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 아이스 카푸치노 (2)
카푸치노. 흔히 아메리카노, 라테와 더불어 카페를 대표하는 메뉴 3대장 중 하나가 바로 카푸치노다.
이탈리아에서 유래되었다는 사람들이 인식과 달리 카푸치노는 오스트리아 스타일의 우유를 넣은 커피다. 정확히 말하면 카푸친 작은형제수도회(Order of Friars Minor Capuchin) 수사 신부들이 입던 후드의 모양과 닮았다고 해서 카푸치노(Cappuccino)라는 이름이 붙은 거다. 뭐 나는 그렇게 알고 있다.
아무튼, 카푸치노는 웬만한 사람들이 알고 한 번씩은 먹어본 대중적인 메뉴이기 때문에, 만들기 되게 쉬울 거라고 착각을 하고는 하는데, 카푸치노는 ‘바쁜 시간에 주문 받으면 짜증 나는 메뉴’ 상위 랭크를 자랑하는 아주 만들기 힘든 음료다.
거품이 중요하거든. 아주 중요하고말고.
아니, 뭐 그렇다고 해서 아주 한숨 나올 정도로 어려운 음료는 또 아니다. 사실 만들려면 금방 만들지.
근데 아이스 카푸치노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따뜻한 카푸치노에 얼음 넣는다고 아이스 카푸치노가 되는 게 아니다.
카푸치노의 핵심이 거품이라면, 아이스 카푸치노의 핵심은 거품의 온도이다. 음료는 찬데, 거품이 뜨겁다? 큰일 날 소리. 그래서 에스프레소 머신의 스팀완드가 아닌 거품기를 이용해 차가운 거품을 만들어야 한다.
그냥 차가운 거품도 아니고, 입자가 고운 차가운 거품을 말이지.
그래서 다른 메뉴보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간다. 아이스 카푸치노를 아예 메뉴에 올리지 않는 카페가 더 많을 정도다.
나도 1년 넘게 여기서 일하면서 아이스 카푸치노를 주문받아 본 적이 없다. 처음 배울 때 한 두어 번 만들어 본 거 말고는 경험이 없는데, 익숙하지도 않고 만들기도 더럽게 귀찮은 그걸 내가 만들어야 한다는 거지.
병진이 형은 화장실을 청소하고 있고, 점장 누님은 본사 업무 때문에 먼저 들어갔으니까.
아. 씨. 그딴 거 안 된다고 할걸. 당황해서 주문 받아 버렸네.
모르겠다. 여기가 오스트리아도 아니고, 뭐 적당히 만들어주면 알아서 먹고 가겠지. 설마 ‘잘츠부르크에서는 이딴 걸 아이스 카푸치노라고 부르지 않아! Das ist scheiße!’ 그딴 소리를 하지는 않겠지.
‘에라 모르겠다’ 모드이기는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일단 혼신의 힘을 다해서 거품을 만들었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백, 수천 번을 만든 우유 거품이었지만, 아마,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정성이 들어간 거품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그렇게 주문받은 음료를 만들면서, 나는 카페 한쪽에 앉아 있는 고마음 일행을 힐끗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아예 시선을 준 것은 아니고, 초점은 머신에 고정하면서 시야 외곽에 잡힌 사람들을 관찰하는 일명 ‘사시 스킬’을 시전했다.
혹시 또 눈 마주치면 어떻게 해.
다행스럽게도 고마음은 아마 소속사에서 높은 사람으로 보이는 나이 든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로 봐서는 심각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으아! 화장실 청소 다 끝….”
양손에 고무장갑을 끼고, 한 손에 양동이를 들고 있는 병진이 형이 그렇게 소리치며 나오다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고 흠칫한다.
예상하지 못했겠지. 지금 손님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 했을 테니까.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랍니다.
손님을 살펴본 병진이 형이 더더욱 크게 놀란다.
역시 고마음. 저렇게 예쁘면 못 알아볼 수가 없지.
“야. 한수야. 저, 저기, 저….”
재빨리 나에게 다가온 병진이 형이 그렇게 속삭인다.
아니, 속삭인 거치고는 목소리가 좀 크다. 여차하면 들렸을 수도 있겠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음료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내가 만드는 음료를 잠시 바라보던 형이 묻는다.
“뭐 만들어?”
“아이스 카푸치노.”
내가 그렇게 말하자 병진이 형이 끔찍하다는 표정을 한다.
나도 같은 표정을 지어준다.
“누가?”
어떤 인간이 개념 없이 폐점 30분 전에 들어오셔서 아이스 카푸치노 같은 걸 주문했느냐고 묻는 거지.
“모르겠는데?”
나는 그렇게 말하며, 계속 음료를 만들었다.
“언제 온 건데?”
“조금 전에.”
“마시고 간대?”
“30분밖에 안 남았다고 했는데, 괜찮대.”
“우리가 안 괜찮은데….”
“그렇게 말할 수는 없잖아요. 손님은 손님이고, 마감은 계속해야지. 이거 뽑고 내가 바리스타존 마무리할 테니까, 형은 밖에 정리 좀 해줘요.”
“알았어.”
그렇게 말한 병진이 형은 아쉬운지 고마음 테이블을 다시 한번 보고는 ‘진짜 예쁘긴 예쁘네.’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간다.
***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쪽 테이블에서 로드매니저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다가와 음료를 받아 간다.
도대체 그 망할 놈의 아이스 카푸치노는 어떤 인간이 먹는 건가 살펴보니, 처음 주문한 안 젊은 남자가 가져간다.
안 젊은 남자는 아이스 카푸치노, 젊은 남자는 샷 추가한 아메리카노, 분위기로 봐서 운전 담당하는 로드매니저, 그런 쪽 사람 같다.
그리고 고마음은 캐모마일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거품 대충 뽑아도 되는 거였는데.
아무튼, 그렇게 잠깐 그들을 살펴보다가 일단 마감에 집중하기로 했다.
고마음은 고마음이고, 마감은 마감이니까.
포터필터, 그룹헤드 분리해서 세제 푼 물에 담가두고, 배수관이랑 스팀노즐을 청소하면서 생각해보았다.
우연일까?
그 전까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국민 여배우를 이렇게 단기간에 세 번이나 연속으로 만난다? 그것도 각기 다른 장소에서 다른 모습으로?
처음 두 번이야 뭐 우기면 어떻게 말은 된다고 할 수도 있다. 시사회였고, 영화 개봉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내가 알바하는 카페에서?
흠. 아무튼 좀 신기하기는 하네.
그렇다고 내가 ‘이건 우리 두 사람의 운명이 시작되는 게 아닐까?’ 같은 허튼 생각을 할 정도로 개념이 없지는 않다.
스포츠물의 탈을 쓴 청춘 로맨스 작품의 대가이신 아다치 미츠루 선생께서 ‘우연도 겹치면 인연’이라는 명대사를 남기셨지만, 뭐, 고마음이 소꿉친구도 아니고, 집안의 원수도 아니고, 같은 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고, 피가 이어지지 않은 의남매도 아니고.
이런 우연이 수백 번 겹친다고 해도 인연이 될 거라는 헛된 기대를 하지는 않지. 수백 번이면 가능성 있으려나?
아니, 수백 번이라는 전제부터 이미 틀려먹은 거다.
무슨 전생의 끈적한 인연이 아니고서야 지금까지 얼굴 한 번 본 적 없던 사람과 우연이 계속 겹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아무튼 그런 가치 없는 생각을 하며 열심히 머신을 닦는데, 고마음 일행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가려는가 보다.
시계를 힐끗 보니 한 15분 정도 지났다.
그럴 거면 그냥 테이크아웃해서 가지. 괜히 사람 귀찮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생각과는 달리 겉으로는 자본주의의 친절한 미소와 함께 배웅 인사를 할 준비를 한다.
서비스업이라는 게 그런 거지.
“잘 마셨어요. 괜찮네.”
안 젊은 남자, 나에게 아이스 카푸치노를 만들게 한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컵을 올려놓는다.
당신 마시라고 혼신의 거품 뽑은 거 아니거든!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렇게 거짓 미소를 담아 인사를 하면서 고마음을 힐끗 보니….
역시 날 바라보고 있다.
나는 고마음에게도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잘 마셨어요.”
고마음이 그렇게 말해준다.
나는 뒤돌아가는 고마음의 뒷모습을 보면서, 어딘가 모를 이질감을 느꼈다.
왜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지?
***
-혹시 자니?
나는 지연이에게 그렇게 깨톡을 보내놓고 바로 후회했다. ‘자니’라니. 전 남친도 아니면서.
숫자 ‘1’이 사라지고 바로 답이 온다.
-아니요. 안 자고 있었어요.
우리 지연이는 ‘읽씹’ 같은 거 안 한다.
옆에서 지켜봤는데 깨톡이 오면 바로 확인하고 답을 한다. 알림으로 내용 확인하고 안 읽은 척하는 ‘안읽씹’도 안 한다.
나는 진짜 누가 그거, ‘안읽씹’ 하면 정나미가 확 떨어지더라.
-오빠는요?
-응. 나는 알바 끝나고 집에 가는 중.
-아. 오늘 목요일이었죠? 지금 끝났어요?
-어. 막 마감하고 지하철역으로 가는 중.
-수고하셨습니다.
-아니야. 수고는 무슨. 그나저나 오늘 뭐 했어?
내가 그렇게 보내자, 숫자 1이 바로 사라진다.
하지만 방금 전 대화와는 달리 바로 답이 오지는 않았다.
***
유지연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침대에 누운 상태로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오늘 뭐 했어?
휴대폰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던 유지연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화면에 글자가 늘어났다.
‘그냥 집에 있었어요.’
그런 문장이 만들어졌지만, 유지연은 전송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사실이었지만,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잠시 주저하다가 휴대폰 자판에 백스페이스를 눌러 만들어놓은 문장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그리고 새로운 문장이 만들어졌다.
-오늘 엄마랑 데이트했어요!
그 문장이 깨톡창에 새롭게 등록이 되었고, 바로 숫자 1이 사라졌다.
또 거짓말.
유지연은 속으로 그렇게 속삭였다.
어제도 거짓말을 했었다. 잘 도착했냐는 그의 깨톡에 잘 도착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때 집 근처를 계속 배회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아니, 정확히는 한수에 대해 생각하며, 집 근처를 계속 걸었다.
얼마나 오래 그렇게 걸었는지 확실히는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한 시간은 넘도록 걷고 또 걸었더랬다.
그리고 오늘 열이 올랐고, 근육통을 느꼈다. 몸살이었다.
평소였다면 그 정도 걸었다고 몸살에 걸리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여러 가지가 겹쳤다. 생리 직전이기도 했고, 마음도 무거웠고.
결국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하지만 또다시 그에게 거짓말을 해버렸다.
-어머님이랑 데이트? 오, 재미있었겠는데?
-네. 즐거웠어요. 오빠는요? 오늘 뭐 하셨어요?
-나는 오늘 노동했지. 알바하는 날이니까.
-지금 끝나신 거예요? 힘드시겠어요.
-아니야. 뭐 맨날 하는 건데. 아. 그리고.
***
-아니야. 뭐 맨날 하는 건데. 아. 그리고.
그렇게 깨톡을 보낸 후 내 손가락은 잠시 멈추어 있었다.
원래는 ‘오늘 카페에 고마음이 왔다.’ 이렇게 보낼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그렇게 보내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등골을 스쳤다.
왜?
모르겠다. 갑자기 그런 느낌이 든다.
-오늘 아이스 카푸치노 만들었다. 오늘 그거 주문 들어와서 진땀 흘렸엉.
나는 그렇게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아이스 카푸치노요? 만드는 거 어려워요?
-아아처럼 그냥 아메리카노에 얼음 넣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고, 차가운 거품을 만들어야 하거든. 차가운 거품 곱게 만드는 게 엄청 귀찮아. 오늘 갑자기 주문 들어와서 깜짝 놀랐다니깐.
-성공했어요?
-그럼. 당연하지. 맛있다는 이야기까지 들었어요.
-역시, 바리스타 한! 다음에 저도 가르쳐주세요.
-다른 사람 같았으면 절대 가르쳐주지 않겠지만, 우리 지연이는 내가 특별히 비법을 전수해드리죠.
-넵! 감사합니다! 싸부님!
음. 괜찮군. 분위기 괜찮네.
***
-넵! 감사합니다! 싸부님!
그렇게 깨톡을 보낸 유지연의 얼굴은 깨톡과는 달리 조금 슬퍼 보였다.
어쩐지 슬픈데, 조금 우울한데, 실제 유지연은 그런데, 손가락이 만들어내는 휴대폰 속 유지연은 밝게 웃고 있었다.
아닌데, 사실은 이게 아닌데, 오늘 아팠는데, 우울했는데, 하루 종일 누워만 있었는데. 알아줬으면 싶은데, 위로해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계속 밝고 밝게 웃고 있는 핸드폰 속 유지연을 연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