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 개봉주 무대인사 (2)
흔히 루시드 드림(Lucid Dream)이라는 용어로 유명한 자각몽(自覺夢)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상태로 꾸는 꿈을 말한다.
내가 지금 그 자각몽 한가운데 서 있다.
나는 눈앞에 서 있는 소녀를 바라보고 있다.
한복, 아니,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한복과는 조금은 다른 복식. 상의는 저고리에 치마를 입었다는 것은 동일하지만, 저고리의 형태가 우리가 알고 있는 한복 저고리보다 더 길고, 품이 훨씬 넉넉한 한복을 입은 소녀가 서 있다.
열셋? 열넷? 아무리 많이 쳐줘도 10대 중반의 나이에 불과할 것 같은 소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아니, 내려다보고 있다.
내려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내가 소녀보다 훨씬 작았으니까.
그녀의 허리춤에도 닿을까 싶을 정도의 작은 키. 다섯 살? 여섯 살? 그 정도의 꼬마인 내가 소녀를 올려다보고 있다.
처음이다. 자각몽도 처음이고, 이런 꿈도 처음이다.
아니, 처음인가?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내가 꿈이라는 것을 인지했고, 꿈속에서 나는 소녀를 올려다보고 있고, 나를 내려다보는 소녀의 눈동자에 감정이 일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슬픔. 진한 슬픔이 소녀의 흑진주 같은 눈동자 안에서 일렁이고 있다.
그런 소녀의 눈을 나는 그저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 있다.
저 소녀는 누구지? 왜 저렇게 슬퍼하고 있지?
모르겠다.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알고 있다. 꿈속에서의 작은 나는 알고 있다. 저 소녀가 누구인지, 왜 저렇게 슬퍼하고 있는지.
이 꼬마가 나이고, 내가 이 꼬마인데, 꼬마는 알고 나는 모른다.
그 이질감이 묘하게 다가온다.
소녀가 느끼고 있는 슬픔이 마치 공기를 통해 복사되는 온기처럼 내 마음에, 영혼에 천천히 스며든다.
안아주고 싶다. 작은 두 팔을 뻗어 소녀를 안아주고 싶다.
하지만 꼬마는 그러지 않는다.
왜 안아주지 않는지, 나는 알고 있다.
소녀에게서 전달되는 슬픔이, 그 처연한 슬픔이 너무나도 아름답다고 느꼈기에.
어설픈 위로가 그 아름다움을 흐트러트릴 것만 같았기에.
그렇기에 꼬마는 차마 팔을 내밀어주지 못한 채, 그저 소녀의 아름다운 슬픔에 공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저 소녀를 애틋하게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다.
안아주고 싶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깨고 싶지 않다.
그렇게 공존할 수 없는, 상반된 생각을 하고 있는 찰나, 소녀가 움직인다.
소녀는 두 손으로 치맛단을 여미며 천천히 몸을 굽힌다.
이윽고 소녀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온다.
눈높이를 맞춘 소녀의 반달 모양의 눈이 젖어 있다.
눈물에 젖어 있는 눈동자와는 달리, 소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다.
울음을 참으려 웃으려 하는 것일까?
웃음을 지우려 울려 하는 것일까?
나는 마음속으로 그런 질문을 되뇌면서 소녀의 눈물 젖은 눈동자를 바라본다.
슬픔이 일렁이는 눈동자, 옅은 미소가 담겨 있는 반달 같은 눈, 그리고 그 눈을 따라 방울져 흘러내리는 눈물 한 방울.
곧이어 소녀의 입이 열린다.
아름다운, 그렇지만 슬픔이 담뿍 담긴 목소리가 나에게로 스며든다.
“소녀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번 생이 끝나면 그다음 생에, 그다음 생이 끝나면 또 그다음 생에. 언젠가 다시 뵈올 그때까지, 소녀는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잠에서 깬 나는 침대에 누워있는 그 상태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내 시선은 이제는 익숙해진 내 방 천장을 바라보고 있지만, 내 의식은 조금 전 꿨던 꿈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흠…. 기분이 묘하다. 꿈의 잔상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 기분이다.
자각몽은 원래 이런 건가? 모르겠다. 자각몽이라는 걸 처음 꿔 봤으니.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동안 내가 꿨던 그 어느 꿈보다 생생했고, 잠에서 깨어났음에도 그 꿈에서 완전히 다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내 마음에, 내 영혼에 아직 꿈의 잔향이 남아있는 그런 느낌?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다시 꿈을 떠올렸다.
소녀, 어린 소녀의 슬픈 얼굴, 그런 소녀를 바라보는 어린 나. 그리고 소녀가 해준 말, 그리고 소녀의 슬픔.
마치, 조금 전 꼬마가 되어 실제로 소녀를 만났던 것처럼 생생하게 남아있다.
소녀가, 소녀의 분위기가, 소녀의 슬픔이 낯설지 않다는 그 잔향이 계속 내 주위에 맴돌고 있다.
***
“진짜 그랬어요?”
강변역 인근의 카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지연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본다.
“어. 깜짝 놀랐다니까. 중훈이가 갑자기 강변 이야기를 하는데.”
“그래서요?”
“일단 나는 좋다고 했지.”
내 말에 지연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똑똑한 지연이는 이해하는 거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말이지.
“승환이 빼고 당연히 다들 강변 좋다고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가는데, 갑자기 그 생각이 딱 나는 거야. 무대 인사란 말이지? 무대 인사를 하는데 표가 있을까? 표가 없을 수도 있겠다고. 그래서 그랬지. 표 없을 것 같다고. 아니나 다를까, 표 없더라고.”
“다행이네요.”
“현장 가서 취소 표 구해보자고, 뭐 그딴 소리 했으면 어쩔 뻔했어. 아무튼 잠복해있길 잘했지. 여차하면 큰일 날 뻔했다니까.”
“역시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적을 알고 나를 아니 위태롭지 않네요.”
“역시 옛 으른들 말치고 틀린 말이 없어요. 그나저나, 우리 7시 반 영화라고 했지?”
“네. 7시 반.”
“그거 같은데? 무대 인사 하는 거?”
“그래요?”
“응. 몰랐어?”
“네. 저 예매할 때는 그런 이야기 없었어요. 잠시만요.”
지연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핸드폰을 꾹꾹 눌러가며 검색을 하더니.
“진짜네요! 오늘 무대 인사 한대요. 우리가 보는 그 시간대.”
지연이가 그렇게 말한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내가 그렇게 말하자 지연이가 이상하다는 듯 나를 바라본다.
“왜요? 싫어요?”
“응?”
“오빠 표정이 어딘가 별로인 것 같은데요?”
“아니? 싫은 건 아닌데….”
“아닌데요?”
“아냐. 아무것도 아냐. 그냥 좀 놀래서.”
나는 그렇게 대충 흘려 넘겼다.
사실 싫은 건 아니다. 싫은 건 아닌데….
뭔가 좀 이상하달까? 기분이 좀 묘하달까?
아니, 사실 걸리는 게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일단, 난 그 영화를 봤잖아. 투자자 시사회에서.
지연이에게 그 이야기는 안 했다. 일부러 숨긴 건 아닌데, 그렇다고 꼭 이야기해야 하는 것도 아닌 듯해서.
그런데 말이지. 무대 인사라면 그 사람들 온다는 거 아냐. 배우들하고 감독하고. 제작사 그 느끼남 아저씨도 오려나?
에이, 뭐. 온다고 해서 설마 날 알아보거나 그러지는 않겠지?
에이, 설마.
그때 중국 재벌 막내아들 코스프레하던 나랑 지금의 나는 옷도 다르고 분위기도 다른데. 그리고 극장 안에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데, 나를 알아보겠어?
불가능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그렇지. 불가능해.
그리고 설사 알아봤다고 해도… 뭐, 문제 될 게 없지.
아니, 뭐 내가 바람피운 것도 아니고, 쓸데없이 이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겠지?
***
영화는 역시 훌륭했다.
스토리를 다 알고 있음에도, 이미 한 번 보았음에도, 훌륭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과 같이 봐서 그랬을 수도 있다. 마흔 명 남짓에 불과한 투자자 시사회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같이 웃고, 같이 울고 하니까, 거기에 비례해 감정이 더욱 증폭되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무튼, 영화는 훌륭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스태프롤이 올라가고, 상영관에 불이 켜졌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관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기는커녕, 문을 통해 몇몇 사람들이 재빨리 뛰어 들어와 무대 위에 마이크와 카메라를 설치하고 분주하다.
무대 인사가 시작된다고 생각했는지, 관객들도 기분 좋은 웅성거림과 함께 휴대폰을 주섬주섬 꺼내 든다.
그렇게 몇 분이 흐르고,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이 먼저 나와 관객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이번 무대 인사는 방송국 연예 정보 프로그램에서도 촬영을 한다고. 그리고 제작사에서도 프로모션용으로 영상을 촬영할 예정이기 때문에, 혹시라도 불편하신 분들께서는 참고해달라는 그런 이야기를 한다.
그런 안내가 나오자, 네다섯 명 정도가 자리에서 일어나 슬그머니 밖으로 나간다. 뭐야, 불륜 커플인가?
그나저나 카메라도 있단 말이지? 이거 나중에 문제 생기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재빨리 머리를 흔들었다.
에이, 무슨 문제 있겠어? 그리고 찍혔다고 해서 내가 뭐 지연이랑 못 올 데 온 건가? 응? 아니잖아.
괜찮아. 괜찮아. 아무 문제 없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초롱초롱 기대에 찬 눈을 하고 있는 지연이에게 ‘방송국 카메라는 좀 그렇지 않을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잖아.
아무튼, 그렇게 또 잠시 있으니, MC로 보이는 남자가 나와서 본격적으로 무대 인사를 시작한다고 말한다.
감독과 배우들이 등장하자 환호성과 함께,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져 나오고, 아주 난리다.
뭐.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영화를 봤는데, 방금 전까지 스크린에서만 보던 배우를 직접 눈앞에서 볼 수 있다면, 완전 좋은 기회지.
“와…. 고마음 진짜 예쁘네요.”
무대 인사를 하는 고마음을 보면서 지연이가 그렇게 말한다.
서현 씨도 그런 말을 했었지. 예쁘기로 따지면 어디 가서 절대 두 번째라는 이야기 듣지 않을 서현 씨와 지연이가 그렇게 인정할 정도로 고마음이 예쁘기는 한가 보다.
“자! 그럼 지금부터 개봉일에 찾아와주신 고마운 관객분들을 위한 작은 이벤트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감독과 배우들의 인사가 끝이 나자, MC가 관객을 보며 그렇게 말한다.
이벤트? 뭔가 불안한데?
“지금부터 추첨을 통해서 세 분에게 무대에서 저희 배우님들하고 셀카를 찍을 수 있는 기회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추첨은 영화에서 열연해주신 김두영 배우님, 고마음 배우님 그리고 문창환 배우님께서 해주시겠습니다.”
MC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무슨 추첨함 비슷하게 생긴 것이 무대 위에 오른다.
설마. 에이. 설마.
우리 자리 어디지? K열 13, 14. 설마. 에이. 설마.
가장 먼저 김두영 배우가 추첨함에 손을 넣어 종이 한 장을 빼내고 MC에게 건네자.
“첫 번째 행운의 당첨자는….”
MC가 그렇게 뜸을 들이고는 외쳤다.
“F열! 8번 관객님!”
그러자 앞쪽에서 한 남자가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선다. 얼마나 크게 소리를 질렀는지, 상영관 안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오. 축하드립니다. 일행분하고 같이 앞으로 나오시고요. 자, 그다음에는 문창환 배우님께서 뽑아주실까요?”
문창환 배우가 두 번째 추첨번호를 뽑았고, 이번에는 우리 뒤쪽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MC가 일부러 그렇게 의도한 건지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고마음이 추첨함에 다가서자 사람들의 긴장도가 잔뜩 올라갔다.
“자, 감사합니다. 고마음 배우님께서 뽑아주신 마지막 행운의 주인공이 제 손에 있는데요. 이번에는 먼저 자리부터 말씀드리면….”
그렇게 또 뜸을 들이고는.
“13번 좌석입니다!”
그렇게 외치자 13번 열에 앉은 사람들과 그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오빠, 13번! 저 13번!”
자기 번호를 확인한 지연이도 들뜬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다.
지연이 앞뒤로 앉아 있던 사람들도 같이 온 사람들에게 자기가 13번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 13번에 어느 분이 앉아 계신지 볼까요? 앞에 어머님 계시네요. 어머님, 누구랑 오셨어요? 아? 따님? 자매인 줄 알았어요.”
MC는 바로 당첨자를 발표할 생각이 없는지, 그렇게 또 이야기를 이어간다.
“오, D열에는 훈남분이 계시네요. 옆에 계신 분은 여자친구? 아, 동생? 아니, 이런 영화를 동생하고 오시면 어떻게 합니까? 다음번에는 꼭 여자친구분이랑 오시고. 아, 저기에는 되게 예쁜 분도 오셨네요. K열인가요? 안녕하세요? 혹시 배우님은 아니시죠? 우리 영화 얼마나 잘 만들어졌는지 염탐하러 오신 거 아니시죠?”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K열 13번, 우리 지연이에게로 향한다.
지연이는 갑작스럽게 시선이 집중되자 얼굴이 빨개지면서 고개를 푹 숙인다.
“자, 볼까요? 어느 분이 행운의 당첨자가 되셨는지. 당첨자는 B열! 어머님! 축하드립니다.”
맨 처음 딸이랑 왔다는 어머님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번쩍 만세를 부르고,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휴. 식겁했네. 아니, 식겁할 이유도 없지만….
그렇게 사진 촬영 이벤트까지 끝나자, 마무리 인사와 함께 배우들이 퇴장했다.
나와 지연이는 사람들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자리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아, 아쉽다.”
지연이가 조금 전 배우들이 서 있는 스크린 쪽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한다.
“아쉬워?”
“네. 아쉽죠. 배우들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기횐데.”
“아까는 부끄러워하더니.”
“아, 그건 좀 부끄러웠어요.”
“어쩔 수 없어.”
“네? 뭐가요?”
“지연이 네가 너무 예뻐서 사람들 시선 끄는 건 어쩔 수가 없다구요.”
내가 그렇게 말해주자 지연이는 내 팔을 찰싹 때린다.
“자, 우리도 슬슬 나갈까?”
내가 지연이에게 그렇게 말했다.
“네. 배고파요.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그래. 맛있는 거 사 줄게. 뭐 먹고 싶은데?”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저기, 실례합니다.”
어느새 우리 쪽으로 다가온 어떤 남자가 말을 건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나도 지연이도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데,
“안녕하세요, 저 이상한 사람 아니고, 이번 영화 제작한 제작사 직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시선 끝에는 지연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