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 Professional Intern (2)
***
병진이 형은 말이 없다.
그저 놀란 눈으로 누나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다.
나 같아도 그랬을 거다. 갑자기 그런 이야기 들으면 놀란 것도 놀란 거지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을 거다.
점장 누나가 병진이 형에게 해준 말을 간단히 요약하면, 조만간 본사에서 인턴을 뽑을 계획이고, 누나가 병진이 형을 추천했다는 이야기였다.
흔히 인턴이라고 뽑아서 아무것도 안 가르쳐주고 잡일이나 시키다가 토사구팽, 아니 그냥 ‘구팽’ 해버리는 한국의 몇몇 나쁜 기업들과는 달리, 외국계 프랜차이즈인 우리 카페 한국 지사는 진짜 정규직 전환형 인턴, 회사 용어로 ‘프로페셔널 인턴(Professional Intern)’을 뽑는다.
그렇게 뽑는 인턴 인원 중 일부를 파트타임 근무자에게 할당하는데, 여기는 지원을 받는 방식이 아니다. 관리자가 추천하면 그 대상을 심사하고, 심사에서 통과하면 인턴 제안, 우리 표현대로 하면 ‘정직원 제안’을 받게 되는 방식이다.
저번에 누나가 병진이 형에게 정직원 제안을 하겠다고 이야기했었는데, 그게 바로 이 절차를 의미했던 거다. 파트타임에서 인턴, 인턴에서 정직원 전환.
“나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이 들거든. 인턴이 되면 정말 큰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 정직원은 확정이니까. 그리고 정직원이 되면 또 여러 가지 기회도 많고.”
외국계 기업은 그런 전설 같은 사례가 종종 있다. 콜센터 전화상담 직원에서 한국 지사장까지 승진한 국제특송업체 대표라든가, 마트에 물건 진열하던 사람이 글로벌 유통기업의 상무에 오른다든가. 그런 이야기들이 아주 없지는 않다.
우리 카페 프랜차이즈 한국 지사장님도 파트타임 출신이시기도 하고.
아무, 점장 누나가 그렇게 설명해 주는데도 병진이 형은 아무런 말이 없다. 그저 누나를 바라만 보고 있다.
“그런데 말이죠, 그… 인턴으로 뽑히는 건 거의 확정이 된 거라고 봐도 되는 건가요?”
병진이 형을 대신해 내가 물어보았다.
“응. 오늘 HRM 담당자한테서 병진이 근무기록 정리해서 보내달라는 요청 받았거든. 그래서 그거 보내줬어.”
“그게 어떤 의미인데요?”
모두를 대신해 내가 물었다.
“HRM은 Human resources management의 약자라는 건 알지? 채용, 승진, 해고, 인사명령, 조직 관리 그런 거 하는 파트거든. 심사가 끝나는 시점에서 병진이 근무기록을 달라고 했으면 목적은 하나밖에 없어.”
“…직원인사 파일 만들려고요?”
“빙고!”
누나가 손가락 총 모양을 만들면서 그렇게 말한다.
“인사 파일 만든다고 근무기록 달라고 한 거야. 그 정도면 거의 확정이라고 봐야지. 혹시 최근에 무슨 범죄 저지른 거 있니? 재판 받아야 하는 정도로?”
누나의 농담에 병진이 형이 진지하게 고개를 젓는다.
누나는 그런 병진이 형을 보고 작게 웃고는 계속 말을 잇는다.
“아마 다다음 주 정도면 정식으로 공고가 나올 거야. 그때까지 경찰서만 안 가면 큰 문제는 없을 거야. 아니, 없어.”
누나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진짜 거의 확정인가 보다.
“아. 물론 당사자의 생각이 가장 중요하지. 어떻게? 생각이 있어?”
“네?”
“특별히 ‘나는 무조건 이걸 할 거야!’ 그런 생각이 없으면, 우리 회사 괜찮아. 외국계라서 학력에 따른 승진 차별도 없고, 정직원 되면 혜택도 많고. 그리고 요즘도 영어는 계속하고 있지?”
“…네.”
뭐야? 병진이 형 영어 공부하고 있었어?
이 음흉한 인간. 맨날 막 생각 없이 사는 것처럼 그러더니 뒤에서 저렇게 열심히 살고 있었다니.
“급한 거 아니면, 대학은 좀 미뤄도 될 것 같아. 정직원 되면 여러 가지 혜택도 많으니까. 맞다. 학비도 지원되고. 그리고 H.O에 갈 수도 있으니까, 그때 그쪽에서 학교를 다닐 수도 있고.”
점장 누나가 말한다.
“H.O가 뭐예요?”
지연이가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물어본다.
“헤드 오피스(Head Office). 미국 본사.”
지연이의 눈이 똥그래진다.
뭐, 놀랄 이야기이긴 하다. 고졸 출신을 정직원으로 뽑는 것도 놀라운데, 그렇게 뽑은 직원에게 본사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동등하게 제공한다?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기는 하지.
“우리 병진이 형, 영어 공부 열심히 해야 되겠는데?”
“어머. 회화는 병진이가 한수보다 더 잘할걸?”
점장 누나가 말한다.
“그래요?”
“응. 2년 넘게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학원 다니고, 전화 영어도 하고, 언어교환 모임에도 나가고 그랬으니까. 저번에 외국인 손님 대하는 거 보니까 떨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잘하더라고.”
“아니, 그건 뭐 어려운 대화 아니었으니까요….”
병진이 형이 쑥스러운 듯 웃으며 그렇게 말한다.
와. 진짜. 병진이 형 이 인간 힘숨찐이었네. 아니, 형이 찐따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아, 몰라. 아무튼.
“이것도 아직 확정은 아닌데, 내가 본사 들어가면 본사에서 다음 점장이 올 거야. 그때 병진이도 본사 들어가서 교육받고,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날 거야. 거기서 근무하다가, 나처럼 점장 좀 하다가, 그다음에 본사에서 페이퍼워크. 빠르면 한 2년? 더 빠를 수도 있고. 괜찮지?”
아무 말도 못 하는 병진이 형을 대신해 내가 말했다.
“당연히 괜찮죠. 물어볼 것도 없어요. 싫다고 하면 안 싫게 만들어버리면 되죠,”
“어떻게?”
누나가 물어본다.
“뭐 부담스럽다거나 잘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거나, 나는 다른 꿈이 있다거나, 그런 이상한 소리 하면 그냥 패면 돼요. 열심히 맞다 보면 ‘아! 내가 생각을 잘못했구나.’ 그런 깨달음을 얻게 될 거예요.”
“어머. 그거 좋은 생각이다. 때릴 때 나도 꼭 불러줘야 해.”
“그럼요. 제가 붙잡고 있을 테니, 누나가 선빵 치세요.”
그런 농담을 하는 우리 두 사람을 병진이 형은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다가.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누나에게 고개를 숙인다.
“그래. 고마우면 이 누나에게 더 잘하도록 하세요.”
누나가 웃으며 그렇게 말한다.
***
지난주보다 이른 시간에 치킨집에서 나왔는데, 그래도 막차는 끊겨 버렸다.
병진이 형이 누나를, 내가 지연이를 데려다주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었고 나는 지연이와 같이 택시를 타고 교대역 쪽으로 가고 있다.
나는 지연이에게 병진이 형 관련 백그라운드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는 빼고, 어떤 고민을 했고,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얼마나 속이 꽉 찬 사람인지 그런 이야기들 말이지.
“기분이 이상해요.”
내 이야기를 들은 지연이가 그렇게 말한다.
“응?”
“뭔가 기분이 이상해요.”
“어떻게?”
“모르겠어요. 그냥 한 가지 감정이라기보다는 뭔가 복합적인 그런 기분이에요.”
“나쁜 쪽?”
내 질문에 지연이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든다.
“어떻게 복합적인데요?”
“그냥. 뭐랄까 따뜻하고, 기쁘고, 뭔가 좀 울컥하고. 그리고 그런 내가 이상하고… 그래요.”
지연이가 그렇게 말한다.
“앞에 거는 알겠는데, 지연 씨가 왜 이상할까요?”
“그냥….”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조용히 있던 지연이는.
“점장 언니나 병진 오빠나 오늘 거의 처음 만난 거나 마찬가지인데, 사실 따지고 보면 아는 사람이라기보다 타인 쪽에 더 가까운데….”
“응.”
“그런데도, 뭔가 기쁘고 마음이 따뜻하고, 또 뭔가 좀 눈물 날 것 같은 게 좀 이상하달까? 모르겠어요. 그냥. 뭐.”
지연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인다.
나는 그런 지연이를 보고 미소 지었다.
“맹자님이 그랬어. 사람이 사단(四端)을 지니고 있는 건 사지(四肢)를 지닌 것과 같다고. 유지연 학생. 사단 기억나십니까?”
“네? 네.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역시 훌륭한 학생이네요. 맹자님께서 측은지심의 예로 무엇을 들었죠?”
“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맞아요. 아이가 우물에 빠질락 말락 해요. 자. 그 모습을 봤을 때, 어떻게 하느냐? 구한다 이거죠. 왜냐? 사람이니까. 사람의 마음에 사단 중 하나인 측은지심이 있으니까. ‘내가 아이를 구하면 부모가 고마워하겠지?’라든가, ‘아이를 구하면 마을 사람들이 날 칭찬하겠지’라든가, ‘저 아이가 죽으면 내 꿈자리가 사나워지겠지?’ 같은 그런 계산이나 생각이 없이, ‘어? 아이가 위험해? 구해야지!’ 이렇게 가는 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다. 이 말씀입니다. 아시겠죠? 이거 시험에 나옵니다.”
내 개드립에 지연이가 풉 하고 웃는다.
“당연한 거지. 누군가에게 좋은 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비록 타인이라고 할지라도, 그 누군가에게 좋은 일이 생겼다는 이야길 들었을 때, 나에게는 이익이 되지 않더라도 기분 좋아지는 게 사람의 본성 아닐까? ‘아씨. 나는 뼈 빠지게 공부해서 힘들게 대학 갔고, 수천만 원 들여서 졸업했는데, 저 자식은 고졸 주제에 외국계에 정직원으로 입사한다고? 불공평해!’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이상한 거지. 지연이는 하나도 안 이상한데? 정상인데? 완전 정상인데?”
나는 그렇게 말하며 지연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아따 학생. 거, 말 잘하네!”
그렇게 반응한 것은 택시를 운전하시던 기사님이셨다.
“대학생이야?”
기사님이 물어보셨다.
“네? 네.”
“어디 학교?”
“네? 아, 저기. 한국대….”
“역시. 어쩐지 말 겁나 잘한다 싶었는데, 공부도 잘하는 학생이었구만.”
“아닙니다.”
아, 갑자기 쑥스러워지네.
“거기 여학생.”
기사님이 갑자기 지연이에게 말을 건넨다.
“네?”
“남자친구 잘 만났네. 요즘 젊은이들답지 않게, 참 괜찮은 생각을 가진 친구야. 놓치지 말아요.”
기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다. 아니 뭐 기분 나쁘다는 말은 아니고….
“네? 네….”
지연이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다시 또 고개를 숙인다.
기사님 이상한 말씀 하셔서 분위기 이상해졌잖아요.
아니, 뭐 기사님 말씀이 틀리다는 건 아닙니다.
그 이후로 우리는 기사님의 ‘요즘 젊은이들이 지향해야 하는 삶의 방향’ 특강을 들으며 집으로 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