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187화 (187/271)

187 : “또 뵙네요.”

***

자신을 영화 제작사 직원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자신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명함 한 장을 꺼내서 지연이에게 내민다.

지연이가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고, 내가 반보 앞으로 나가며 지연이를 대신해 명함을 받았다.

‘CHD픽쳐스’라고 쓰여 있는 명함이다.

“아, 일행분이신가 보네요. 다름이 아니라, 혹시 괜찮으시면 배우님들하고 사진 찍을 기회를 드리려 하는데, 어떠신가 여쭤보려고요.”

나를 힐끗 바라본 남자는 다시 지연이에게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한다.

“네?”

지연이가 되묻는다.

“아, 아까 이벤트 때 아깝게 사진 못 찍으셨잖아요. 저희 대표님께서 안타까워하시는 모습 보시고, 제게 다시 한번 여쭤보라고 하셨거든요. 배우님들 아직 안 떠나셨는데, 혹시 생각 있으시면 저희가 만날 수 있게 해드릴게요.”

영화사 직원이 그렇게 말한다.

요약하자면, 아까 사진 못 찍었으니까 찍을 기회를 주겠다는 거다. 특별히 지연이에게만.

지연이가 날 바라본다. 그 눈동자에 ‘어쩌죠?’ 하는 물음표가 떠 있다.

솔직히 나는 상관없다. 제안을 받은 것도 지연이고, 애초에 13번 좌석에 앉은 것도 지연이고.

그렇지만 ‘오, 완전 행운!’ 하면서 덥석 잡아버리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도 아니다.

“어떻게 할래?”

내가 차분한 목소리로 지연이에게 물었다.

“오빠는요?”

“난 상관없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렇게 이야기하는 우리 두 사람을 영화사 직원은 의아하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렇겠지. 아마 ‘배우님들과 사진 찍을 기회를 드릴게요.’라는 말을 듣자마자 엄청 좋아하는 모습을 예상했을 텐데, 우리가 이렇게 주저하고 있는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했을 거다.

“저는….”

지연이가 그렇게 말하고는 말을 멈춘다.

오케이, 알겠어. 무슨 말인지.

“죄송합니다. 좋은 기회 주셨는데, 저희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내가 지연이를 대신해 그렇게 영화사 직원에게 말했다.

그리고 ‘맞아?’ 그런 시선으로 지연이를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지연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거절당할 것이라고 전혀 예상치 못한 영화사 직원은 놀란 눈으로 우리를 바라만 보고 있다.

“갈까?”

“네….”

우리는 직원에게 작게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

상영관을 나왔다고 해서 바로 영화관을 빠져나오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일단은 화장실에 가야 한다. 신기하게 꼭 영화를 보고 나오면 오줌이 마렵다. 두 시간 가까이 한자리에 앉아 있어 방광이 눌려서 그런가? 아무튼, 영화 끝나면 보통 화장실을 다녀오는 편이다.

여자들은 특히 화장실을 빼놓지 않는다. 볼일을 보는 용건도 있겠지만, 그거 말고도 화장을 고친다거나 휴대폰을 확인한다거나, 아무튼 여러 가지 목적으로 화장실을 가더라.

조금 시간을 두고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여자 화장실에는 사람이 좀 많은 것 같았고, 먼저 일을 보고 나온 나는 지연이를 기다려야 했다.

그나저나 오랜만이네. 영화관에서 누구 기다리는 거.

전 여자친구 지수는 남자가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여자친구의 가방을 들고 기다리는 모습은 더더욱.

좌변기를 이용해야 하는 여성들에게 대형 백팩이나 캐리어라면 불편할 수 있겠지만, 작은 손가방 그거 별로 무겁지도 않은 걸, 왜 남자친구에게 맡기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상대방에게 예의가 아니라는 말을 했었더랬다.

나야 뭐, 사랑하는 여자친구를 위해서 그 정도 들어주는 거, 별로 힘들 것 없다고 생각은 하지만, 기왕이면 화장실 앞이 아니라 좀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좋겠다는 생각은 한다.

아무튼 나는 적당히 떨어진 곳에 앉아서 지연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냥 멍하니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열심히 핸드폰으로 주변 괜찮은 식당을 검색하고 있었다.

영화는 지연이가 보여줬으니까, 밥은 내가 사야지. 어디 보자. 어디 괜찮은 곳이 근처에 있으려나? 우리 지연이에게 어떤 맛있는 걸 사 줘야 잘 사 줬다는 칭찬을 받을까?

저번에는 초밥을 먹었으니까, 오늘은 고기 먹을까? 냄새 때문에 좀 그런가? 파스타 같은 거 먹고 싶은 기분은 아닌데. 흠.

“오빠.”

어느새 다가온 지연이가 내 옆에 털썩 앉는다.

“뭐 보고 있어요?”

“저녁 뭐 먹을까 하고. 지연 씨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전 다 좋아요.”

“그게 가장 나쁜 답이야.”

“그럼 두 번째.”

“응?”

“오빠가 생각해 놓은 메뉴 있을 거 아니에요? 그중에서 두 번째.”

그거 저번에 내가 했던 이야기 아냐?

“그러면… 선지해장국?”

일단 그렇게 개드립을 던졌다.

“선지해장국 좋아요!”

지연이는 그걸 또 받는다.

“진짜?”

“진짜요. 저 선지해장국 좋아해요. 맛있고, 몸에도 좋고.”

“…가끔 보면 아저씨 같아.”

“네?”

“무슨 스무 살 아가씨가 선지해장국이야.”

“스무 살 아가씨도 선지해장국 좋아할 수 있죠. 확실히 우리 나이에 인기 있는 메뉴는 아니지만, 제 친구들 중에서도 좋아하는 애들도 있어요, 몸에 좋다고. 그리고 좀 멋있지 않아요?”

“뭐가?”

“뭔가, 못 먹을 것 같은 음식인데 잘 먹으면 좀 사람이 달라 보이고, 그런 거 있잖아요.”

“확실히 그런 건 있지. 또 있어? 못 먹을 것 같지만 잘 먹는 거?”

“추어탕이요. 뭔가 몸이 건강해지는 느낌이라 좋아요. 근데 갈아 만든 것만. 통으로 들어간 건 못 먹어요.”

“그건 나도 별로.”

“그럼 추어탕 먹으러 갈까요?”

“진짜?”

“네. 저 진짜 추어탕 좋아해요. 가족끼리 외식할 때, 추어탕 먹으러 가요. 아, 우리 오빠 지금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거든요. 오빠 오면 꼭 먹으러 가요. 몸보신 시킨다고. 오빠도 좋아하고요.”

“그래? 이 근처에 추어탕집이 있나 모르겠네. 종로나 을지로 같은 데 가야 있을 것 같은 이미진데….”

“을지로 갈까요? 지하철 타면 한 번에 가는데? 가면서 계속 찾아봐요.”

“그럴까? 을지로는 확실히 먹을 데는 많겠다. 아, 곰탕도 있다.”

“곰탕도 좋아요. 아! 그리고 을지로에 설렁탕 유명한 곳도 있지 않나요?”

“설렁탕도 있지. 좋네. 일단 을지로로 갈까요?”

우리는 그렇게 을지로로 목적지를 정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음. 확실히 국물 이야기했더니, 국물이 땡기는데?

뭐가 되었든 오늘 저녁은 국밥이다. 한국인은 영화 보고 국밥이지. 국물에 소주 한잔하면서 영화 이야기하는 게 국룰이지.

***

대형 백화점이나 쇼핑몰 같은 경우 보통 두 종류의 엘리베이터가 있다. 하나는 일반 고객들이 이용하는 엘리베이터, 다른 하나는 흔히 ‘화물용’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엘리베이터.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길목에 붙어있는 일반 고객용 엘리베이터의 경우 깔끔하고, 전면이 유리로 되어있거나 하는 경우도 많아서 이용에 쾌적하지만,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불편한 부분이 있다. 특히 사람이 많이 몰리는 시간에는 몇 대를 그냥 보내야 하는 경우도 있고.

반면에 으슥한 곳, 일반 고객들이 잘 모르는 곳에 위치해 있는 화물용 엘리베이터는 접근성이 떨어지고, 오르내리는 기능에 특화되어 있어서 투박하지만, 이용이 편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보통 화물용 엘리베이터가 일반 엘리베이터보다 크기 때문에, 꽉 차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눈물 흘릴 일도 드물고.

이 사실을 내가 어떻게 아느냐 하면, 지수가 가르쳐줬다.

지수 어머님께서 백화점에서 오래 근무하셨고, 그래서 어렸을 때 놀러 가면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타는 게 더 빠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뭔가 또 일탈하는 그런 기분도 들어서 나랑 지수는 큰 쇼핑몰 가면 일부러 그런 으슥한 곳에 있을 엘리베이터를 찾아다니면서 놀기도 했었고.

뭐 지수 생각나서 그런 건 아니고, 일반 엘리베이터 앞에 사람도 많고, ‘바쁜 시간에는 으슥한 곳에 있는 직원용이나 화물용 엘리베이터 사용하면 더 빠를 수도 있음’이라고 잘난 척도 하고 싶어서 지연이를 데리고 으슥한 곳으로 갔다.

뭐 으슥하다고 해서 이상한 짓을 하겠다는 건 아니고.

아무튼 그렇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천천히 열리는 문을 보면서, 앞으로 무게중심을 옮기던 발을 순간적으로 멈추었다.

텅텅 비어있거나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엘리베이터에 꽤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으니까.

아니, 단순히 사람들이 타고 있었기에 내 발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조금 전 상영관에서 보았던 배우들, 고마음을 위시한 배우들이 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고마음과 눈이 마주쳤다.

“죄송합니다. 다음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경호원처럼 보이는 검은 양복 아저씨가 우리를 보고 그렇게 말한다.

순간 욱하는 마음이 치솟았다.

아니, 자기들이 무슨 윗사람도 아니고, 공간 넉넉한데, 지들이 뭔데 타지 말라고 그러는 거야.

하지만 ‘당신들이 엘리베이터 전세 냈어?’라고 따질 정도로 분별이 없는 사람은 아니지.

뭐,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다. 저 사람들도 피곤하겠지.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경호원의 인사와 함께, 다시 스르륵 닫히던 문이 덜컹하고 멈추더니, 갑자기 다시 열린다.

그리고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타세요. 괜찮으니까. 같이 타세요.”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다.

며칠 전 서현 씨와 같이 보았던 사람. 뭐였더라? 장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무튼, 영화 제작사 대표 느끼남 중년 아저씨, 그 사람이 우리를, 정확히는 지연이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까 무대 인사 할 때는 안 보였는데, 같이 오기는 했었나 보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먼저 내려가세요.”

내가 말했다.

귀하신 분들 편히 내려가시라고 겸양을 한 것은 아니고, 우리도 불편하기도 하고. 또 느끼남 아저씨의 시선이 지연이를 향하고 있는 게 기분 나쁘기도 하고.

사실 그게 가장 크고.

“아니에요. 자리도 많은데 타세요, 타.”

그 대표가 또 그렇게 권유를 한다. 옆에 있던 김두영 배우도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대표 혼자 있었으면 ‘아, 싫다고요!’ 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배우들도 있고 우리 때문에 엘리베이터가 계속 멈춰있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해서 지연이를 슬쩍 보니, 지연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뭐, 탈까? 그래 봤자 1분도 안 되는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

그런 생각으로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작게 고개를 숙이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우리가 타고, 문이 닫히자 어색한 침묵이 엘리베이터 안에 흐른다. 우웅 하는 동작음 말고는 약속이나 한 듯 아무런 말 없이 조용하다.

그런 침묵을 깬 것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또 뵙네요.”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 안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향한다.

나도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고, 목소리의 주인과 내 눈이 마주쳤다.

고마음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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