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 : 여행 전야
***
-살아있었냐?
김창회 이 자식은 전화를 받자마자 그딴 소리부터 한다.
김창회는 평소에 별로 말이 없으니까. 가끔씩 김창회는 일반인이라고 착각하고는 하는데, 저 자식도 박승환 친구다. 일반인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거지.
“그럼 살아있지. 그거 몇 시간 연락 안 되었다고 설마 죽었다고 생각한 거냐?”
-뭐 했는데?
“잠깐 누구 좀 만난다고. 그건 그렇고, 숙소를 구할 수 있다고?”
-어. 뭐. 아마도?
“아마도는 또 뭐야. 너 임마, 중훈이처럼 괜한 기대하게 했다가 빵꾸 나면 그 원망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괜찮을 거야.
“확실하다는 말?”
-뭐.
김창회가 그렇게 말한다.
“어느 산인데?”
-나부산.
“나부산? 그건 또 어디야? 어디 있는데?”
-청도.
“청도? 중국 청도? 칭다오?”
-아니. 경북 청도.
그렇겠지. 갑자기 중국 가자는 이야기는 아니겠지?
근데 청도가 경상북도 어디지?
“청도가 어디 있지? 대구 부산 사이였던가?”
-대구 밑에.
대구 밑이라. 그러면 역시 거긴가?
“본가?”
내가 그렇게 물었다.
-본가는 아니고.
“그러면 본가 근처?”
-뭐 근처라면 근처.
김창회가 그렇게 말을 얼버무린다.
창회 할아버님이 지역에서 방귀 좀 뀌시는…. 아니, 할아버님한테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 힘 좀 쓰시는 지역 유지라고 하셨으니, 고향에 별장이나 뭐 그런 걸 가지고 계시고, 거길 숙소로 이용할 수 있다. 뭐 그런 이야기인 거 같다.
근데, 괜찮은 거야?
“너 괜찮겠냐?”
내가 물었다.
-뭐가?
“아니. 뭐, 그런 부탁을 드릴 수 있겠냐고.”
그렇잖아. 최근에 할아버지하고 화해를 했다고 해도 1년 넘게 ‘앞으로는 영원히 할아버지 안 볼 거야’ 그런 모드로 있다가 최근에야 겨우 관계가 회복됐는데, ‘친구들하고 놀러 갈까 하는데 할아버지 별장 좀 쓸게요.’ 그렇게 말하는 거 좀 그렇지 않나?
김창회가 그렇게 안면을 싹 바꾸는 녀석도 아니고, 내가 김창회라도 민망할 것 같은데?
잠시 동안 김창회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저번에 잠깐 내려갔을 때….
그렇게 말을 시작한다.
***
창회가 해준 이야기는 이렇다.
일단 창회 할아버님께서는 창회랑 관계를 회복하기 이전부터 나나 친구들에 대해 알고 계셨단다.
당연히 밀고자는 창회 여동생 지우.
창회가 지우에게 우리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면, 기억해두고 있다가 고향에 갈 때마다 ‘오빠는 잘 지내고 있어요.’라는 의미로 우리 이야기를 할아버님께 해드렸다 이거지.
그래서 할아버님께서 우리 존재에 대해서 알고 계셨는데, 마침 이번에 창회 생일파티도 그렇고, 할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우리들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셨다는 거다.
이중훈이 촬영하고 편집한 동영상도 보셨다네? 이중훈이 ‘할아버님과 창회의 관계 회복’과도 같은 순수하고 숭고한 의도로 만든 영상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물론, 창회가 어머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모르신다. 지우는 당연히 모르는 부분이고, 창회도 이야기하지 않았으니까. 아니, 애초에 이야기하고 말고 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이 아니기는 하지.
아무튼, 할아버님께서는 기특한 마음에 밥이라도 한번 먹여야 되겠다 싶으셔서 한번 데리고 오라는 말씀을 하셨다는 거다.
근데 이게 또 재미있는 것이, 할아버지께서 직접 ‘친구들 데리고 와라.’와 같은 말씀을 하신 건 아니라는 거지.
누가 창회 할아버님 아니시랄까 봐, 그런 말을 직접적으로는 절대 하시지는 않으신다는 거다.
그럼? 바로 창회의 큰고모님, 그러니까. 창회 아버님의 큰누님, 할아버님에게는 큰딸 되시는 고모님께서 에둘러 할아버님의 의중을 창회에게 전달하셨다는 거지.
‘방학인데 친구들이랑 같이 놀러 와. 맛있는 거 해줄게.’라는 제안을 하셨다는 거다.
표면적으로는 ‘고모님의 초청’이라는 형식을 띠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할아버님의 의지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다는 뭐, 그런 이야기다.
아무튼, 창회가 저번에 고향에 가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서, 저 자식 성격상 ‘네. 바로 데려올게요.’ 같은 말을 했을 리는 만무하고 그냥 묵묵히 고개만 살짝 끄덕였는데, 부산으로 가는 여행 일정이 꼬이고, 그러다 보니까 고모님 말씀이 생각이 났고, 단톡방에 올렸다는 이야기다.
“괜찮네. 그럼 구할 수 있는 그 숙소가 니네 할아버님의 별장 같은 그런 거냐?”
-별장은 아니고.
“아니면?”
-뭐. 아무튼, 방 두 개쯤은 괜찮을 거야.
창회가 그렇게 말한다.
“오케이. 일단 알겠어. 그리고 니가 말한 청도가 본가는 아니란 말이지?”
-그래.
“하지만 본가 근처이고.”
-뭐.
“그러면 내려가서 할아버님에게 인사드리고, 그다음에는 우리끼리 알아서 놀아도 되겠네.”
-인사드릴 필요는 없고….
김창회가 그렇게 말한다.
“야이. 진짜. 이 못 배워먹은 녀석아. 당연히 거기까지 내려가면 인사를 드리는 게 도리지. 거기까지 가서 인사도 안 드리고, 그냥 ‘저희끼리 알아서 놀 테니까, 어르신들은 저희에게 신경 쓰지 마세요’ 그렇게 하라고?”
김창회는 말이 없다.
저 자식,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것을 지도 알고 있다. 하지만 자기가 그런 말을 꺼내기가 쑥스러운 거지.
“애들한테는 내가 대충 이야기할게. 니네 할아버지께서 숙소를 내어주시는 거다. 그렇다고 부담 가질 것은 없고, 내려가서 할아버님에게 감사합니다. 그렇게 인사드리고, 살짝 재롱 떨고, 그다음에 우리끼리 놀면 될 것 같다고. 그럼 되는 거잖아?”
-…괜찮겠냐?
“뭐가?”
-불편하지 않겠냐. 뭐 그런 거지.
“야. 너 어디 김씨랬지?”
-…화양.
“참으로 화양 김씨의 미래가 어둡다. 후손이라는 놈이 이렇게 예의범절도 모르는 놈이라니. 에휴.”
내가 그렇게 개드립을 치자, 전화기 너머에서 작게 숨소리가 들려온다.
창회 저 자식 지금 살짝 웃었다. 안 봐도 알 수 있다.
“그렇게 하자고. 손자 친구라고 우르르 몰려가면 할아버님도 좋아하시겠지. 그건 그렇고. 진짜 본가 아니지? 가서 할아버님이랑 같이 저녁도 먹고, 좋은 말씀도 듣고, 졸면 회초리도 맞고 그래야 하는 건 아니지?”
-아니야. 그냥 인사만 드리면 될 거야.
“오케이. 그럼 진행 시켜!”
내가 ‘진행 시켜’ 전문 배우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그렇게 말했다.
***
숙소가 확정되자 나머지는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숙소 비용이 안 들어간다는 이야기에 일단 다들 찬성했고, 일정도 금요일 아침 일찍 출발해서, 일요일 오전에 서울로 돌아오는 2박 3일 일정이 확정되었다.
첫날은 일단 창회 할아버님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점심 얻어먹고, 그다음에 숙소로 이동해서 나라 잃은 백성처럼 술 퍼마시고, 다음 날은 인근 계곡 가서 몸에 물 좀 묻히고, 저녁때는 또 달리고, 그리고 일요일 오전에 할아버지께 인사드리고 서울로 복귀.
이렇게 정해졌다.
창회가 갈아입을 옷만 있으면 되고, 다른 거 특별히 준비할 건 없다고 했는데, 그렇다고 아예 준비를 안 할 수는 없으니, 장은 전날 봐두기로 했다. 유라하고 지연이, 민주하고 찬희, 승환이 이렇게 다섯 명이 전날 마트 가서 장을 보기로.
교통편은 승합차를 렌트하기로 했다.
이번 여행 멤버가 나, 창회, 승환, 찬희, 중훈, 유라, 민주, 지연 이렇게 여덟 명이니까, 왕복 고속버스 비용이나 승합차 렌트비나 큰 차이가 없기도 하고, 또 휴게소에서 여유 있게 핫바라도 먹으려면 아무래도 렌트가 편할 것 같아서 말이지.
승환이, 중훈이 그리고 내가 1종 보통 면허를 가지고 있으니 운전이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아, 그리고 차를 빌리는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우리 괴물 김창회 선생께서 보유하고 계신 면허가 2종 오토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남자는 1종 보통이 기본 패시브 아니던가? 김창회 그 자식. 생긴 건 오프로드 랠리카 몰 것처럼 생긴 놈이 2종 오토라니. 아우. 내가 다 부끄러워.
차는 승환이가 빌려오기로 했다. 아는 분 중에 렌트카 하시는 분이 있으시다나 어쩐다나? 살짝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박승환이라면 어디 가서 눈탱이 맞아오지는 않겠지.
아무튼, 그렇게 여름방학 여행 계획이 모두 확정되었다.
***
나는 눈앞에 서현 씨를 힐끗 바라보았다.
밤 10시 반. 암묵적으로 정해진 우리만의 티타임.
서현 씨와 나는 거실에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고, 나는 그 예쁜 입술로 캐모마일 차가 담긴 컵을 가져가는 서현 씨를 힐끗 바라보고 있다.
친구들과 가는 다음 주 여행은 대충 확정이 되었는데, 정작 이번 주 금요일, 그러니까 내일모레 서현 씨와 가는 여행에 대해서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가는지, 가서 뭐 할 건지, 그런 거 말이지.
당장 내일모레인데, 나도 뭐 준비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도울 게 있으면 돕고 말이지.
서현 씨가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 아니, 이야기는커녕, 작은 힌트도 주지 않는다.
아까 저녁 먹기 전에 은근슬쩍 물어보기는 했다. 어디로 가는지 알아야 나도 준비를 하지, 뭐 그런 이야기. 그런데 서현 씨는 그냥 갈아입을 옷만 준비하면 된다고, 자기가 알아서 준비하겠다고, 그렇게만 말해주고 미소만 짓는다.
근데 그 미소가 평상시 서현 씨의 미소와는 어딘가 다르다.
뭔가 사람을 안심시키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서현 씨의 미소가 아니라, 무언가 큰 꿍꿍이가 있는 듯한 장난꾸러기의 웃음처럼 보였다.
물론 서현 씨가 날 곤란하게 만들, 이상한 장난을 하지는 않을 테니, 일단은 알겠다고 하고 넘어가기는 했는데, 그래도 궁금한 것은 사실이다.
아니 궁금한 것도 궁금한 거고, 걱정이 된달까?
봐봐. 여행 이틀 전인 오늘 하루 다 지나갔지? 내일은? 알바 가는 날이잖아. 밤늦게 끝난단 말이지.
그리고 다음 날 출발인데, 어디로 가는지는 일단 미뤄두고서라도 몇 시에 출발하는지는 알아야 마음의 준비를 하지.
“왜 그러세요?”
내가 그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힐끗힐끗 보는 걸 눈치챘는지, 서현 씨가 물어본다.
“…진짜 이야기 안 해주실 거예요?”
내가 서현 씨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서현 씨는 또 미소 짓는다. 아까 보여줬던 그 장난꾸러기 미소다.
“궁금하세요?”
“아니, 궁금하다기보다는… 네. 사실 궁금해요. 궁금하죠. 어디로 갈지 뭐, 그런 건 둘째 치고, 출발 시간도 모르고 이렇게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내 말에 서현 씨는 다시 빙그레 웃고는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내 쪽으로 반 뼘 정도 몸을 기울이고는.
“힌트 드릴까요?”
그런다.
“네.”
“저번에 했던 약속.”
서현 씨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찻잔을 들어 올려 입으로 가져간다.
약속? 무슨 약속?
우리가 미래에 대해서 어떤 약속을 했었나? 그랬었나?
미래의 중앙그룹 사위니, 뭐 그런 헛소리는 다 내 마음속으로만 했는데?
나는 한참 동안 더 옛 기억들을 뒤집다 결국 어떤 단서를 찾아내지 못한 채, 간절한 눈빛으로 서연 씨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서현 씨는 여전히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만 지은 채로 더 이상 어떠한 힌트도 제공해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