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
***
“오빠들 안녕하세요?”
어느새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온 민주가 그렇게 인사한다.
“오! 민주. 오랜만이네. 앉아. 앉아.”
역시 여자와 관련해서는 가장 재빠른 중훈이가 그렇게 민주를 반겨준다.
우리도 다들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민주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지만, 솔직히 좀 놀란 것도 사실이었다. 민주가 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물론 민주도 우리 후배고, 지연이랑 민주랑 동기니까 뭐 불러낸다고 해서 크게 이상할 것이 없기는 한데….
없기는 하지만 민주는 좀 쌩뚱맞기는 하지?
“저녁 먹었어?”
찬희가 물었다.
“네. 저녁 먹었어요.”
“그래도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뭐 시켜줄까?”
“괜찮아요. 그냥 있는 거 먹으면 되죠.”
“아니야. 어차피 안주 하나 더 시키려고 하던 참이었어.”
그러면서 테이블이 갑자기 찾아온 새 손님 맞이에 분주하다.
나는 그 틈을 타서 지연이에게 재빨리 입 모양으로 물었다.
‘누구?’
***
친구, 적 그리고 별 관심 없는 사람. 이렇게 단순한 분류법을 가진 남자들과는 달리, 여자들 사이에 친구라는 관념은 엄청나게 복잡하다.
진짜 친한 친구, A.K.A 베프, 친한 친구, 조금 덜 친한 친구, 친하지는 않지만 친해지고 싶은 친구, 친해질 가능성이 있는 친구, 만나면 친한 척하는 친구, 웃으며 인사 정도는 하는 친구. 뭐 아무튼 이렇게 복잡하다.
예전에 지연이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민주는 어느 정도 친한 친구냐고. 그때 지연이의 대답이 ‘적당히 친한 친구’라고 했다. 그 말은? ‘친하지는 않지만…’ 범주에 들어간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민주를 불렀다? 무언가 목적이 있다는 이야기다.
아, 물론 그사이에 지연이와 민주가 친한 사이가 되었을 수도 있겠지. 그럴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갑자기 이 자리에 민주를 부른다? 아무래도 조금 이상하다.
그렇다면?
목적이 있다는 이야기다. 지연이가 아니라, 민주가 이 자리에 어떠한 목적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지연이는 그 목적 달성을 돕기 위한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고.
자, 그렇다면 민주의 목적이 무엇이겠는가?
뭐 하나밖에 없다. 우리 멤버 중에서 누군가에게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잖아. 민주가 우리에게 뭐 ‘제가 좋은 알바 자리 하나 소개해드릴까요? 네트워크 마케팅이라고 하는 건데….’ 같은 소릴 하지는 않을 테고, ‘교회 좋아하세요?’라든가, ‘조상님의 좋은 기운이 느껴지네요.’ 같은 전도를 하지도 않을 테고.
그렇다면 우리 중에 누군가에게 관심이 있다는 가설이 제일 가능성이 높다. 지연이가 그 사실을 알게 됐는데, 마침 이런 자리가 생기자 지연이가 민주를 도와주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내가 지연이에게 ‘누구?’라고 물어본 거다.
지연이는 말없이 웃기만 한다. 부정하지 않는 것을 보니 내 가설이 맞기는 맞는가 보다. 하지만 대답해주지는 않는다.
누구지? 이따가 지연이를 집에 데려다주면서 취조하면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민주를 바라보았다.
“민주 어디서 온 거야?”
내가 물었다.
“아, 집에서 왔어요.”
“집에 있다가?”
“네. 얼마 안 멀어요.”
“집이 어딘데?”
“목동이요.”
먼데? 목동에서 신림, 절대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닌데?
아니, 거리도 거리지만, 지금 민주는 완전무장 상태다. 지금 이대로 소개팅에 나가도 전혀 문제 될 것 없을 정도로 풀 메이크업에 풀 착장이다.
그 말은? 준비할 시간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친구 놈들의 등장을 확인한 지연이가 오늘 술자리가 있을 거라고 예상을 했고, 민주에게 그런 내용의 문자를 보낸 뒤, 민주가 바로 완전무장 준비에 들어갔다. 뭐 이런 시나리오가 그려진다.
나는 다시 지연이를 바라봤다.
지연이는 ‘나는 아무것도 몰라용~’ 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
모르긴 뭘 몰라!
그나저나 누굴까? 민주가 관심을 보이는 상대가.
일단 두 사람은 제외. 나하고 찬희는 제외해도 되겠지.
만약 민주가 관심 있는 사람이 나라면? 지연이가 도와줄 리가 없다. 그렇겠지?
찬희도 마찬가지다. 여자친구가 있는데, 그 여자친구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연이도 친하게 지내는 최유라인데 지연이가 도와줄까?
우리 지연이는 그렇게 생각이 없는 사람은 아니지.
그렇다면, 남은 후보자는 셋, 이중훈, 김창회 그리고 박승환.
나는 재빨리 세 녀석을 슬쩍 살펴보았다.
정신적 고자 김창회야 여전히 아무런 표정이 없고, 박승환하고 이중훈은 ‘새로운 관객이 오셨으니 즐겁게 해드려야지!’ 모드로 열심히 개드립을 날리고 있고.
만약 베팅을 해야 한다면?
일단 이중훈을 제일 먼저 탈락시키자. 나쁜 녀석은 아닌데, 남자친구로서는 좀 부족한 부분이 있지.
그러면 김창회? 창회라… 뭐 독특한 남성미가 있다는 부분은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특유의 남성미가 20살 여대생에게 먹힐까? 그런 생각이 든다.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은 박승환.
흐음. 만약 돈을 걸어야 한다면,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을 한다면, 박승환 저 녀석이 가장 가능성이 높기는 한데… 그렇기는 한데! 감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
말려야지. 무조건 말려야지.
***
“그나저나 내일모레 다들 뭐 해? 별거 없으면 영화나 보러 가자.”
한창 즐겁게 놀고 있던 도중, 뜬금없이 이중훈이 그런 이야기를 꺼낸다.
“내일모레? 수요일?”
“어. 시간 괜찮아?”
“아니, 시간이야 괜찮은데, 갑자기 영화? 무슨 영화?”
찬희도 처음 듣는 이야기인 듯 그렇게 물어본다.
“인생 다섯 컷.”
중훈이가 영화 제목을 말한다.
그리고 나와 지연이의 눈이 마주친다.
〈인생 다섯 컷〉. 고마음이 여주인공으로 출연한 영화. 이번 주 수요일에 지연이와 보러 가기로 한 영화. 지난주 서현 씨하고 시사회에 다녀왔던 바로 그 영화.
“그거 고마음 나온 영화죠? 개봉했어요?”
민주가 묻는다.
“아니, 수요일에 개봉. 시사회 평 보니까 반응 좋더라고.”
중훈이가 말한다.
“기자님들이야 당연히 좋다고 하시겠지.”
“아니래. 진짜 잘 나왔대. 이번에 장난 아니라고 그러던데? 일반 시사회에서도 기립박수 터졌다고.”
박찬희가 그렇게 이중훈을 서포트한다.
“둘이 보러 가면 되겠네.”
박승환이 그렇게 말하자.
“난 유라랑 보러 갈 건데?”
박찬희가 그렇게 바로 배신을 때린다.
잠시 박찬희를 노려보던 이중훈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말한다.
“수요일 같이 보러 갈 사람. 내가 쏜다.”
이중훈, 저 자식 고마음 진짜 좋아하나 보다. 저렇게까지 할 놈이 아닌데.
“가야지. 중훈이가 쏜다면 가야지. 없는 시간 만들어서라도 가야지.”
박승환이 가장 먼저 손을 든다.
“수요일, 나도 괜찮아.”
창회도 동참한다.
“오빠, 저도 같이 가도 괜찮을까요?”
예상 못 한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한곳으로 모인다.
민주가 부끄러운 얼굴로 손을 들고 있다.
확실하네. 저 세 명 중 한 명이다.
“그럼! 민주가 간다면 팝콘도 쏜다.”
으이구, 이중훈 저 여자에 미쳐 집안 기둥뿌리 뽑아먹을 놈 같으니.
“지연이는?”
중훈이가 그렇게 묻자 사람들의 시선이 지연이에게 모인다.
“아, 죄송해요. 전 그날 약속이 있어요.”
있지, 나랑. 저녁에 강변에서 그 영화 보기로 했다고.
“한수는?”
나? 나는 당연히.
“나도 콜.”
그렇게 말하는 나를 지연이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내가 같이 가겠다고 할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해서 그런 거겠지.
하지만 나는 그런 지연이의 시선을 외면한 채 계속 중훈이에게 물어본다.
“예매할 거지? 늦어도 내일 오전 중으로 해야 할 텐데.”
“어. 해야지. 내일 오전에 하고 바로 알려줄게. 시간은 언제가 좋은데? 저녁으로 할까? 영화 보고 저녁 먹을까?”
“그럼 저녁은 내가 살게. 저번에 고마운 것도 있고.”
김창회가 말한다.
“그럼 제가 커피 살게요.”
민주가 그렇게 말하고.
“나는 그럼 영화 보고, 밥 먹고, 커피 마셔줄게.”
박승환이 이렇게 마무리를 짓는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영화 보는 일정이 만들어졌다.
***
갑작스러운 치맥 번개는 결국 새벽 2시를 넘기고서야 끝이 났다.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안주를 두 번이다 더 리필해가면서 엄청 먹고 마시고 떠들었네.
그래도 오랜만에 친구 놈들이랑 놀았더니, 즐거웠다.
민주는 중훈이가 데려다준다고 같이 갔고, 창회랑 찬희도 각자 택시를 탔고, 나는 지연이 데려다주고 집에 가려고 같이 교대역 쪽으로 가고 있다.
사실 효율로만 따진다면 그나마 같은 강북인 나랑 창회가 같이 택시를 타고, 강동인 찬희가 지연이를 내려주고 가는 게 가장 효율적인데, 자연스럽게 이렇게 나누어지네.
내 옆에 앉아 있는 지연이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창밖을 바라보는 표정이나 분위기가 지연이답지 않게 차갑다.
그 말인즉슨?
지금 삐져있다는 이야기다. 아니, 화났다는 것이 정확하겠지.
“유지연 씨?”
내가 슬쩍 지연이를 불렀다.
“네.”
지연이가 날 돌아본다.
자기 딴에는 ‘아무렇지 않음’이라는 표정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얼굴에 ‘나 화났음’이라고 선명하게 쓰여 있다.
나는 그런 지연이의 눈을 보며 말했다.
“지연 씨, 화났어요?”
지연이는 아무런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날 바라만 보고 있다.
이게 지금 다른 상황이었다면 답답해 미쳤을 거다.
아오. 진짜 여자들, ‘나 지금 화났음. 근데 왜 화났는지는 말 안 해줄 거임. 왜 화났는지도 모른단 말야? 그럼 정말 더 화남!’ 이러면 정말 사람 미치는 거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전혀 답답하지도, 당황하지도 않고 있다.
지연이가 왜 화가 났는지, 그리고 어떻게 풀어줘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거든.
“2500년 전에 손자님께서 그러셨어요.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고.”
내가 말했다.
지연이의 눈에 물음표가 떠오른다. 지금 저게 무슨 쌩뚱맞은 말인가 싶겠지.
“내일 오전에 중훈이에게 물어볼 거야. 예매 어디로 할 거냐? 만약에 내가 같이 영화 보는 멤버가 아니었다면? 예매를 어디서 할지 물어볼 이유가 없지, 명분도 없고. 하지만 나도 멤버라면? 당당하게 물어볼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렇죠? 자, 중훈이는 어디로 예매를 하려고 할까? 그 녀석 집이 일산이니까 그쪽에서 하자고 할까? 만약에 민주가 없었다면 무조건 일산을 고집했을 수도 있지. 하!지!만! 민주도 간다고 했으니까, 우리 호구 이중훈 선생께서는 일산을 고집할 수는 없을 거야. 자, 그러면 다음 후보지는 어디일까요? 용산? 홍대? 영등포? 강남?”
지연이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이제야 이 오빠의 깊은 뜻을 알아챘군요.
“뭐 어디든 상관없겠지, 강변만 아니면. 그렇죠?”
“…네.”
“예매가 끝나. 강변이 아니라는 게 확실해졌어. 그러면? 미안하다. 못 가게 되었다. 내 거는 취소해줘라. 나중에 밥 살게. 툴툴거리긴 하겠지만 내가 빠진다고 해서 크게 문제 될 건 없겠지? 그리고 문제가 된다고 해도 지가 어쩌겠어? 아무튼, 그렇게 정리가 되면? 그 팀은 자기네끼리 예매한 데 가서 영화 보고. 우리는 우리끼리 강변 가서 영화 보고. 모두가 해피 투게더 포에버 되는 거죠. 자, 다시 한번 따라 해볼까요?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살짝 놀란 표정으로 ‘아.’ 하는 표정을 짓던 유지연은 갑자기 고개를 숙인다.
“유지연 씨이? 화났어요오?”
내가 다시 물었다.
고개 숙이고 있던 지연이가 작게 뭐라고 속삭인다. ‘죄송해요.’처럼 들린다.
“자, 빨리 칭찬해줘. ‘오빠는 계획이 다 있구나’ 그렇게 칭찬하라고.”
내가 지연이의 어깨를 살짝 밀면서 그렇게 놀렸다.
“…미리 이야기해 주시지.”
“그 상황에서 어떻게 이야기해. 알잖아. 그놈들, 조금만 틈을 보이면 바로 파고들었을걸? 특히 박승환 그 자식.”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제서야 지연이는 살짝 웃는다.
거봐. 웃으니까 얼마나 예뻐.
“그나저나 실망인데, 설마 내가 약속을 까먹었을까 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지연 씨와의 약속을? 날 못 믿는구나?”
“아니요. 못 믿은 건 아닌데….”
“아닌데?”
“아니에요. 죄송해요.”
그러면서 또 고개 푹 숙인다.
귀여워. 역시 후배는 놀리는 맛이야.
“아무튼 그건 그거고, 누군데?”
“네?”
“민주. 누굴 노리고 있는 건데?”
분위기도 전환할 겸 해서 내가 물었다.
지연이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하더니 날 바라본다.
“고향에 계신 할아버지에게 맹세합니다. 절대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어.”
미안해. 지연아. 사실 우리 할아버지를 걸고 하는 맹세, 그렇게 대단한 거 아니야.
하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지연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럽게 말한다.
“중훈 선배요.”
이렇게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