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 가스라이팅
목요일에 비해 월요일이 한가하다고 해도 퇴근 시간은 퇴근 시간이다.
시침이 6이라는 숫자에 도달하는 것과 동시에 손님 수가 눈에 띄게 확 늘어난다.
일단 포스기는 내가 잡고 있다. 우리 지연이가 아무리 똘똘이 스머프라고 해도 오후 피크타임인 6시에 포스기를 맡기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다.
대신 옆에서 내가 하는 모습을 열심히 지켜보고 있다.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가끔 보면 평소에 잘하는 일들도 누군가 옆에서 지켜보면 긴장하고, 실수하고 그런 사람들이 있다.
뭐 이해 못 하는 건 아닌데, 나는 그런 상황을 부담스러워하는 부류의 사람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누군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좀 더 잘하는 편이다.
내가 관심종자라서 그런 것은 아니고, 뭐랄까? 조금 더 집중하게 된다고 할까?
사실 그렇다. 실수라는 게 정신줄을 놓고 있어서 발생하는 거다. 아니, 뭐,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일도 아니고, 정해진 절차에 따라 딱딱 진행하면 되는 건데 그게 뭐가 어려워?
자. 봐봐. 포스기는 피아노야. 내 유려한 손가락에 움직임에 따라 주문이라는 음악을 만들어내는 악기라고 할 수….
“저기… 주문 잘못 들어간 것 같은데요?”
앞에 서 있는 손님이 말한다.
“네?”
“디카페인으로 해달라고 말씀드렸는데.”
“앗! 죄송합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재빨리 주문을 수정했다.
아나, 이거. 체면 구기는데?
***
신입 알바에게 가장 중요한 업무가 무엇이냐 물어본다면, 나는 주저 없이 설거지라고 말할 것이다. 특별한 기술 필요 없고 크게 실수할 일도 없고. 그리고 내가 하기는 싫고.
우리 지연이가 아무리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해도 카페 알바의 길을 선택한 순간 설거지옥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
그래도 오늘은 다행인 것이, 그렇게 설거지할 게 많지는 않다. 설거지옥까지는 아니다.
“할 만해?”
고무장갑을 끼고 열심히 설거지를 하고 있는 지연이에게 다가가 슬쩍 물어보았다.
“넵. 문제없습니닷!”
지연이는 무슨 군인이라도 된 것처럼 그렇게 대답하면서 열심히 손을 놀린다.
얘 봐라. 누가 보면 내가 막 갈구고 텃세 부리고 그런 줄 알겠다.
“근데 오빠.”
“응?”
“점장 언니랑 친해요?”
지연이가 열심히 손을 놀리며 그렇게 물어본다.
“점장 누나?”
“네.”
“어. 뭐, 친한… 편이지?”
“친한 편?”
“친해. 뭐, 아무래도 1년 넘게 같이 일했으니까.”
“그렇구나.”
“왜?”
“아니요. 그냥.”
“그냥?”
“오빠를 많이 아낀다는 느낌을 받아서요.”
뭐야? 이 녀석, 점장 누나랑 면접 보면서 무슨 이상한 이야기라도 들은 건가?
“그나저나 오빠 주위에는 유독 예쁜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지연이가 그렇게 말한다.
“응?”
“서현 언니도 그렇고, 점장 언니도 그렇고, 지수 선배도 그렇고.”
그렇게 말하는 지연이의 손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시선도 싱크대에 컵을 향해 있다.
행동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고, 그냥 일하면서 잡담하는 듯한 그런 분위기인데, 뉘앙스는 또 그게 아니다.
이럴 때는 뭐다?
칭찬이다.
“너도 있고.”
“네?”
“내 주위에 있는 예쁜 사람 이야기할 때는 유지연 씨를 빼놓으면 안 되지용.”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지연이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우리 지연이 할 만한가 보네? 이상한 이야기 하는 거 보니까. 더 정신없이 만들어줘야 되겠는데? 얼른 그거 마무리하고, 마감 준비합시다. 카페 알바의 꽃은 마감이라고 할 수 있지.”
“꽃이요?”
“응. 할 게 엄청 많거든.”
“많은데 왜 꽃이에요?”
“라플레시아거든. 엄청 크고, 징그럽고, 썩은 냄새 나고.”
내 말에 지연이가 쿡 하고 웃는다.
확실히 이 녀석 웃음 코드는 좀 이상해.
“얼른 마감하고 치킨이나 때리러 가자. 오늘 첫 출근 기념으로 내가 쏜다. 약속 없지?”
“넵. 없습니다!”
“좋아. 유지연 이병! 재빨리 설거지를 마무리할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한수 대장님!”
후후후. 귀여운 녀석.
그렇게 이상해질 것 같은 분위기를 잘 마무리해놓고 뒤를 돌아보는데, 문이 열리고 손님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이런, 마감 준비해야 하는데 갑자기 손님이라니. 전혀 반갑지 않지만 본능적으로 인사가 튀어나온다.
“환영합니다…아?”
하지만 제대로 된 인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카페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네 사람은 내가 아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이중훈, 박찬희, 김창회, 그리고 박승환이었다.
***
열심히 설거지를 하고 있는 지연이를 바라보던 이중훈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한다.
“도대체… 얼마나 더 지연이를 괴롭혀야 속이 시원하겠냐?”
당장 나를 씹어 먹겠다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그렇게 말한다.
“괴롭히기는 누가 괴롭혀! 임마! 나도 오늘 알았다니까!”
내가 그렇게 항변했지만 받아들일 놈들이 아니다.
“형법 288조 2항. 노동력 착취, 성매매와 성적 착취, 장기 적출을 목적으로 사람을 약취 또는 유인한 사람은 2년 이상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박승환이 그렇게 헛소리, 아니 개소리를 한다.
“그건 좀 심했다. 약취유인까지는 아니고 가스라이팅 정도? 가스라이팅은 어떻게 처벌하지?”
이건 박찬희.
“아쉽게도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가스라이팅을 범죄로 규정하는 법 조항이 없지. 법적으로 처벌을 하려면 육체적, 정신적으로 실질적인 피해가 있어야 하거든. 아니면 재산상의 피해를 보았거나. 뭐 억지로 만들려면 만들 수는 있을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약취유인보다는 처벌 수위가 낮으니까 그냥 약취유인으로 하자.”
박승환이 그렇게 말하자, ‘그래. 그게 좋겠다.’라든가, ‘15년 보내버리자.’ 같은 소리를 하면서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아오, 미친놈들. 진짜, 이런 놈들을 친구라고.
“그런 미친 소리 할 거면 당장 꺼져, 영업방해로 신고하기 전에. 그나저나 갑자기 어쩐 일이야?”
심심하다고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던 이중훈은 결국 친구 놈들을 불러냈고, 어쩌다 보니 다들 모였고, 그렇게 모여서 뭐 재미있는 거 없나? 그런 고민을 하다가 나를 괴롭히는 것이 가장 재미있겠다고 의견을 모았고, 마감 한 시간 전에 가서 깽판을 치고, 마감이 끝나면 날 납치해서 치맥이나 먹겠다. 뭐 그런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깽판을 치겠다고 카페로 들이닥쳤는데, 안쪽에서 열심히 설거지를 하고 있는 지연이를 보게 된 거고.
“이제 마감 시간이다. 정리하고 가면 끝나는데, 니들이 쳐들어오는 바람에 지연이 일이 더 늘어나게 되었다 이 말이지. 오케이?. 진정으로 후배를 아끼는 마음이 있다면 당장 사라져라. 그리고 앞으로 여기는 얼씬도 하지 말고.”
내가 그렇게 말했지만, 그런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놈들이 아니다.
“오빠, 설거지 끝났어요. 이제 마감 시작하는 거죠?”
카운터 안쪽에서 지연이가 그렇게 말하자 나는 녀석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어. 머신하고 바리스타존 정리는 내가 할 거야. 지연이 너는 일반 분리수거하고, 화장실 청소하고, 테이블 전부 다 닦고, 야외 테이블 정리.”
자, 어쩔 거냐? 가련한 니네 지연이가 힘들게 마감하는 동안 여기 앉아서 깽판을 치고 계실 수 있겠어?
***
내 카페 알바 인생에서 가장 편한 마감이었다.
공짜 SCV가 넷이나 있으니 분리수거도, 화장실 청소도 순식간에 끝나 버리네.
바리스타존 청소하고 포스기 마감까지 전부 다 끝내고, 우리는 근처 치킨집으로 갔다. 알바 끝나면 점장 누나랑 병진이 형이랑 가끔 치맥 하는 곳이다.
마음 같아서는 다른 놈들은 다 꺼지라고 하고 지연이만 데려가고 싶은데, 우리 마음 착한 유지연 씨는 저런 것들도 선배라고 또 만나니 반갑고 좋단다.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오늘은 더치페이다. 업계용어로 복합결제다. 니들 치킨 사줄 돈은 없다.
“근데 저 누구 한 명 더 불러도 될까요?”
자리에 앉은 지연이가 그렇게 물어본다.
“누구? 남자는 안 되는데.”
박찬희가 재빨리 그렇게 말한다.
아니, 여자 친구도 있는 놈이 갑자기 무슨 남자 타령이야? 최유라에게 다 일러야지.
“남자 아니에요. 여자.”
“예뻐?”
“넵.”
“얼마나?”
“아주요.”
그랬더니 정신적 고자 김창회를 제외한 녀석들 얼굴에 웃음이 피어오른다.
“그래. 그럼 불러.”
“넵!”
지연이는 그렇게 말하고 열심히 핸드폰을 만진다. 깨톡 보내나 보다.
종류별로 주문한 치킨 세 마리와 골뱅이소면, 그리고 각자 앞에 놓인 맥주 500cc. 이중훈만 차 가지고 왔다고 콜라.
시끄러운 가게 안 대신, 밖에 놓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는데, 아직은 그렇게 덥지 않은 여름밤과 오랜만에, 아니, 뭐 그렇게 오랜만은 아니지만, 아무튼 방학하고 처음 친구들과 나누는 쓸데없는 이야기가 좋다. 솔직히 즐겁다.
여기저기서 개드립이 빵빵 터지고, 지연이는 자지러지고, 치킨은 맛있고, 맥주는 시원하고.
“그나저나 최유라는 어쩌고 너 혼자 여기에 와 있냐?”
나는 열심히 치킨을 뜯고 있는 박찬희에게 물었다.
“과외. 지금쯤 끝났을 것 같은데?”
찬희가 말한다.
“그래? 불러. 오라고 해.”
“안 그래도 끝나면 올 거냐고 물어봤는데 피곤하대.”
“최유라도 나이 먹었어. 옛날 같으면 냉큼 달려왔을 텐데.”
이중훈이 그렇게 말하자 박찬희가 이중훈을 째려본다.
“작년에 유라 언니랑 같이 속초에 놀러 가셨었다면서요?”
지연이가 그렇게 대화에 끼어든다.
“어. 어떻게 알았어?”
“들었어요.”
녀석들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그 눈빛에 그런 의미가 담겨있다. ‘지수가 같이 간 것도 알고 있어?’ 뭐 그런 눈빛이다.
짜식들. 그래도 친구라고 말 맞춰주려는지, 그렇게 눈빛을 교환한다.
“올해는 그런 계획 없으세요? 다 같이 놀러 갈 그런 계획.”
지연이가 물어본다.
“아니. 그런 이야기해 본 적 없는데? 이야기 나온 김에, 올해도 어디 놀러나 갈까?”
찬희가 그렇게 이야기를 받는다.
“시간 맞출 수 있겠어?”
중훈이가 말한다.
“맞추면 맞추지. 정 안 되면 되는 사람만 가고.”
“에이. 그래도 갈 거면 다 같이 가야지.”
“그래. 다 같이 가는 게 좋지.”
그렇게 의견들이 나온다.
“텐트는 싫어.”
내가 말했다.
“작년에 기억 안 나? 아오, 난 창회 저 자식에게 깔려 죽는 줄 알았다니까. 텐트 칠 거면 난 안 가.”
“한수 저 자식은 누가 보면 엄청 귀하게 큰 줄 알겠어.”
“그럼 한수는 빼고. 지연이는 갈 거지?”
“넵.”
지연이가 손을 번쩍 들며 말한다.
“텐트도 괜찮지?”
“네! 괜찮아요. 아니, 텐트에서 꼭 자보고 싶어요.”
“유라도 가겠지?”
“시간만 맞으면 갈? 가끔 그때 이야기해. 재밌었다고.”
“오케이. 그럼 한수 빼고 작년이랑 같은 멤버로. 어디로 갈까? 이번에는 속초 말고 다른 데로 갈까?”
그렇게 이야기가 착착 진행된다.
으이구. 이 자식들, 아주 신났구만.
그렇게 한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지연이가 핸드폰을 확인하더니 말한다.
“거의 왔대요.”
그러면서 지하철역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다.
자연스럽게 우리도 고개를 돌려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어?”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찬희였다.
우리를 발견하고, 저 멀리서 손을 흔들며 오는 사람은….
우리 후배, 인간계 최강 박민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