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 투자자 시사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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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느끼남, 아니, 이번 시사회의 호스트인 제작사 대표는 몇몇 사람을 불러 서현 씨에게 인사를 시켰다. 이번 영화의 감독과 피디, 그리고 몇몇 관계자들인 것 같았다.
서현 씨도 처음 보는 사람들인 것 같은데,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재벌 3세의 아우라가 있다.
나는 한 발짝 떨어져서 ‘나에게는 굳이 인사할 필요 없습니다’라는 포지션을 취했고, 다행스럽게도 나에게 인사를 건네거나, 나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은 더는 없었다.
장 대표라는 사람이 나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을 보았고, 서현 씨가 귓속말로 대답하는 것도 보았으니, 또 물어보기는 좀 그런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 같았다.
나는 상관없다. 오히려 덜 귀찮으니 더 좋을지도.
하지만 궁금하기는 하다. 장 대표라는 저 중년느끼남이 놀라는 걸 보면 분명 뭐가 있기는 한 것 같은데….
궁금하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나중에 물어보면 되겠지.
아무튼, 그렇게 내 정체에 대해서는 어물쩍 넘어갔는데 서현 씨는 그럴 수가 없었다.
영화 관계자와의 인사가 끝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서현 씨에게 다가와서 인사를 건네고 있다.
자, 이럴 때 내가 취해야 하는 행동은?
괜찮다고, 이야기하고 오시라고 놓아주는 거다.
괜히, ‘어? 나 서현 씨만 믿고 여기까지 왔는데? 서현 씨가 나랑 안 놀아 주면 나는 완전 왕따 되는데? 그러니까 서현 씨는 나랑 놀아줘야 함!’ 그래봤자 나만 찌질한 놈 되는 거다.
다녀오세요. 저는 혼자서도 잘 놀 수 있어요. 한국말 못하는 중국 재벌 막내아들 흉내 내면서 자연스럽게 있을게요.
눈빛으로 그렇게 말해주고, 나는 로비를 어슬렁거렸다.
테이블에 세팅되어 있는 핑거푸드도 집어 먹고, 비싸 보이는 음료수도 마시고, 책장에 꽂혀있는 가짜 책도 살펴보고, 시간당 백만 원짜리 영화관 화장실은 어떻게 생겼나 구경도 하고 그러면서 적당히 시간을 보냈다.
다행인 것이 처음 나에게 관심을 보이던 사람들도 금세 흥미를 잃어버렸는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자연스럽게 로비를 어슬렁거리며, 나중에 박찬희와 이중훈 그 두 녀석에게 어떻게 잘난 척을 할 것인지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있었다.
속으로 ‘익숙하다. 나는 이런 장소에 익숙하다. 여유롭다. 아주 자연스럽다.’ 그렇게 되뇌며 두 번째 음료를 리필하려는 그 순간.
뒤통수가 간질간질한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그냥 바라보는 것도 아니고 주시하고 있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뒤통수가 근질근질하다고 바로 ‘누구야! 누가 날 꼬라보는데!’ 하며 두리번거리면 그건 하수의 행동. 나는 자연스럽게 새 음료수를 받아 들고 나서 천천히 시선을 움직여 범인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로비 한가운데 놓여있는 소파를 중심으로 나와는 반대편에 서 있는 한 사람.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미소를 짓는 한 사람.
오늘 영화의 주연 여배우, 고마음이었다.
***
시간당 백만 원짜리 상영관 아니랄까 봐, 대단하긴 대단하다.
40명 정도가 들어설 수 있는 상영관 안에는 일반 극장에서 볼 수 있는 의자 대신 가죽 소파가 놓여 있다. 그냥 가죽 소파도 아니고 리클라이닝 기능이 있는 그런 고급 소파다.
가장 좋은 자리라고 할 수 있는 상영관 한가운데 소파에 나와 서현 씨가 나란히 앉아 있다.
가장 많은 돈을 투자한 투자자님께는 가장 좋은 자리를 드린다. 뭐 그런 자본주의 논리가 작용했나 보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상영을 기다리고 있다.
드디어 단둘이, 아니, 단둘은 아니지만. 아무튼 이제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내가 재빨리 서현 씨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도대체 뭐라고 한 거예요?’
똑똑한 서현 씨가 단번에 내 질문을 파악한다.
‘조금 전 한수 씨 소개요?’
‘네.’
그러자, 서현 씨는.
‘비밀이에요.’
이러고는 웃기만 한다.
아니, 그러니 더 궁금하잖아요!
우리 서현 씨가 ‘제 몸종이에요.’ 같은 말을 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랬다면 느끼제작자 양반이 나에게 보낸 적의가 설명이 안 되지.
분명 뭔가 좋은 쪽의 이야기를 해 줬을 것 같은데, 그랬을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떤 말을 했을지 전혀 감이 잡히질 않는단 말이지.
아휴. 이 심술쟁이 아가씨 같으니.
어떻게 해야 우리 서현 씨로부터 진실을 알아낼 수 있을까? 역시 그 방법뿐인가? 사랑의 몽둥이로 기냥….
그런 19금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처음 인사를 나눴던 느끼제작자 아저씨가 스크린 앞에 선다.
마이크를 들고서 오늘 찾아와줘서 고맙다. 심혈을 기울여 만든 우리 영화, 내부적으로 무조건 대박이라고 보고 있다. 투자자님들의 소중한 돈 받아다 허튼 데 쓰지 않았으니 직접 확인해주시면 좋겠다는 뭐 그런 이야기를 하고, 같이 무대 위로 올라온 제작 스태프와 출연진을 소개했다.
마이크를 이어받은 감독과 피디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고, 이어서 배우진에게 마이크가 넘어간다.
고마음은 배우 중 두 번째로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윤혜연을 연기한 고마음입니다. 지난 두 계절 동안 많은 배우와 스태프들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 노력의 일부분이라도 전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인사하는 고마음의 목소리가 상영관 안에 물결친다.
왜, 그런 경우 있잖아. 그 목소리가 주는 그런 특유의 분위기. 예를 들어, 모르는 사람의 목소리만 들었을 경우, ‘아, 이 사람은 이런 인상이겠구나.’ 하고 이미지가 떠오르잖아?
그런데 막상 목소리의 주인을 만났을 때, 목소리와는 좀 다르구나. 그렇게 살짝 실망하는 경우가 있잖아?
고마음을 모르는 누군가가 고마음의 목소리를 듣고,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하고 상상했다면, 상상 속의 얼굴을 그대로 보게 되는 기적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녀의 얼굴,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분위기, 모두가 하나의 이미지를 형상화한다.
마치, 절대로 어긋나는 피스가 없는 직소 퍼즐처럼, 그녀의 목소리는 그녀가 가진 아련한 슬픔을 그대로 들려준다.
화면상의 고마음을 보고서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렇게 직접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으니, 고마음이 왜 대체 불가 여배우인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투자자들이 고마음이라는 세 글자에 투자를 주저하지 않는지도 알 것 같고.
“진짜 예쁘네요.”
서현 씨가 그렇게 속삭인다.
‘서현 씨가 더 예뻐요.’ 같은 말을 해야 하는 타이밍이었지만, 잔상처럼 남아 있는 고마음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그렇게 짧은 인사를 마치고, 옆 사람에게 마이크를 건넨 고마음은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이 어쩐지 나를 향하고 있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착각이겠지?
***
영화가 끝나고 스태프 롤이 올라가는 것과 동시에 상영관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시사회의 전통인지는 모르겠지만, 약 40명의 관람객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고 있었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좋은 영화였다. 훌륭한 영화였다. 가슴 속까지 깊숙하게 스며드는 별 다섯 개 명작까지는 아니라는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지만, 분명 훌륭한 영화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일단 배우들의 연기가 너무 좋았다. 국민 아버지라고 불리는 김두영 배우는 50년이라는 연기경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겠다는 듯 훌륭한 아버지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동안 조연 배우급으로 주로 활동하던 문창환 배우도 이번 영화를 통해서 단번에 주연급 남자배우 리스트에 이름을 올릴 거다.
무엇보다 주연 여배우 고마음. 진짜. 그 슬픔이 배어 나오는 그 특유의 분위기는….
어느 영화 평론가가 그랬다. 고마음도 연기 변신을 고민해봐야 한다고, 언제까지 특유의 이미지만 고수해서는 안 된다고. 배우에게 있어서 이미지 고착은 독이 든 성배라고.
이번 영화는 그런 평론에 대한 대답 같았다.
고마음은 그냥 고마음이다. 그녀에게 이미지 변신 같은 건 필요 없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어떠셨어요?”
내 옆에서 박수를 치던 서현 씨가 물어본다.
“손익분기점은 걱정 안 해도 되겠는데요?”
내 말에 서현 씨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서현 씨는요?”
내 말에 서현 씨는 작게 웃고는.
“투자자로서요? 아니면 개인으로서요?”
그렇게 되묻는다.
“달라요?”
“달라요.”
“투자자 입장에서는요?”
“고마음 차기작에는 무조건 투자해야 되겠다.”
“…개인적으로는요?”
“한수 씨를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서현 씨는 그렇게 말하고 작게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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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파티라고 해도 특별한 것은 없었다. 시사회 전에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 나누는 것하고 크게 차이가 없었다.
음식이 조금 더 좋아지고, 술이 깔려있다는 정도? 술이라고 해도 샴페인 정도지만.
하지만 분위기는 확실히 다르다. 영화가 성공할 거라는 확신이 들어서인지, 관계자도 투자자도 목소리가 한 톤씩 올라가 있다.
특히 느끼제작자 양반은 뭐가 그리 좋은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리고 있다. 투자자들도 이번에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을 했는지, 다들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의 중심에는 고마음이 있었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고마음에게 다가가서 한 마디라도 붙이고 싶어서 안달이 난 듯 보였다.
시사회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연출부는 연출부끼리, 배우들은 배우들끼리, 투자자들은 투자자들끼리 그렇게 각자 모여서 지들끼리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작품을 보고 나니 고마음이 얼마나 대단한 배우인지, 자기들에게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다 줄지를 확실히 인지하게 된 것 같다.
뭐 고마음이 창출할 수 있는 부가가치가 얼마나 되는지는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나도 가서 말 붙여보고 싶다.
어디 쓸데도 없는 사인 같은 건 필요 없고, 나중에 친구 놈들에게 자랑질할 수 있게 사진이나 찍어달라고 하고는 싶은데, 그런 말을 하자니 민망하다.
아니, 뭐 다음에 또 볼 사이도 아니고, 그냥 철판 깔고 말해버리면 되는데, 옆에 서현 씨가 있으니 모냥 빠지게 그럴 수는 없지.
안 그래도 ‘그런 이야기’까지 들었는데 말야.
서현 씨는 지금도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슬쩍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결국 돈과 사업 이야긴데, 비서실 대리 직급의 서현 씨가 결정할 일이 별로 없을 것 같기는 한데, 그런데도 다들 서현 씨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느끼제작사 대표는 ‘서현 씨는 혹시 배우 할 생각 없어요?’ 같은 헛소리를 하고 있고.
나는 한국말 못하는 중국 재벌 막내아들처럼 한쪽 구석에서 ‘뭐 영화는 괜찮네. 하지만 내가 먼저 가서 와~ 영화 진짜 끝내줬어요, 라고 호들갑 떨지는 않을 거야’ 모드로 조용히 샴페인이나 홀짝이고 있었다.
그렇게 한 20여 분 정도 지났을 때, 서현 씨가 미안한 얼굴로 나에게 다가온다.
“미안해요. 심심했죠?”
사실 좀 심심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아니요. 저는 괜찮으니, 편하게 일 보셔도 돼요.”
“오빠에게 리스트를 받았거든요. 친한 척 인사드려야 하는 분들. 다 친한 척했으니 이제 끝났어요.”
서현 씨는 그렇게 말하고 예쁘게 웃는다.
“그러면 이제 가도 되는 건가요?”
“네. 가도 돼요. 많이 불편하셨죠?”
“아니요. 많이는 아니고 조금.”
내가 그렇게 말했지만, 어딘가 변명처럼 느껴진다.
“오늘 수고하셨어요. 미안해요. 오늘 괜히 제가 같이 오자고 해서.”
“미안하긴요. 덕분에 영화도 공짜로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비싼 샴페인도 마시고.”
그러면서 나는 손에 든 샴페인 잔을 살짝 들어 보였다. 이거 비싼 거 맞겠지?
“서현 씨는 뭣 좀 드셨어요? 계속 여기저기 끌려다니느라 뭐 드시지도 못하시는 것 같은데.”
내 말에 서현 씨가 작게 웃는다.
“한수 씨는요? 좀 드셨어요?”
“저는 여기서 저녁 다 먹었어요.”
“그럼 저도 먹을 것 좀 가져올게요.”
서현 씨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렇게 음식을 가지러 가는 서현 씨의 뒷모습 너머로 나는 누군가와 또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확신할 수 있었다.
고마음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