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180화 (180/271)

180 : 투자자 시사회 (1)

***

토요일 오후 3시.

나는 전신 거울 앞에 서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거울 안에는 마치 재단사가 직접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깔끔한 핏 라인을 그려내는 슬림핏 수트 블레이저 자켓을 입은 내가 서 있다.

어두운, 그렇지만 칙칙하지 않은 컬러의 수트 블레이저.

아저씨들이 입고 다니는 재킷과는 어딘가 좀 다르다. 그래서 안에 셔츠가 아닌 티셔츠를 입었음에도 어색하지 않고 잘 어울린다. 모델이 훌륭해서 그런가?

나는 몸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손가락으로 V 모양을 만들어 턱에 가져가 나름 멋진 표정을 한번 만들어본다.

괜찮은데? 나쁘지 않은데?

존재 자체가 반칙인 프린스만큼은 아니어도, 이 정도면 어디 가서 그래도 못났다는 이야기는 안 들을 것 같은데?

그렇게 잠시 좀 더 내 잘생김을 감상한 다음, 거실로 나갔다.

검사 받아야 하거든.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서현 씨가 내 모습을 보고 활짝 웃는다.

그 웃음을 보는데 뭔가 부끄럽다.

“역시 타이를 매는 게 좋을까요?”

괜히 부끄럽고 어색해서 그런 말을 해 본다.

“아니에요. 지금이 깔끔하고 좋아요. 그리고 그 정도로 격식을 차리는 자리는 아니에요.”

서현 씨는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다가와 옷매무새를 만져준다.

샴푸 향기가 내 코끝을 간지럽힌다.

“역시.”

“네?”

“잘 어울릴 줄 알았어요.”

서현 씨가 재킷을 매만지며 그렇게 말한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은 서현 씨가 준비한 옷이다. 이따가 투자자 시사회에 갈 때 입고 가라고 준비해 준 옷이다.

그럴 거라 생각은 했는데, 투자자 시사회라는 건 그냥 영화 보고 ‘잘 봤습니다. 그럼 빠빠이~’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파티 비슷한 걸 한단다.

뭐 파티라고 해서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거창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스탠딩 테이블 놔두고, 가벼운 음식 먹으면서 누가 왔는지 확인하고, 처음 본 사람하고는 명함 돌리고 하는 거라고.

물론 인사하는 데에서 끝이 아니고, 돈 이야기를 해야 해서, 그런 자리는 필수적이란다.

뭐, 아무튼. 중앙그룹을 대표하는 서현 씨도 당연히 그런 파티에 참석해야 하고, 그러면 몸종인 나도 당연히 따라가야 해서, 내가 입고 갈 옷을 서현 씨가 준비해온 거다.

처음 파티에 참석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턱시도 입고 드레스 입고, 막 그런 장면을 상상했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비즈니스 캐주얼이나 세미포멀 느낌만 주면 괜찮아요.”

비즈니스 캐주얼은 그렇다고 쳐도 세미포멀이 뭔지 나는 전혀 감도 못 잡겠지만, 아무튼 서현 씨가 준비해준 옷을 보내 대충 수트 버전의 ‘꾸안꾸’ 같은 건가 보다.

“괜찮네요. 그럼 일단 쉬고 계세요. 저도 빨리 준비할게요.”

서현 씨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말 잘 듣는 나는 그 복장 그대로 소파에 앉았다.

뭔가 몸에 핏이 쫙 달라붙는데, 그런데도 불편함이 없다.

신기하네. 이거, 처음 보는 브랜드였는데, 비싼 거겠지?

***

이미 예상했지만, 파티 복장을 갖춘 서현 씨는 역시 아름다웠다.

진짜 서현 씨가 반칙인 것이, 항상 아름답다. 그냥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그 상황에 맞게 아름답다.

지금처럼 여성성이 강조된 정장을 갖춰 입으면 여신 같다는 생각이 든다. 차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그렇다고 항상 그런 아우라가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회사 출근용 복장, 소위 오피스룩을 입은 서현 씨는 굉장히 관능적이다. 뭐랄까? 이런 말 하면 서현 씨에게 조금 미안하지만, 수영복 입은 것보다 오피스룩이 더 섹시한 느낌을 준달까? 서현 씨가 수영복 입은 모습을 아직 못 봐서 확신은 못 하겠지만, 그 성인 여성의 아름다움이 물씬 풍긴다.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서현 씨의 모습은? 예쁜 여대생. 그냥 예쁜 대학생도 아니고 아주 예쁜 대학생, 건강미가 철철 흘러넘치는 20대 초반의 상콤함 그 자체다.

좀 전에 거울 보면서, 이 정도면 어디 가서 꿀리지는 않겠지. 훗.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서현 씨를 보니, 나는 딱 몸종이네.

오늘은 조용히 닥치고 있어야지. 조용히 입 다물고 있으면 중국 재벌 막내아들 정도로는 보이겠지.

아무튼, 그렇게 준비를 마친 우리 두 사람은 회사에서 보내준 차를 타고 VIP 시사회장으로 출발했다.

***

난 영화를 꼭 영화관에 가서 봐야 한다는 주의는 아니다.

영화관의 빵빵한 사운드나, 눈에 가득 들어차는 거대한 스크린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대작 영화나, 같이 웃어주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웃기는 코미디 영화 같은 경우 영화관에서 보는 게 확실히 좋기는 하다. 그렇기는 하지만 꼭 영화관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치고는 작년에 영화관에 엄청 갔었더랬다.

지수랑 데이트하겠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서울에만 있는 신기한 영화관을 체험하겠다는 이유도 있었다.

알고는 있었다. 쉐프 뭐 어쩌구 하면서 밥도 주는 곳도 있고, 좌석이 침대처럼 되어 아예 누워서 영화를 보는 곳도 있고, 3면이 스크린으로 되어있는 곳도 서울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겉으로는야, ‘이래서 문제야. 서울에만 이런 문화시설이 다 집중되어 있고, 국토균형발전 마렵다.’ 같은 소리를 했지만, 솔직히 궁금했다.

궁금한 것도 있었고, 어차피 영화 보는 데 돈 조금 더 보태면… 조금이 아닌가? 아무튼 4DX 같은 경우는 놀이공원 어트랙션 탄다는 기분으로 열심히 다녔다.

아마 서울에 있는 신기한 영화관은 거의 다 가봤을 거다.

청담에 있는 시네마시티 빼고는 말이지.

청담에 ‘시네마시티’라는 영화관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는 있었다. 그런데 와 볼 기회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다지 마음이 가지 않았다.

일단 상영관 전체가 특별관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 청담동 영화관은 일반 예매가 불가능했다. 예매를 하려면 전용 어플을 사용해야 했다.

그 말은? 일반 예매도 안 되는데 현장 구매가 가능할 리가 없다. 즉석에서 영화를 결정하는 지수의 영화 고르는 방식과 맞지 않다는 이야기다.

뭐, 사실 꼭 가보고자 했다면 가볼 수는 있었겠지. 다른 상영관보다 조금 더 비싸다고는 해도, 그게 뭐 뮤지컬 VVVIP 자리처럼 몇십만 원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그래도 역시 무언가 마음에 안 들었달까? 뭔가 배알이 꼴렸다고나 할까?

‘여기는 청담동이니까, 다른 곳보다 좀 더 비싸. 주차도 무조건 발렛이고.’라고 하는 것 같은 그런 고압적인 분위기가 조금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랬는데, 지금 정장 비슷한 걸 입은 나는 서현 씨를 모시고, 바로 그 청담 시네마시티에 들어서고 있다.

이렇게 와보게 되네.

지하 주차장에 차가 멈추자, 멋진 신사분이 다가와 문을 열어준다. 차에서 내리자 엄청 예쁜 언니와 건장한 형님들이 다가와 에스코트를 해준다.

이거 엄청 부담되네. 아오, 나는 진짜, 본능적으로 이런 게 거북하다.

그나마 다행인 게 지하 주차장이라 주변에 사람들이 없다는 거.

만약 1층 영화관 입구에서 이런 상황을 맞았다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내리지 않았을 거다.

아무튼, 그렇게 엄청 예쁜 언니들과 건장한 형님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11층으로 올라가니 역시 예상치 못한 공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개방감이 느껴지는 높은 천장, 정갈하게 배치되어있는 소파와 가구들, 나무 바닥, 벽에 걸려있는 그림, 계단 옆 책장에 고풍스러운 책들.

상영관의 로비라기보다는 고급 저택의 응접실 같은 공간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청담 시네마시티 11층에 프라이빗 관이라는 특별한 공간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일반 상영관처럼 그때그때 상영작을 예매하는 곳이 아니라 통째로 대관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 대관비가 시간당 백만 원, 대관하는 데 최소 4시간. 4백만 원이 들어간다고.

시골 촌놈인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지수가 이야기해 줬었다. 친척 언니가 여기에서 프러포즈를 받았다면서 말이지.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자기도 거기서 프러포즈를 해달란 말인가?’ 그렇게 생각했었지.

4백만 원이면 차라리 그 돈을 현찰로 주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기대해.” 그렇게 허세를 부렸었더랬다.

뭐 이제 와서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이지만.

아무튼, 공교롭게도 그곳에 내가 와 있다. 서현 씨와 함께 말이지.

우리가 안으로 들어서자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시선들이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모인다.

왜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같은 거 보면 파티장에 누구 오셨을 때, ‘베스트팔렌 대공 누구누구 공작 각하께서 오셨습니다아~’ 그러면서 빵빠레 막 울리고, 그러면 사람들이 오오오오 하고 쳐다보잖아.

문을 지키고 있던 사람이 ‘중앙그룹 강서현 님께서 입장하십니다아아!’라고 소리치지는 않았지만, 딱 봐도 서현 씨를 알아보는 눈빛이다.

서현 씨를 확인한 사람들의 눈이 곧이어 나에게로 향한다.

누구지? 처음 보는데? 중앙그룹 쪽 사람인가? 누구 아들인가? 어떻게 할까? 가서 인사를 해야 하는 인물일까? 아니면 무시해도 될까?

그런 의미를 담은 눈빛이 날 스캔하고 있다.

아, 이거 생각보다 더 불편한데? 불편하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하고. 괜히 온다고 했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한 중년 남자가 우리 쪽으로 다가온다.

“이거 이거, 서현 씨 아니신가요?”

40대 후반? 50대 초반?

외형에서 느껴지는 나이는 그 정도인 것 같은데, 겉보기와는 안 어울리게 느끼한 분위기가 감도는 중년 남자가 서현 씨에게 다가가며 인사한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리 말씀드렸지만, 강우현 팀장님의 출장 관계로 제가 대신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서현 씨는 그 느끼중년남과 이미 아는 사이인지,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넨다.

“하하하. 환영합니다. 강 팀장님도 좋지만, 저는 서현 씨가 와주신 게 훨씬 더 기쁘네요. 아. 오빠분에게는 비밀입니다.”

느끼중년남은 그렇게 말하고는 한쪽 눈을 찡긋하고 윙크를 한다.

그 윙크를 보는데 갑자기 김치말이국수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원한 국물을 마시고 싶었다.

“그런데 옆의 분은…?”

중년느끼남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한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호의적인 시선은 아니다.

“네. 이분은….”

서현 씨는 그렇게 말하고는 중년느끼남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한다.

귓속말을 들은 중년느끼남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친다.

그리고는 ‘호오~’ 하는 얼굴로 날 바라보는데, 그 시선에 적의가 느껴진다.

“…그러시군요. 반갑습니다. 장현호입니다.”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손을 내민다.

“씨에이치디픽쳐스의 장현호 대표님이세요.”

서현 씨가 재빨리 나에게 중년느끼남에 대해 소개해준다.

씨에이치디픽쳐스가 뭐 하는 데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이 중년느끼남이 오늘의 호스트인가 보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어 중년느끼남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한 손만을 사용했고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고, ‘한수입니다’라는 인사도 없었다.

그냥 악수만 했다.

서현 씨가 저 남자에게 나를 어떻게 소개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는 사람에게 연장자라는 이유로 예의를 차리고 싶지는 않았다.

할아버지도 그랬다. 예의는 상호적인 거라고.

하지만 뭐 지가 어쩔껴? 다음에 또 볼 사이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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