공 113편, 출발 시간은 9시입니다.
탑승 게이트는 250번 게이트이고, 항공사 라운지는 249번, 253번 게이트 앞에 위치해 있습니다. 탑승 마감 시간은 8시 30분이니까 늦지 않게 탑승 부탁드리겠습니다.”
예쁜 유니폼을 입은 항공사 직원 언니가 항공권에 빨간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쳐가며 그렇게 말해준다.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한 서현 씨는 탑승권 두 장을 받아 여권 사이에 낀 후 나에게 건넨다.
“여기요.”
나는 멍청한 표정으로, 아니, 내가 내 표정을 볼 수 없으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벙찐 표정으로 서현 씨가 건네주는 여권을 받아 든다.
그리고 펴보았다.
여권 두 번째 페이지에는 내 이름과 인적 사항이 적혀 있다. 내 사진과 함께.
작년에 발급받은 그 여권이다. 고향 집 내 방, 책상 밑 상자에 있어야 할 여권이 지금 내 손에 들려있다.
최악의 경우, 할아버지에게 욕먹는 것을 감수하고, 시간 멈춘 다음 고향 집으로 슉! 순간이동 해서 가져오려고 생각해둔 여권이 서현 씨 가방 안에서 나왔다.
어떻게?
“라운지 가기 전에 면세점부터 돌아볼까요? 한수 씨 뭐 사고 싶은 거 있어요?”
서현 씨가 그렇게 말한다.
나는 말없이 서현 씨를 바라보았다.
“사진 잘 나왔던데요?”
서현 씨가 웃으며 말한다.
“사진. 네. 뭐. 아니, 사진이 중요한 게 아니고,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서현 씨는 내 질문에 작게 웃고는.
“일단 들어가서 설명해 드릴게요. 가실까요?”
그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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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게임 보면 스턴(Stun) 계열의 기술 있잖아? 맞으면 머리 위로 별이 빙글빙글 돌면서 정신 못 차리게 되는 그런 기술.
지금 내가 딱 그 스턴기를 맞은 상황이었다.
어제 제대로 못 잤지, 아침부터 계속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른 채, 서현 씨에게 끌려다녔지, 내 손에는 여기서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내 여권이 있지. 그 여권에는 한 시간 후 괌으로 출발하는 항공권이 끼워져 있지, 머리에 별이 빙글빙글 도는 상황에서 서현 씨 손에 이끌려 보안 검색과 출국 심사를 받았다.
긴장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보안 검색과 출국 심사가 끝나자마자, 서현 씨에게 두 번째 연속기를 당해버렸다. 면세점이라는 연계 기술 말이다.
정신 차릴 새도 없이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서현 씨가 시키는 대로 선글라스도 써보고, 옷도 입어보고, 향수도 뿌려보고 하다 보니, 어느새 내 손에는 면세점 쇼핑백이 들려있고, 내 얼굴에는 선글라스가 씌워져 있었다.
그다음에는 항공사 라운지에 왔다. 나는 공항에 라운지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는데, 비행기 탈 때까지 잠시 쉬면서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샤워도 하고 그런 공간을 라운지라고 한다더라. 아무튼, 라운지에 들러서 잠시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서현 씨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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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괌이었다. 고작 2박 3일 일정에 해외라니. 그것도 괌이라니.
서현 씨 설명으로는 그렇게 무리한 일정이 아니라고 했다.
괌에서 인천까지 비행 시간은 약 다섯 시간 정도, 인천에서 9시에 출발하면 오후 2시 정도에 괌에 도착하고, 입국 수속 밟고 뭐 한다고 해도, 오후 3시부터는 현지 일정을 시작할 수 있다.
돌아오는 날도 마찬가지다. 오후 2시 반에 괌에서 출발하면 대충 6시에 한국에 도착할 수 있고, 그러면 집에 가서 씻고 밥 먹고, 일요일 저녁에 빈둥거리며 티브이 보다가 꿀잠 자면 개운한 몸과 마음으로 월요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다. 시차도 한 시간에 불과하고 장시간 비행도 아니고. 일단 그건 오케이.
그다음에는 내 여권에 대한 설명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여권은 서현 씨가 할아버지한테 가서 직접 받아왔단다.
저번에 서현 씨가 회장님 모시고 중국 출장 다녀와서, 중국 괜찮았다고 나중에 기회 되면 같이 가자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때 내가 여권 이야기를 했었단다.
나는 솔직히 나는 기억 안 나는데 내 여권이 할아버지 집에 있다, 뭐 그런 이야기를 했었단다. 그 이야기를 서현 씨는 기억하고 있다가, 이번 여행을 몰래 꾸미면서 직접 우리 고향까지 가서 여권을 받아왔단다.
“깜짝 놀래켜 주고 싶었거든요. 만약 발급 받았어야 했다면 들킬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이에요.”
서현 씨가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로 그렇게 말한다.
원래 여권이라는 게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대리발급이 불가능하단다. 미성년자나 질병이나 장애로 인해 거동이 불편하거나, 대통령, 국무총리, 국회의장 같은 높은 분들만 여권을 대리로 발급 받을 수 있고, 우리 같은 일반인은 당사자가 직접 발급 받는 것이 원칙이란다.
즉, 이번에 여권을 신규 발급 받았다면 이번 여행의 목적지가 ‘해외’라는 건 무조건 걸릴 수밖에 없었을 텐데, 다행히도 내가 작년에 여권을 발급 받아서 몰래 일을 꾸밀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면… 우리 할아버지도 아시는 건가요?”
“네. 어르신께 말씀드렸어요.”
그렇겠지. 할아버지의 허락 없이 내 방을 압수수색 할 수는 없었을 테니.
“…뭐라고 하셨는데요?”
“잘 다녀오라고 그러셨어요. 아, 용돈도 주셨어요.”
서현 씨가 그렇게 말하며 웃는데, 나는 등골이 서늘하다.
이번 여행에 관해 할아버지가 알고 있단 말이지? 아니, 뭐 그 양반이 알려고 하면 모두 다 알겠지만, 아무튼, 할아버지가 이번 여행에 대해 알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어쩐지 두렵다. 허튼짓했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 같은 그런 공포가 척추를 스멀스멀 타고 올라온다.
아무튼, 우리 서현 씨 짓궂어. 장난꾸러기야. 깜짝 놀랐네.
그리고 세 번째 질문.
“근데 왜 괌이에요?”
내가 물었다.
나도 괌에 대해서 조금은 알고 있다. 태평양 전쟁과 관련된 책이나 다큐멘터리를 보면 괌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괌 전투도 그렇고, 괌에서 이륙한 B-29가 도쿄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렸거든.
하지만 지금 사람들에게 ‘괌 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릅니까?’라고 물어보면 ‘전략적 요충지죠.’라는 대답할까?
아니,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미국 자치령이요.’나, ‘열대 휴양지요.’ 같은 대답이 먼저 나오겠지. 워낙 신혼 여행지로 유명하기도 하고.
잠깐만. 신혼여행?
아니, 우리가 그 뭐냐. 좀 각별한 사이이기는 하지만, 아직 미래를 약속하거나 한 건 아닌데 말이죠. 아직 그 양가 어르신들 인사를 드린 것도 아니고, 아니, 서로 알고들 계시니 인사를 따로 안 드려도 괜찮으려나? 아니, 할아버지가 여권을 내주신 건 무언의 허락을 의미하는 그런 건가?
아니, 아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아무튼, 소설도 발단과 전개가 있고 나서 위기, 절정, 결말로 가는 건데 갑자기 절정으로 가버리면 좀 그렇지 않을까요?
절정이라. 단어도 뭔가 야하네.
아무튼 서현 씨는 왜 괌을 선택한 것일까?
하지만 서현 씨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그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보여주고 있다.
수상해. 분명 뭔가 또 있어. 저 장난꾸러기 서현 씨가 뭔가를 또 숨겨놓고 있어.
나는 서현 씨의 그 미소를 보면서 꾸미는 게 뭔지 모르겠지만, 마음을 단단하게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