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189화 (189/271)

189 : 누가 먼저였어요?

나? 지연이가 아니라 나라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잠시 주저했지만, 계속 그러고 있을 수는 없어서 일단 남자가 내민 전화기를 건네받았다.

“여보세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전에는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서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네? 누구신….”

-저 장현수입니다.

누구? 장현수?

“네?”

-시사회 때 그분 맞으시죠? 서현 씨와 함께 오셨던.

기억났다. 장현수. 이번 영화 제작사 대표. 그 느끼 중년남.

“아…. 네. 맞습니다.”

-역시. 그러셨군요. 그때랑 분위기가 달라서 제가 한 번에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거 죄송합니다. 하하하.

우렁찬, 그리고 가식적인 웃음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진짜로 미안하다고 생각하는지는 둘째 치고, 일단 이렇게 말해본다.

-말씀을 하시지 그러셨어요. 말씀해주셨다면 아까 그렇게 보내드리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될까 봐 조용히 있었던 거거든요?

-그런데, 혹시 지금 어디 가시는 길이신가요?

“네. 약속이 있어서….”

-그러시군요. 혹시 괜찮으시면 잠시 시간 좀 내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전화기 너머로 다시 큰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시끄러운 지하철역임에도 지연이에게 들릴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다.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인데?

“네?”

-아. 다른 건 아니고, 인사를 제대로 드리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 그렇습니다. 그때도 제가 제대로 대접도 못 해 드린 것 같기도 하고.

전화기에서 그렇게 알 수 없는 이야기가 계속 흘러나온다.

재빨리 상황을 정리해보자.

저 장 대표라는 사람은 엘리베이터에서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지연이에게만 관심을 보였지.

하지만 지금은 나에 대해서 안다? 어떻게?

역시 그거겠지?

아마 고마음이 이야기해 줬을 가능성이 높다. 시사회장에서 본 나를 기억한 유일한 사람이니까.

아니, 고마음이 먼저 이야기하기 전에 영화사 대표가 물어봤을까? 아까 그 청년하고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가요? 그런 식으로?

그래서 고마음이 이야기해 주었을까?

뭐 그 부분은 일단 넘어가고, 아무튼, 느끼 중년남 대표님은 날 기억해냈다. 서현 씨와 함께 있던 사람이라고 정확히 기억을 해낸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는?

직원에게 말했을 거다. 강변역으로 빨리 뛰어가 봐. 그리고 혹시 찾게 되면 내가 통화하고 싶다고 해.

그런 그림이겠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게 가장 가능성이 크다.

오케이. 거기까지는 알겠고….

그런데 차를 마시자고? 제대로 인사를 못 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그때, 시사회 때, 서현 씨가 날 소개하면서 귓속말로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사 대표 아저씨는 분명 나에 대해 무언가를 오해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뭐. ‘작은 어르신이에요, 우리 중앙그룹의 실질적인 주인시고요.’ 같은 말은 안 했겠지. 그렇지만 나를 투자자라든지 뭐 그런 쪽으로 말이지.

하지만 나는 그냥 21살 대학생이거든요. 용돈을 위해서 알바를 해야 하는.

영화사 대표를 만날 이유도, 생각도 없다.

“죄송합니다. 거절할 수 없는 선약이라서.”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지연이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눈동자에 궁금함을 가득 담아서 나를 바라보던 지연이는 ‘거절할 수 없는 선약’이라는 말에 살짝 웃는다.

제작사 대표 아저씨의 초대가 어떠한 의도를 담고 있든, 지연이를 불편한 자리에 데려갈 수는 없지.

-아, 그러시군요. 제가 이거, 오늘 여러 번 실례를 범하는군요.

“아닙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나는 그렇게 말하고, 이야기가 더 길어지기 전에 전화기를 영화사 직원에게 넘겨주고는 몸을 돌렸다.

영화 한 번 보러 왔다가 진짜 별일이 다 생기네.

***

을지로3가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는 설렁탕집. 진한 국물과 맛있는 김치로 유명한 오래된 설렁탕집에 지연이와 내가 앉아 있다.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무엇을 먹을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 을지로3가에 설렁탕집으로 의견을 모았고, 설렁탕 두 그릇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소주 한 병 시킬까 싶었는데, 지연이랑 너무 그림이 안 어울릴 것 같아서 그만뒀다. 너무 아저씨들 같기도 하고.

아무튼, 한 그릇에 만 원이나 하는, 조금 비싼 감이 없지 않은 설렁탕을 먹으며, 나는 지연이에게 조금 전 일어난 상황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요약하면, 지난주에 시사회에 초대를 받았다. 내가 받은 초대는 아니고 서현 씨가 초대를 받았는데, 어쩌다 보니 내가 동행하게 되었다. 그때 서현 씨와 아까 그 아저씨가 인사를 나누었는데, 옆에 있다가 나도 인사만 나누었다. 그랬는데 오늘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고, 나를 기억할 줄은 더더욱 몰랐다. 아마 기억한 것 같지는 않고, 옆에서 누가 이야기해 준 게 아닐까 싶다.

고마음도 그때 만났는데 아니, 만났다는 표현은 맞지 않고, 그때 봤는데 따로 인사를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뭐 그런 식으로 설명했다. 물론 그 시사회가 VIP 시사회였고, 소수의 투자자들만 초청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빼버렸다. 그 이야기까지 하면 일이 너무 커지니까.

지연이는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특별한 반응은 없다. 아마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전화 통화할 때, 그 아저씨 목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옆에 서 있던 지연이도 들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알아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거든. 거기 가서 말 한마디도 안 했는데.”

지연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국물을 떠먹는다.

근데 뭔가 말을 하면 할수록 자꾸 변명하는 느낌이 드네.

“그런데… 고마음 배우는 확실히 오빠를 알고 있는 것 같던데요?”

지연이가 그렇게 묻는다.

나도 가장 이상한 게 그거다. 영화사 대표 그 양반하고는 그래도 악수라도 한 번 했지만, 고마음하고는 아무런 접점이 없다. 인사도 안 했다.

“나도 그게 가장 이상해. 고마음하고는 인사도 안 했는데….”

꼭 접점을 찾는다면 눈 몇 번 마주쳤다는 거?

아니, 그거야 뭐 진짜 대단할 게 없지. 거기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데?

내가 잘생겨서? 고마음 배우의 타입이라서?

그렇게 개드립을 칠까 싶었지만, 너무 택도 없는 소리라 입을 다물었다.

“아마 고마음이 아는 다른 누구랑 착각한 거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그게 가장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라고 봅니다.”

나는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런 전제를 깔면, 영화사 대표가 날 제대로 인지한 게 설명이 안 되기는 한데, 뭐 모르겠다.

“네.”

지연이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그러면 오빠는.”

그렇게 말한다.

“응.”

“그 영화, 두 번 본 거네요.”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낸다.

“응? 어. 뭐. 그렇지?”

사실 그렇지. 그건 부정할 수도, 변명을 할 수도 없는 팩트지.

지연이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다시 국물을 떠서 입으로 가져간다.

그렇게 한 번 가라앉은 분위기는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남은 설렁탕을 먹고, 우리는 헤어졌다.

여느 때처럼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는데, 지연이는 3호선 타면 금방이라며 꾸벅 인사하고는 혼자서 집으로 돌아갔다.

***

지하철에서 내린 유지연은 집을 향해 천천히 걷고 있었다.

말없이 걷고 있는 유지연의 시선은 바닥에 고정돼 있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절대 나쁘지 않은 하루였다.

영화는 좋았다. 배우들의 무대 인사도 볼 수 있었고, 이어진 이벤트에 당첨되진 않았지만 재미있었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설렁탕집에 가서 맛있는 설렁탕도 먹었다.

아니, 맛있었던 것 같았다. 먹기는 했지만, 처음 몇 입만 맛이 어렴풋이 기억날 뿐 그 이후에는 정확히 어떤 맛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기계적으로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떠먹었다. 인터넷에 유명하다는 깍두기도, 진하다는 국물도 기억나지 않았다.

바보 같아.

유지연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기대하고 있었는데, 하루하루 다가오는 게 행복했는데. 그 기대하던 날의 마지막에 이렇게 기분이 가라앉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영화를 두 번 보았다고 했다.

시사회에 초대를 받았다고 했다.

그 사람과 먼저 영화를 봤다고 했다.

왜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한수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 유지연은 질문을 하고 싶었다.

누가 먼저였어요?

서현 씨라는 그 사람과 자신과의 약속 중 어느 약속이 먼저였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서현 씨라는 그 사람과 시사회를 가기로 약속을 해놓고, 자신에게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한 건지, 아니면 자신과 영화를 보러 가기로 약속을 해놓고, 그 사람과 영화를 보러 간 건지 물어보고 싶었다.

바보 같아.

유지연은 다시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그런 걸 물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후배, 그리고 친한 동생.

한수에게 있어서 자신은 그저 그 정도에 불과한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있음에도 그가 좋았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같이 학교를 다니고, 알바를 하고,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이런저런 시답잖은 농담을 하면서 웃는 그의 얼굴을 보는 게 좋았다.

독점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땅을 바라보며 걷던 유지연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사는 아파트 단지의 정문이 눈앞에 보였다.

유지연은 그 자리에 서서 잠시 정문을 바라보다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정문을 그대로 지나쳐 강남역 방향으로 계속 걸었다.

멀리 갈 생각은 없었다. 그저, 조금만 더 걷고 싶었다. 조금만 더 생각하고 싶었다.

유지연은 몇 달 전 기억을 떠올렸다.

축제가 끝나고, 모두가 모여 과방에서 선배들이 사 준 피자를 먹던 그 날.

자신이 처음으로 한수에 대한 마음을 오롯이 드러내 보인 그날.

-에이. 그냥 말할래요. 저 한수 오빠 좋아해서 한수 오빠만 오빠라고 부르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한수 오빠만 오빠라고 불렀는데. 그래도 괜찮죠?

그렇게 말했을 때, 그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손에 피자를 들고서 반쯤 입을 벌린 상태로, 동그랗게 뜬 눈으로,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사람에게 진짜 좋은 마음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말하지 말걸.

유지연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철없는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는데, 제 솔직한 마음은 당분간 지금 같은 상황이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한수 오빠가… 그… 특별하게 좋기는 한데, 지금 당장 사귀고 싶다거나, 남자친구가 되어서 나만 바라봐 줬으면 좋겠다거나, 이런 마음은 아닌 것 같아요.

거짓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런 마음이었다. 조금 더, 조금 더 다 같이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때 그 말이, 그 마음이 후회가 되었다.

왜 그렇게 이야기했을까?

그냥 조금 더 봐달라고, 조금 더 특별하게 생각해달라고, 그렇게 말할 것을.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런 후회가 들었다.

“…바보 같아.”

유지연은 그렇게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계속 발을 옮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