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198화 (198/271)

198 : 바보는 방황하고, 현명한 사람은 여행한다. (2)

***

화요일 오후 1시 반.

강남역 인근, 정확히 말하면 서초동 중앙그룹 글로벌센터. 일명 JAGC 근처의 한 해산물 전문점에서 서현 씨하고 늦은 점심을 먹고 있다.

평소 같았으면 서현 씨는 회사에 있어야 하는 시간이지만, 서현 씨의 직속 상사인 회장님께서 조금 전 중앙그룹 전용기를 타고 해외 출장을 가셨단 말이지.

사실 서현 씨도 따라가네 마네,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데, 서현 씨 대신 서현 씨 오라버니 강우현 팀장님께서 끌려가시고, 서현 씨는 김포공항에서 배웅하는 것으로 며칠간의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덕분에 나와 서현 씨는 여유 있게 평일 데이트…가 아니라 점심을 같이 먹고 있는 것이고.

나는 거짓말 조금 보태면 손가락 세 개 굵기의 킹크랩 다리에서 살을 발라내면서 서현 씨에게 친구들과 여행을 가게 되었다고 보고했다.

“다음 주 금요일이요?”

“네. 저도 그렇고 알바하는 사람들 때문에 시간을 맞추다 보니, 금요일이 가장 무난해서요.”

“그렇군요. 알겠어요. 일단 기억해둘게요. 여행 준비하는데 제가 뭐 도와드릴 일은 없을까요?”

“아니요. 기껏해야 이틀, 길어도 2박 3일인데요. 그냥 가방만 딸랑 메고 갈 거예요.”

“네. 알겠어요. 그런데 여행은 어디로 가시기로 하신 거예요?”

“부산이요. 하지만 아직 확실한 건 아니에요. 숙소가 정해진 것도 아니고.”

숙소가 정해져야 여행도 확정이지. 설마, 숙소도 해결 안 됐는데, 무작정 에라 모르겠다 하고 가지는 않을 거다.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고 여자애들도 있는데.

“숙소는 어떻게 하시기로 하셨는데요?”

“중훈이가 콘도 예약 가능한지 한번 알아본다고 했는데…. 될까 모르겠어요. 아무리 극성수기 끝났다고 해도. 8월에, 금요일인데.”

“제가 도와드릴까요?”

서현 씨가 말한다.

“네?”

“몇 명이시죠?”

“아홉인가? 잠시만요. 여덟 명이요.”

“여자분도 계시는 거죠?”

“네. 유라하고 후배 두 명.”

“지연이라는 그 후배도?”

서현 씨가 그렇게 물어본다.

“…네. 뭐 일단. 지연이도.”

내가 뭐 잘못한 것도 아닌데, 말을 좀 조심하게 된다.

서현 씨는 그런 날 보고 작게 웃고는.

“그러면 숙소 두 개 필요하겠네요.”

“네. 중훈이도 콘도 예약할 때, 객실 두 개 알아본다고 했어요.”

“중훈 씨가 안 되면 제가 구해드릴까요?”

‘한번 알아볼까요?’도 ‘구해볼까요?’도 아닌 ‘구해드릴까요?’라니.

역시 중앙그룹. 역시 재벌 3세.

하지만 거절이다.

“아니요. 괜찮아요.”

서현 씨는 ‘왜요?’라는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마음은 고마운데, 그… 애들에게 설명하기 좀 그렇지 않을까요?”

“설명이요?”

“중훈이야 뭐, 원래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거 다들 알고 있으니까, 콘도 예약 알아본다고 해도 다들 그러려니 할 텐데, 표면적으로 친척 어르신 집에 더부살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제가 숙소를 잡아버리면 친구들이 어떻게 했는지 궁금해 할 것 같아요. 뭐, 승환이야 나에 대해서 알고 있으니까 그렇다고 쳐도, 다른 친구들에게는 설명하기가 좀 그럴 것 같아요.”

내 말에 서현 씨가 작게 웃는다.

“설명하시기 귀찮으시면 그냥 아는 사람이 구해줬어, 하시면 되는데.”

“귀찮다기보다는… 뭐랄까요? 일단 아는 사람이 구해줬어, 그렇게 말한다고 믿을 놈들도 아니고 설사 믿는다고 해도….”

“해도?”

“그냥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솔직한 마음이다. 우리 서현 씨를 그냥 ‘아는 사람’으로 치부하고 싶지도 않고, 서현 씨의 배려와 노력 또한 그냥 ‘구해줬다’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지도 않다.

“그리고, 친구들이랑 놀러 가는 건데, 괜히 서현 씨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안 귀찮아요.”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하지만 제가 싫어요. 괜히 서현 씨에게 일 생기는 거. 우리끼리 가는 거라면 몰라도….”

내 말에 서현 씨가 작게 웃고는.

“그럼 우리도 여행 갈까요?”

그렇게 말한다.

***

-예약 실패!

단톡방에 이중훈의 메시지가 올라왔다.

그럴 것 같더라.

7월 말, 8월 초의 극성수기는 지났다고 해도, 8월은 성수기다. 더군다나 금요일, 거기에다 해운대 바로 앞 콘도를 일주일 전에 예약하는 게 쉽게 말이 안 되기는 하지.

콘도 예약이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단톡방에 올라오자마자 메시지가 막 올라오기 시작한다.

어떻게 하냐? 그냥 텐트 치자. 여자애들도 있는데 어떻게 텐트를 치냐. 저희들은 괜찮아요.

그런 메시지가 막 올라오는데, 나는 휴대폰 전체 무음 모드로 바꾸고 화면을 꺼버렸다.

지금 친구들하고 가는 부산 여행이 중요한 게 아니지.

“괜찮아요? 중요한 이야기인 것 같은데.”

배려심 많은 서현 씨가 그렇게 물어본다.

“괜찮아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서현 씨를 바라보았다.

지금 우리는 석촌호수 근처, 시원한 통창 너머로 석촌호수와 대한민국 최고 높이의 빌딩이 보이는 카페에 앉아있다.

밥을 먹었으니 차를 마시자는 명분이었지만, 사실 단순히 차 마시는 시간이 아니다.

서현 씨의 ‘그럼 우리도 여행 갈까요?’라는 한 마디에서 촉발된 의제를 논의하기 위한 아주아주아주 중요한 시간이라 이거지.

“그러면은, 서현 씨는 휴가를 쓰실 수는 있는 거예요?”

내가 서현 씨에게 물었다.

“네. 저는 언제든 가능해요.”

“회장님이 언제 귀국하시는데요?”

“할아버지하고는 상관없어요.”

서현 씨는 그렇게 말하고는 작게 미소 짓는다.

“작은 어르신을 모시고 가는 여행인데, 할아버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겠어요?”

무슨 말씀을 하시겠냐고?

‘감히 사랑하는 내 손녀랑 여행을 가겠다고? 그것도 단! 둘이서? 당장 그놈을 잡아다가 가랑이를 쭉 잡아….’

나라면 그렇게 말할 텐데.

“한수 씨는 지금 월요일과 목요일에 알바하시는 거죠? 그날만 아니면 괜찮은 거죠?”

“목요일은 바꿀 수 있어요. 월요일도 뭐, 바꾸려고 하면.”

“안 돼요. 같이 일하시는 분에게 지금 중요한 시기잖아요.”

서현 씨가 그렇게 말한다.

병진이 형 이야기다.

내가 그 형 정직원 되는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해 줬는데, 그때 서현 씨는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했었더랬지.

우리 마음씨 깊은 서현 씨는 그것까지 기억하고 배려를 하시는 거다.

“그러면 화요일 아니면 금요일이 되겠네요. 화요일 출발이냐 아니면 금요일 출발이냐. 둘 중의 하나로 결정하면 되겠네요. 한수 씨는 언제가 편하세요?”

“저는 상관없어요. 서현 씨 시간 되시면 언제든.”

“그럼 금요일로 해요. 주말 껴서.”

서현 씨가 그렇게 말한다.

잠깐만… 주말을 낀다고?

그, 그, 그러면 당, 당, 당일치기가 아니라….

“한수 씨 개강이 9월 맞죠?”

“네? 네. 9월 1일.”

“다음 주는 한수 씨가 친구들하고 여행을 가시니까 안 되겠고, 그럼 이번 주 아니면 다다음 주밖에 없겠네요.”

그렇지. 이번 주 아니면 다다음 주.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주말을 낀다고요?

“한수 씨는 언제가 좋으세요?”

“저는 다 좋아요.”

“그럼 이번 주에 갈까요?”

“네?”

“이번 주에 일정 있으세요?”

“아니요, 없어요.”

없지. 있어도 없다. 근데, 진짜로 없기는 하다.

“어디 딱히 가시고 싶은 곳은?”

“…없어요.”

“제가 정해도 될까요?”

“네? 네.”

“알겠어요. 그럼 제가 계획 한번 짜볼게요. 이번 주 금요일. 절대 까먹지 마세요.”

나는 무의식적으로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

이번 주 금요일에 출발. 장소와 일정은 서현 씨가 정한다.

그렇게 결정되고 나서 서현 씨는 더 이상 여행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저 평소에 카페에서 차를 마실 때처럼 일상적인 이야기들. 서현 씨 할아버님, 그러니까 강 회장님이 최근에 조금 바빠지셨고, 덩달아 서현 씨도 일이 좀 늘었다든가, 서현 씨 오빠, 그러니까 강우현 팀장님은 서현 씨보다 일을 훨씬 더 많이 하는데, 그 와중에도 운동을 빼먹지 않는다고, 자기 오빠지만 진짜 독하다는 등의 소소한 주변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도 서현 씨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주거나, 최근 친구들 동향에 대해 이야기 해주고 하면서 평상시처럼 대화를 하고 있었지만, 사실 마음이 조금은 들떠있는 상태였다.

그럴 수밖에 없지. 당장 사흘 후에 여행을 간다고, 그것도 서현 씨와 단둘이서. 갑자기 결정되었는데, 그렇구나. 가는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지.

마음이 들떠있다고 해서 소풍 전날 어린아이처럼 막 설레서 잠 못 자고 그런 느낌은 아니고, 뭐랄까, 뭔가 아주아주 중요한 이벤트가 있을 것 같다는 그런…. 크흠.

아무튼, 평상시 같은 티타임의 탈을 쓰고 있었지만, 뭔가 좀 평소와는 다른 느낌의 오후였다.

그런 오후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시간은 7시가 조금 지나서.

밖에서 저녁까지 먹고 들어오는 게 편한데, 서현 씨가 오랜만에 맛있는 걸 만들어 주겠다고 해서 집 근처 마트에서 저녁거리를 사 들고 들어온 시간이 그즈음이었다.

그리고 무음으로 바꿔놨던 휴대폰을 확인한 시간도 그즈음이었고.

***

“뭐야 이게.”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온다.

깨톡방이 난리가 났다. 단톡방에만 수백 개의 깨톡이 있었고, 이놈 저놈 할 것 없이 전부 다 나에게 개인톡으로 말을 걸었다.

단지 깨톡만도 아니었다. 친구 놈들에게서 부재중 통화도 엄청 들어와 있었다. 물론 지연이에게서도.

뭐지? 무슨 일 있었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일단 지연이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오빠! 괜찮아요?

통화 연결음이 들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은 지연이가 그렇게 말한다.

“어? 어.”

-지금 어디예요?

“집인데?”

-휴우. 걱정했어요. 갑자기 연락도 안 되고, 전화해도 받지도 않고 그래서.

지연이가 그렇게 말한다.

“아. 미안. 무음으로 해놓고, 까먹고 있었어.”

-진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어. 오후에 잠깐 누구 좀 만난다고. 근데 무슨 일 있어?”

-단톡방 안 보셨어요?

“아직 안 봤는데? 부재중 들어온 거 보고 일단 전화부터 했어.”

-그렇군요. 오빠 혹시 기분 상하고 그런 건 아니죠?

“아니. 그런 건 없는데?”

-진짜요?

지연이가 이렇게까지 반복해서 물어보는 걸 보니 단톡방에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나 보다.

“응. 난 진짜 아무 일 없어. 일단 내가 단톡방부터 확인하고 다시 전화해줄게. 그래도 괜찮지?”

-네. 알겠어요.

나는 일단 그렇게 통화를 끝내고 단톡방부터 확인해보았다.

일단 중훈이가 콘도 예약에 실패했다고 올린 것까지는 봤고, 내가 서현 씨랑 있는 동안 이 녀석들 장난 아니게 떠들어댔네.

그중에 80% 아니 90%는 쓸데없는 내용들이다. 개드립 같은 거.

그런 개드립 다 쳐내고 내용을 요약해보면, 게스트하우스를 알아보자느니, 그냥 막무가내로 가보자느니, 노숙하면 된다느니 그런 이야기가 나오다가 창회가 의견을 제시하면서 분위기가 바뀐다.

-꼭 바다에 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산은 어떠냐? 숙소를 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말이지.

물론 친구 놈들은 ‘여름휴가는 바다라고 성경에도 쓰여 있다’라느니, ‘니가 말한 숙소가 무슨 동굴 같은 걸 의미하는 단어는 아니겠지?’라든가, ‘무슨 수련회 같은 걸 생각하고 있는 거 아냐?’ 같은 개드립이 나오기는 했지만, 평소에 별로 말이 없는 김창회의 의견에 다들 ‘뭐 산도 나쁘지 않지, 숙소만 해결되면.’ 그런 분위기로 흘러갔다.

여기서 일이 발생한 거다.

다들 한 마디씩 떠들고 있는데, 나만 조용히 있으니까 우리 마음씨 깊은 지연이가 ‘한수 오빠는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어봤는데, 내가 대답이 없었던 거지.

그러니까 친구 놈들이 이때다 싶어서, ‘한수 저 자식 삐졌어. 삐져서 말 안 하는 거야.’ 이런 식으로 도발을 했는데도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까, 그때서야 나에게 개인톡을 보내거나, 전화를 하거나 그런 식으로 연락을 해보기 시작한 거다.

하지만 무음이었던 나는 당연히 깨톡이 오는지 전화가 오는지 전혀 몰랐고, 우리 착한 지연이는 혹시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한 거고.

흠. 다른 놈들은 그렇다고 쳐도 지연이에게는 좀 미안하네.

일단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전부 다 파악했다.

나는 단톡방에 ‘미안. 오늘 누구 좀 만난다고 무음으로 해놓고 까먹고 있었음.’ 그렇게 대충 해명을 하고, 일단 창회에게 전화를 걸었다.

딱 느낌이 오는 게 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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