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 바보는 방황하고, 현명한 사람은 여행한다. (1)
중고등학생 때도 그랬지만, 방학 중에는 시간은 왜 이리도 빨리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수강신청 기간이니까 까먹지 말고 수강신청 꼭 하라는 학교의 안내 문자를 받고 나니, 방학이라는 게 이토록 짧고 덧없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콜드브루에 에스프레소 샷과 연유를 들이부은 붕붕드링크를 마셔가며 도서관에서 날밤을 깐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8월 중순이다.
진짜 이번 방학에는 특별히 한 거 하나도 없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월요일, 목요일에 알바 나가고, 가끔 도서관 가서 공부하는 척하다가 결국 핸드폰 가지고 놀든가, 아니면 소설책이나 뒤적이다 시간 다 보내거나, 친구들, 후배들 만나서 쓸데없는 이야기 하면서 술 마시거나, 주말에는 서현 씨랑 놀고, 그러면서 특별한 일 없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나에게는 특별한 이벤트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내 주변에 아주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단 다들 민주랑 상당히 가까워졌다. 우리 멤버라기보다는 아직 객원 보컬 같은? 그런 느낌이기는 하지만, 어찌 되었든 최근에는 술자리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민주도 불렀어?’ 소리가 나온다.
뭐, 사실 남자애들이야 이쁜 후배가 같이 놀고 싶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고, 유라나 지연이도 딱히 별 이야기가 없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녀석도 우리랑 어울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 민주와 이중훈 사이는 딱히 변화가 없다.
일단 민주가 지연이에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 것치고는 아직 특별한 액션이 없다. 뭐 여자애가 먼저 고백하기에는 좀 그렇기는 하겠지.
그리고 이중훈은 민주가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걸 눈치채지 못했는지 그저 찬희, 승환이와 같이 개드립 치는 데 여념이 없다. 으이구, 멍청한 놈.
아, 박찬희 그 자식은 작년의 나처럼 방학 기간 내내 유라랑 붙어 다니는 것 같았다.
눈치로 보아서는 우리 몰래 둘이서만 어디 여행도 다녀온 것 같았는데, 특별히 아는 척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뭐, 눈치 없이 그런 걸 물어볼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니까.
창회는 방학 기간 동안 고향에 며칠 다녀온 것 같았다. 창회 여동생 지우가 깨톡으로 해준 이야기로는 그 할아버지의 그 손자 아니랄까 봐, 특별히 살가운 대화를 주고받는다거나 그러지는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뭐, 지금 이 정도 상황만 해도 자기는 좋다고.
우리 말썽꾸러기 제이슨의 형사재판도 끝이 났다.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기대보다 못한 형량이 좀 아쉽기는 하지만, 일단 어느 정도 마음고생도 시켰고, 앞으로 해야 할 마음고생도 남아 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기로 했다.
그리고 사실 아직 다 끝난 것도 아니다. 일단 나중으로 미뤄 두기는 했지만, 민사소송도 남아있고 또 마약 건도 있고 말이지.
그래도 눈치는 있는지, 제이슨은 마약 판매상과의 연락을 전부 다 끊고 집에서 칩거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끊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게 문제지. 마약사범 재범률이 30%를 넘어가는 것이 다 이유가 있다고.
아! 그리고 유죄판결을 받은 것과 동시에 학교에서 학사 제명당했다.
우리 쪽 힘이 작용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학생의 본분에 어긋난 행위를 하였을 때에는 징계할 수 있다.’라는 학칙에 따라 퇴학당해 버렸다. 다음 학기부터는 학교에서 검은 머리 외국인들 몰려다니던 꼴 좀 덜 보겠네.
그러고 보니 김민우 그 자식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네? 발기부전 치료 잘 받고 있으려나? 치료 받는다고 고쳐지는 게 아니겠지만.
지연이는 이제 어엿하게 한 사람 몫을 해내는 카페 알바가 되었다. 원래 똘똘한 녀석이니까, 음료 레시피나 가게 돌아가는 시스템 같은 것쯤이야 금방 익혀버렸다.
지연이는 카페 일이 재미있다고 했다.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도 즐겁지만, 무엇보다 자기 손으로 이런저런 음료를 만드는 것이 재미있다고. 금상첨화로 손재주까지 가지고 있는지, 아이스 카푸치노 같은 어려운 커피도 가르쳐주니까 금방 그럴싸하게 만들어 내고는 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지연이가 알바를 하면서부터 월요일 손님이 엄청 늘었다. 특히 퇴근 시간이 되면 근처 남자 직장인들이 ‘퇴근하면서 커피 한 잔씩 사 들고 갈 것’이라는 지령이라도 받았는지 엄청나게 찾아온다. 점장 누나 이야기로는 월요일 매출이 2배 가까이 늘었다고.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래도 손님들이 상식선에서 행동한다는 거다. 대부분 커피 주문하면서 한두 마디를 주고받는 것으로 행복해할 뿐, 전화번호를 물어보거나 치근덕거리는 등 필요 이상의 액션을 취하는 멍청이들은 아직까지는 없었다.
그리고 기획사 관계자도 몇 명 찾아왔었다.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이름만 들어도 ‘아! 거기!’ 할 것 같은 대형 기획사는 물론, 얼굴에서부터 ‘저 사기꾼인데요.’라는 이미지가 풀풀 풍기는 듣보잡 기획사 관계자도 몇 명 찾아와 지연이에게 명함을 날리고 갔다.
하지만 우리 지연이는 ‘이미 계약이 되어있다.’는 답변으로 그들을 돌려보내는 모습을 소속사 대표인 나는 옆에서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고.
병진이 형은 정식으로 정직원 계약을 맺었다. 점장 누나와 내가 선물한 실크 넥타이를 매고 본사에 가서 계약서를 썼다. 그날 저녁 지연이까지 우리 네 사람은 그 치킨집에서 축배를 들었다.
아무튼, 그렇게 방학이 지나가고 있었다.
***
폐점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았을 때, 가게 문이 열리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습을 보인다.
그렇게 들어오는 사람들을 본 나는 ‘환영합니다.’ 하는 인사 대신 가볍게 한숨을 쉰다.
김창회, 박승환, 박찬희, 최유라, 이중훈 그리고 박민주.
“환영합니다. 어서 오세요.”
하지만 우리 착한 지연이는 저런 것들도 손님이라고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안녕? 역시 우리 지연이는 참 착해. 하지만 한수 저 녀석은 손님이 왔는데도 인사할 줄도 모르지. 본사에다가 클레임 넣어야겠어. 당장 짤라버리라고. 뭐 하냐? 얼른 시원한 커피 내오지 못할까?”
박찬희가 그렇게 보자마자 시비를 건다.
가만있자. 독이 어디 있더라? 기다려라. 시원한 아이스 포이즌 라떼 내어 드릴 테니까. 거품을 아주아주 실키(silky)하게 해서.
저 자식들, 나 혼자 알바할 때는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지연이가 알바 시작하니까 월요일마다 출근 도장을 찍고 있네.
뭐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내가 지연이를 괴롭히는지 아닌지 감시하겠다는 핑계인데, 그냥 술 먹자는 거지.
폐점 시간 맞춰서 찾아와 마감 도와주고, 술 마시러 가는 게 요즘 월요일 밤 정해진 일정처럼 되어버렸다.
뭐 솔직히 나도 싫지는 않다. 마감도 빨리 끝나고, 다들 모여서 놀면 재미있기도 하고.
***
“자. 이거는 우리 아가씨들에게만 주는 서비스.”
치킨집 사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며 앙버터 치즈볼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신다.
카페 근처 치킨집. 지연이가 알바를 시작한 첫날부터 한 주도 빼먹지 않고 여길 왔으니, 사장님도 이제 우리 얼굴을 알아보신다. 야외 테이블에 우리 자리도 미리 만들어놓으시고, 이렇게 서비스도 팍팍 주시고.
근데 왜 아가씨들만 치즈볼 주시는 건데요? 남자도 치즈볼 먹을 줄 아는데요?
“다들 수강신청 했냐?”
박승환이 치즈볼에 포크를 가져가며 그렇게 묻는다.
“어. 나는 다 했음. 완벽하지.”
“나는 지금 전공 하나 빵꾸 나서, 정원 외 기다리고 있어. 이번 학기도 난리네.”
“유 선생님 수업은?”
“난 이번 학기는 패스. 엄청 빡세다고 그러던데?”
“그거 안 들으면 졸업 못 한다.”
“졸업 전에만 들으면 되는 거 아냐?”
그런 식으로 수강신청 이야기가 한참이다.
“한수는? 다 정했어?”
유라가 나에게 그렇게 물어본다.
“아니, 아직. 이번에는 좀 신중하게 짜려고.”
“그래. 한수 저 멍청이, 1학기 때, 지수에게 차였다고 ‘에라 모르겠다’ 수강신청 해서 지옥의 목요일 보냈잖아. 주 5일 다 오고.”
찬희 짜식이 그렇게 생각 없이 말을 함부로 한다.
“찬희야, 이거 보이냐?”
내가 그렇게 말하며 포크를 들어 보였다.
“나도 있거든?”
박찬희도 그렇게 말하며 포크를 든다.
가소롭구나. 여기서 시간 한번 멈춰볼까? 시간 멈추고 아주 푹푹 소리가 나도록 찔러줄까? 배에서 핏줄기가 분수를 이뤄야 까불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겠지?
“근데 말야. 수강신청은 수강신청이고, 올해 여름방학 이렇게 보낼 수는 없는 거 아냐?”
이중훈이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꺼낸다.
“이렇게 안 보내면?”
“놀러 가야지. 짧게라도 가자.”
이중훈이 우리를 둘러보며 말한다.
작년에는 방학 시작하기도 전부터 맨날 모여서 어디로 놀러 갈까 맨날 그런 이야기 하고, 방학 되자마자 거의 바로 동해 바다로 놀러 갔었는데, 올해는 방학 시작하고 그런 이야기가 살짝 나왔지만, 누구 하나 나서는 사람 없으니 그저 어영부영하다가 8월 중순이 되어버렸다.
“어디로?”
찬희가 그렇게 묻자.
“아니야. 장소는 중요한 게 아니지.”
승환이가 대신 대답한다.
“아니면?”
“의향, 그리고 시간.”
승환이는 그렇게 말하며 좌중을 돌아본다.
“일단 갈 생각이 있느냐? 그리고 시간을 맞출 수 있느냐? 먼저 그 부분에 이야기가 끝나야, 그 사람 다음에 어디로 갈지를 정할 수 있는 거지.”
박승환이 그렇게 말하며 닭다리를 집어 든다.
저 자식. 뭔가 그럴싸한 이야기로 사람의 정신을 쏙 빼놓고 닭다리를 차지했다 이거지? 아니, 애초에 닭다리를 노리고 저런 이야기를 한 것일지도.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다. 일단 갈 수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하지.
“난 월요일, 목요일 안 되는 거 알지?”
내가 먼저 말했다.
“저도 월요일은 좀….”
지연이가 말한다. 월요일은 우리 두 사람이 알바하는 날.
“민주는?”
중훈이가 민주에게 물어본다.
“…저도 같이 가도 되나요?”
민주가 그렇게 물어본다.
“왜? 우리랑 같이 가기 싫어?”
“아니요. 가고 싶어요. 전 언제든 상관없어요.”
그렇게 말한다.
뭐. 민주를 반대할 이유가 없지. 아니, 오히려 지연이를 위해서라면 민주가 가는 게 좋지. 같은 여자고, 동기고.
“유라는?”
“난 월요일, 금요일 과외. 근데 미리 말하면 바꿀 수 있어.”
최유라가 그렇게 말한다.
“난 다 상관없음.”
“나도.”
이중훈과 김창회가 그렇게 말하자 박승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러면 일단 월요일은 안 되는 거고, 목요일, 금요일 안 되는데, 한수는 목요일 알바 바꿀 수 있나?”
“바꾸려면 바꿀 수는 있는데… 좀 그렇긴 하다.”
“그럼 유라는? 금요일 과외.”
“바꿀 수 있어.”
“그러면 금, 토, 일이 좋겠네. 1박으로 가든가 아니면 아예 2박 3일로 가든가.”
승환이가 그렇게 말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한 사람만 빼고.
“나는?”
박찬희가 그렇게 물어본다.
“응?”
“왜 내 일정은 안 물어보는데?”
“물어봤잖아.”
“언제?”
“유라가 월, 금 과외인데, 금요일 바꿀 수 있다 그랬잖아.”
“…나는 뭐 유라 부록이야?”
찬희가 그렇게 말한다.
“어머, 싫어?”
최유라가 그렇게 묻자.
“아니. 안 싫어.”
찬희가 바로 그렇게 말한다.
“오케이. 최유라가 되면 너도 되는 거지. 너에게 선택권 따위는 없다. 그러니 그냥 입 다물어주시고. 이제 일정 정하자. 일단 이번 주, 다음 주, 다다음 주. 개강까지 이렇게 3주밖에 안 남았다. 1학년은 수강신청 다 했어?”
“네. 저는 다 했어요.”
“저도요.”
“그러면 뭐, 괜찮겠네. 금요일 괜찮지?”
“네.”
“네.”
유라와 민주가 그렇게 말한다.
“그럼 다음 주로 할까? 이번 주는 너무 급하지?”
“뭐 상관없음.”
“근데 어디로 갈 건데요?”
지연이가 묻는다.
“이번에는 방 잡아. 텐트 싫어.”
내가 그렇게 말했지만,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지.
“내가 콘도 예약해 볼까?”
중훈이가 그렇게 말한다. 역시 부잣집 도련님.
“콘도 좋지. 근데 어디 콘도?”
“뭐 부산도 있고, 속초도 있고. 단양도 있고.”
“부산 좋은데?”
“부산 좋다. 맛있는 것도 많고. 근데 부산 어디?”
“해운대 근처.”
“해운대라. 예약이 가능할까? 여름휴가 시즌인데?”
“극성수기는 지났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일단 아빠한테 물어볼게. 두 개 잡으면 되겠지? 큰 거 하나, 작은 거 하나.”
“되면 좋겠다. 콘도면 밥도 해먹을 수 있잖아. 부산이니까 맛있는 것도 많겠지? 지연이랑 민주는? 부산 괜찮아?”
“넵. 부산 좋아요.”
“저도요. 돼지국밥하고 밀면 먹어 보고 싶어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큽니다. 그렇다면 일단 부산 확정. 다음 주 금요일. 해운대!”
박찬희가 그렇게 선언한다.
“아니, 근데 일단 숙소 예약이 가능한지부터 알아봐야 하는 거 아닐까?”
내가 그렇게 물었다.
“안 되면 텐트 치고.”
“아! 텐트 싫다고!”
“한수는 안 간대. 자, 또 텐트 싫은 분?”
“저는 좋아요!”
민주가 그렇게 말하자.
“저도요!”
지연이까지 그렇게 말한다.
“오케이. 진행시켜!”
승환이의 선언과 함께 그렇게 다음 주 여행이 갑작스럽게 확정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